조성복
[ 趙聖復 ]
-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집의 재임 때 양역의 폐단을 지적하는 등 제도의 개선에 관심을 보였으며,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요구하는 소를 올려 신임사화의 단초가 되었다.
출생-사망 | 1681 ~ 17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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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풍양(豊壤) |
자 | 사극(士克) |
호 | 퇴수재(退修齋) |
시호 | 충간(忠簡) |
국적 | 한국 |
활동분야 | 정치 |
본관은 풍양(豊壤)이고 자는 사극(士克), 호는 퇴수재(退修齋)이다. 1702년(숙종 2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지평·정언·장령·헌납 등 삼사(三司)의 언관직을 두루 지냈다.
1716년 지평 재임 때 윤선거(尹宣擧)의 선정(先正) 칭호의 금지를 청하고, 1721년(경종 1) 헌납 재임 때는 윤선거의 문집 판각(板刻)을 없앨 것을 주장하는 등 노론계의 입장에서 언론 활동을 펼쳤다. 또 집의(執義) 재임 때는 양역(良役)의 폐단을 지적하는 등 제도의 개선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왕세제(王世弟:영조)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건의하여 노론측의 지지로 실현이 결정되었으나, 소론측이 크게 반발하여 철회되었다.
이 사건은 신임사화(辛壬士禍)의 싹이 되었는데, 소론측의 공격을 받고 제주도 정의(旌義)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723년에 다시 서울로 압송되자, 옥중에서 음독 자살하였다. 영조 즉위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林川面)의 퇴수서원(退修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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