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춘

유희춘

[ 柳希春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1547년 벽서(壁書)의 옥(獄)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고,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면되어 직강 겸 지제교에 재등용되었다. 경사와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미암일기》외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16세기 호남사림을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힌다.
출생-사망 1513 ~ 1577
본관 선산(善山)
인중(仁仲)
미암(眉巖), 문절(文節)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미암일기(眉巖日記)》 《시서석의(詩書釋義)》 《헌근록(獻芹錄)》

본관 선산(善山). 인중(仁仲). 미암(眉巖). 시호 문절(文節). 1513년(중종 8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았던 집 뒤의 바위가 눈썹의 모양이라고 해서 호를 미암(眉巖)이라고 지었다. 그의 고조는 감모만호를 지냈는데 이때 영남에서 순천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해남에서 살게되었다. 여류문인 송덕봉(宋德峯)이 유희춘의 처이다. 20세 때 최산두(崔山斗)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대둔사, 도갑사에 머물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1537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4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다음 수찬 ·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1547년 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가 윤임, 유관, 유인숙의 죄를 물어 숙청하라는 밀지를 내리자 이에 부당함을 논하다가 벽서(壁書)의 옥(獄)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였다. 1558년 그의 모친이 사망하였지만 그는 귀양지에 머물러야 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면되어 성균관 직강(直講) 겸 지제교(知製敎)에 재등용되었다. 이어 대사성 ·부제학 ·전라도관찰사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575년(선조 8)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1576년 선조에게 사직을 청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머물다가 사망하였다.

경사(經史)와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미암일기(眉巖日記)》 《속위변(續諱辨)》 《주자어류전해(朱子語類箋解)》 《시서석의(詩書釋義)》 《헌근록(獻芹錄)》 《역대요록(歷代要錄)》 《강목고이(綱目考異)》 등의 저서를 남겼다. 좌찬성에 추증되어 담양(潭陽)의 의암서원(義巖書院), 무장(茂長)의 충현사(忠賢祠), 종성(鍾城)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