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성종

[ 聖宗 ]

요약 중국 요(遼)나라 제6대 황제로 거란의 최전성기를 이끈 군주이다.
출생-사망 971 ~ 1031
국적/왕조 중국 요(遼)
재위기간 982년∼1031년
본명 야율융서(耶律隆緖)
별칭 시호(諡號) 문무대효선황제(文武大孝宣皇帝)
활동분야 정치

성종은 요(遼)의 제6대 황제이다. 성은 야율(耶律), 이름은 융서(隆緖)이며, 어릴 때의 이름(小字)은 문수노(文殊奴)이다. 971년 12월 요의 제5대 황제 경종(景宗, 재위 969~982)과 예지황후(睿智皇后) 소씨(蕭氏)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980년 1월 양왕(梁王)으로 봉해졌다. 982년 9월 경종이 사냥을 나갔다가 병이 나서 35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12세의 야율융서가 즉위하여 황제가 되었다. 다만 성종이 바로 친정(親政)하지는 않았고, 경종의 유언에 따라 어머니인 예지황후가 섭정하였다. 10월 신하들이 성종에게 소성황제(昭聖皇帝)라는 존호(尊號)를 올렸고, 황후를 황태후로 높였다. 983년 6월 연호통화(統和)로 정하였으며, 신하들이 성종에게 천보황제(天輔皇帝), 황태후에게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라는 존호를 올렸다. 승천황태후의 섭정은 그녀가 사망하는 1009년까지 총 27년 동안 이루어졌다. 때문에 성종의 재위기 중 982년~1009년까지는 승천황태후의 치세로 이해된다. 특히 승천황태후는 한덕양(韓德讓, 耶律隆運)을 신임하여 그를 대승상으로 삼아 함께 중대사를 의논하였다.

국내 정치(내정)

성종과 승천황태후의 치세에는 능력에 따라 거란의 황실, 외척, 귀족은 물론 한인(漢人)에게도 기회를 부여하였다. 한인은 대체로 전투에서 패배하여 항복하였거나 거란에 사신으로 왔다가 억류된 사람들과 그 후손으로 구성되었는데, 출신을 배제하고 능력만을 평가하여 관료로 발탁한 것이다. 거란 출신으로는 야율휴가(耶律休哥)·야율사진(耶律斜軫)·소달름(蕭撻凜) 등이, 한인 출신으로는 한덕양·왕계충·장검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청렴을 중점으로 한 관료들의 고과를 시행하였다. 통화 16년(998)년에는 관료의 급료를 내탕(內帑)에서 지급하도록 하였고, 태평 11년(1022)부터는 지방에서 인재를 추천하도록 하는 공거(貢擧)를 시행하였다.

소송과 사법 부문의 개혁도 이루어졌다. 등문고원(登聞鼓院)을 설치하여 억울함이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였고, 각지에서 심리 중이던 사건을 신속히 처결할 것을 지시하였다. 성종과 승천황태후는 공정한 판결을 위하여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들을 직접 대면하여 사건을 매듭짓기도 하였다. 또한 이미 판결이 끝난 사건이라도 당사자의 억울함이 있다면 호소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흉작에 대비하여 의창(義倉)을 설치하였고, 재해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는 백성들과 빈민들을 구휼하였으며, 재해와 전쟁 등으로 생활이 곤궁해진 주(州)의 조세를 감면하였다. 거란의 정복 활동 중에 포로가 되었거나 채무 등으로 노비가 된 자들을 국가의 예산으로 해방하여 호적에 등록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각지에 관료를 파견하여 농업을 권장하였고, 가축을 풀어 농작물에 피해를 주거나, 병사들이 군영 밖의 민가를 약탈하던 관례를 금지시켰다. 백성들에게 소와 종자를 지급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는 조치도 이루어졌다. 이는 거란의 전체 생산력 향상으로 이어졌고, 국방력 강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국제 정치(외정)

위와 같은 내정의 안정은 거란의 대외 영향력 확대로 연결되었다. 985년 송, 고려와 연결하여 거란의 후방을 교란하던 여진에 대한 정벌을 단행하여 복속시켰다. 이때 발해 유민들이 세운 정안국(定安國)이 멸망하였다고 이해된다. 994년에는 거란의 변경을 침입하던 조복(阻卜)을 공격하여 영토를 넓혔고, 국경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거란, 발해, 여진, 한인 등을 이주시켰다.

또한 993년부터 1019년까지 약 30년 동안 고려를 공격하였다. 송과의 충돌에 앞서 배후에서 송과 관계를 형성하고 있던 고려를 거란의 편으로 만들어 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차 공격(993) 때는 강화 협상을 체결하여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단절하도록 하는 한편 고려의 강동6주(江東六州) 지배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지 않자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재차 고려를 공격하였다. 2차 공격(1010~1011) 때는 승천황태후 사후 친정(親政)하던 성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를 입었다. 성종은 고려의 왕이 친조(親朝)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3차 공격(1018~1019)을 단행하였으나 귀주에서 강감찬(姜邯贊)에게 크게 패배하였다.

반편 송과의 전쟁에서는 큰 성과를 올렸다. 거란은 태종(太宗) 시절, 석경당(石敬瑭)이 후당(後唐)을 멸망시키고 후진(後晉)을 세울 때 도와주어 그 대가로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할양받았다. 이후 5대10국 시대를 종결지은 송은 거란이 차지한 연운16주의 회복을 지속적으로 도모하였고, 성종 재위 초반인 986년에도 군사를 일으켰다. 이에 성종은 승천황태후와 함께 1004년에 2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송을 공격하였다. 거란은 송의 수도 개봉(開封, 지금의 중국 허난성 카이펑시) 인근의 전주(澶州, 지금의 중국 허난성 푸양시)까지 진군하였으나, 구준(寇準)의 제안에 따라 진종(眞宗)이 전주까지 북상하자 송군의 사기가 올라 전선은 정체되었다. 양국은 서로를 제압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여 강화 협상을 추진하게 되었다. 협상 결과 거란과 송은 형제 관계를 맺었고, 백구하(白溝河)를 경계로 삼기로 하였다. 또한 송은 매년 거란에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세폐(歲幣)로 보내기로 하였다. 이를 전연의 맹약(澶淵─盟約)이라고 한다. 전연의 맹약으로 거란과 송은 약 100년 동안 평화를 누렸고, 상호 교류의 증가로 경제, 문화의 발달이 이루어졌다.

사망

위와 같은 성종 시기의 내정과 외정으로 거란은 최전성기를 맞이하였고, 거란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때문에 《요사(遼史)》는 성종에 대해 거란의 여러 황제 중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하였다. 성종은 재위 49년째인 1931년 61세로 행궁(行宮)에서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무대효선황제(文武大孝宣皇帝)이고 묘호(廟號)는 성종(聖宗)이며, 경릉(永慶陵, 지금의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츠펑시)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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