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호

연호

[ 年號 ]

요약 중국에서 비롯되어 한자(漢字)를 사용하는 아시아의 군주국가에서 쓰던 기년법(紀年法).

원호(元號) ·다년호(大年號)라고도 한다. 중국서는 본래 건국기년(建國紀年)으로 일관하여 그 왕조의 연도를 기록하지 않고 군주의 재위에 따라서 해를 세었는데, 처음에는 특별한 명칭의 연호는 없었다. 따라서 군주를 상속하면 새 군주가 즉위한 이듬해를 그 원년(元年)으로 하여 기록하였다. 그러나 한(漢) 무제(武帝) 때인 기원전 114년 무렵에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로 연호 제도가 정비되어 한 무제의 즉위년을 기준으로 6년을 단위로 나누어 건원(建元, 기원전 140년~기원전 135년), 원광(元光, 기원전 134년~기원전 129년), 원삭(元朔, 기원전 128년~기원전 123년), 원수(元狩, 기원전 122년~기원전 117년), 원정(元鼎, 기원전 116년~기원전 111년), 원봉(元封, 기원전 110년~기원전 105년)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로써 건원(建元)을 최초의 연호로 하여, 연호에 의한 기년법이 확립되었다. 따라서 건원이 최초의 연호가 된다. 또 그때까지 지방의 제후들도 각자의 재위에 따라 연도를 기록했는데 이로부터 중국은 통일된 연호를 사용하게 되어 기년(紀年)도 통일되었으며, 중국에 신속(臣屬)한 외국들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를 “정삭(正朔)을 받는다”고 하는데, 이는 중국의 황제로부터 연호가 붙은 달력을 하사받아 사용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것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391년부터 사용한 ‘영락(永樂)’이 문헌상 최초이다. 신라에서는 536년(법흥왕 23)에 건원(建元, 536∼550)을 최초의 연호로 사용하였고, 진덕여왕 때까지 개국(開國, 551∼567)ㆍ대창(大昌, 568∼571)ㆍ홍제(鴻濟, 572∼584)ㆍ건복(建福, 584∼633)ㆍ인평(仁平, 634∼647)ㆍ태화(太和, 647∼650) 등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649년(진덕여왕 3) 당나라 태종이 신라에서 연호를 따로 사용함은 부당하다고 하여, 650년부터는 당나라의 연호 영휘(永徽)를 사용하였다. 발해는 대조영(大祚榮)이 건국한 699년에 진(震)이라는 국호와 함께 천통(天統)이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국호를 발해(渤海)로 고친 뒤 2대 무왕(武王) 이후에는 대대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태봉국(泰封國)을 세운 궁예(弓裔)는 처음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궁예 스스로 4차례 개원하였다.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은 등극하여 천수(天授)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4대 광종(光宗)은 광덕(光德) ·준풍(峻豊)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나, 이후 말기까지는 중국의 연호를 썼다.

조선왕조는 처음부터 명(明)나라의 제후국을 자인하였기 때문에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않다가 청나라가 청 ·일전쟁에 패배하여 종주국 행세를 못하게 되자 음력으로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으로 고쳐 개국 505년 1월 1일로 쓰면서 독자적으로 건양(建陽)을 연호로 사용하였다. 이듬해 8월에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면서 동한(東漢:後漢)을 중흥시킨 광무제(光武帝)에 연유하여 연호를 광무라 하였는데, 1910년(융희 4) 국권피탈과 함께 연호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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