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의 정변

강조의 정변

[ 康兆─政變 ]

요약 고려 목종 12년(1009)에 서북면순검사 강조가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한 사건.

배경

981년 고려의 왕 경종(景宗, 재위 975∼981)은 오랫동안 앓은 병이 악화되어 죽음을 앞에 두고 있었다. 그에게는 980년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皇甫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 왕송(王誦)이 있었으나 왕위를 잇게 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결국 경종은 사촌동생 개령군(開寧君) 왕치(王治)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숨을 거두었다. 왕치가 바로 성종(成宗, 재위 981∼997)이다. 성종은 어린 조카 왕송을 궁에서 길렀고, 990년 12월 개령군(開寧君)에 봉하였으며, 997년 병세가 심해지자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렇게 18세의 나이로 즉위한 개령군 왕송이 바로 목종(穆宗, 재위 997∼1009)이다.

목종은 18세의 나이였음에도 친정(親政)하지 못하고 어머니인 헌애왕후가 섭정하였다. 헌애왕후는 천추전(千秋殿)에 거처한다고 하여 세간에서 천추태후(千秋太后)라 불렸다. 목종은 개정전시과(改定田柴科)를 시행하고 과거 및 지방관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6위(衛)의 군영을 만들고 덕주(德州, 평안남도 덕천시), 곽주(郭州, 평안북도 곽산군), 흥화진(興化鎭, 평안북도 피현군), 통주(通州, 평안북도 선천군)를 포함한 여러 북방 요충지에 성을 쌓는 등 방어 체계를 강화하였다. 다만 위와 같은 목종의 치적이 천추태후의 섭정으로 이루어졌는지는 기록이 부실하여 확인할 수 없다.

천추태후는 경종이 죽은 후 외가 쪽 친척으로, 승려를 가장하여 천추전에 출입한 김치양(金致陽)과 가까워졌다. 둘의 사이는 점차 긴밀해졌는데, 이 사실을 안 성종이 김치양을 장형(杖刑)에 처한 후 유배를 보내 일단락되었다. 목종이 즉위하자 김치양은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으로 임명되어 다시 궁궐로 돌아왔고, 다시 천추태후와 가까워져 권력을 누렸다. 목종은 어머니의 마음이 상할까 두려워하여 김치양을 내쫓지 못하였다.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사통하여 아들을 낳았고, 둘은 자신들의 아들을 후계자가 없던 목종의 다음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이에 12세의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을 핍박하여 승려로 만든 뒤 삼각산(三角山)의 신혈사(神穴寺) 보내 감시하면서 여러 차례 죽이고자 하였다. 대량원군은 태조(太祖)의 손자였기에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아들보다 왕위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1009년 1월 16일(이하 음력) 대부(大府)의 기름 창고에서 발생한 화재로 천추전 등 궁궐 일부가 불에 타자 이를 본 목종은 상심하여 정사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병이 들었다. 이를 기회로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병석에 누운 목종에게 지은대사(知銀臺事) 좌사낭중(左司郞中) 유충정(劉忠正)이 김치양의 모반 계획을 알렸고, 대량원군은 간사한 무리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며 도와달라는 글을 보냈다. 목종은 자신의 병중에 벌어지는 후계를 둘러싼 암투를 인지하게 되었다. 이에 목종은 급사중(給事中)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채충순(蔡忠順)을 불러 마지막 남은 태조의 후손인 대량원군을 보필하라고 명령하였다. 채충순은 이부시랑(吏部侍郞) 중추원사(中樞院使) 최항(崔沆), 유충정과 논의하여 선휘판관(宣徽判官) 황보 유의(皇甫兪義)를 보내 대량원군을 맞아오자고 제안하였다. 목종은 이를 받아들였고, 대량원군에게 선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와 함께 서북면순검사(西北面巡檢使) 강조(康兆)에게 사람을 보내 입궐하여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다.

전개

목종의 명령을 받은 강조는 군대는 이끌고 동주(洞州, 황해북도 서흥군) 용천역(龍川驛)에 이르렀는데, 내사주서(內史主書) 위종정(魏從正)과 안북도호(安北都護)의 장서기(掌書記) 최창(崔昌)이 거짓으로 ‘왕은 위독한 상황이고 반란을 계획한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이 왕명을 날조하여 강조를 불러들인 것이니, 마땅히 서북면의 군대를 일으켜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들의 말을 옳게 여긴 강조는 본영으로 돌아갔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목종의 명령을 빙자하여 자신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죽이려 한 모략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강조가 본영으로 돌아가자 강조의 아버지는 강조에게 ‘왕은 이미 죽었으며 간사하고 흉악한 자들이 국정을 장악하였으니 군대를 이끌고 와 국난을 바로잡으라’는 전갈을 보냈다. 이에 강조는 목종이 죽고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정권을 장악한 것으로 판단하여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진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강조는 정확한 개경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였는데, 천추태후가 강조의 군대를 염려하여 절령(岊嶺, 자비령) 일대를 통제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김치양 일파를 토벌하고자 개경으로의 진군을 결심한 강조는 이부시랑(吏部侍郞) 이현운(李鉉雲) 등과 함께 5,000명의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평주(平州, 황해북도 평산군)에 이르러 아직 목종이 죽지 않았음을 알고는 개경으로의 진군을 망설이게 되었다. 왕의 명령 없이 군대를 일으켰으니 졸지에 반란군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일이 이미 이렇게까지 진행되었는데 멈출 수 없다’고 하자 강조는 다시 개경으로 향하였다. 이와 함께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새 왕으로 옹립할 계획을 세워 분사감찰(分司監察) 김응인(金應仁)에게 대량원군을 찾도록 하였다.

2월 강조는 목종에게 표를 올려 ‘지금 나라의 후계가 정해지지 않아 간사한 무리가 왕위를 넘보고 있는데, 이러한 혼란은 왕께서 유행간(庾行簡) 등의 아첨만을 믿었기 때문에 발생하였습니다.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맞이하여 개경으로 가 명분을 바로 잡고 악한 무리를 제거할 것인데, 왕께서 놀라실까 염려스러우니 용흥사(龍興寺)나 귀법사(歸法寺)에 가 계시면 일이 마무리된 후에 다시 모시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개경에 도착한 강조는 자신은 대초문(大初門)에 머무르고, 이현운은 영추문(迎秋門)으로 가게 하였다. 이현운은 군대를 이끌고 영추문을 지나면서 크게 소란을 피웠는데, 목종은 크게 두려워하여 유행간을 잡아 강조에게 보냈다. 강조의 군대가 입성하자 급사중(給事中) 탁사정(卓思政)과 낭중(郞中) 하공진(河拱辰)은 강조의 편에 붙었다. 강조는 대초문으로 온 최항을 보고 인사하였으나, 최항이 ‘옛날에도 이러한 일이 있었는가’라고 묻자 대답하지 못하였다. 군사들이 궁궐에 난입하자 목종은 천추태후와 함께 통곡하며 채충순, 유충정 등과 함께 법왕사(法王寺)로 나갔다. 강조가 건덕전(乾德殿)에 이르자 군사들이 그에게 만세를 외쳤다. 강조는 이를 제지하였고, 김응인과 황보유의가 신혈사(神穴寺)에서 대량원군을 모셔오자 연총전(延寵殿)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결과와 영향

위와 같은 일련의 과정으로 강조는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顯宗, 재위 1009∼1031)을 옹립하였다. 또한 김치양과 그 아들 등 7명은 처형하였고, 남은 일당과 천추태후의 친족 등 30여 명은 섬에 유배보냈다. 또한 목종을 폐위시켜 양국공(讓國公)으로 삼아 천추태후와 함께 충주(忠州)로 가게 하였고,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부암(傅巖) 등에게 감시하도록 하였다. 목종은 최항에게 ‘변란이 일어난 것은 내가 부덕한 탓이며, 시골에서 노년을 보내길 바란다’는 말을 현종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목종이 적성현(積城縣)에 도착하자 강조가 보낸 상약직장(尙藥直長) 김광보(金光甫)가 독약을 올렸다. 목종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김광보는 목종을 호위하던 중금군(中禁軍)의 안패(安霸) 등에게 목종을 죽이지 않으면 멸족당할 것이라는 강조의 말을 전하였다. 그날 밤 안패 등은 목종을 죽였고, 강조에게는 목종이 자결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강조는 목종을 적성현에서 제사 지내고 한 달 뒤에 화장하였으며, 능의 이름을 공릉(恭陵), 시호를 선령(宣靈), 묘호를 민종(愍宗)으로 정하였다. 목종이 죽자 천추태후는 황주(黃州)로 옮겨져 21년을 더 살다가 현종 20년(1029) 66세의 나이로 숭덕궁(崇德宮)에서 사망하였다.

한편 거란은 난을 일으켜 목종을 죽인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으로 1010년 11월 40만 명의 군대로 고려를 공격하였다. 강조의 정변이 전쟁의 구실이 된 것이다. 고려는 외교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강조는 거란군에 맞서 통주(通州,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싸우다가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강조는 거란의 황제 성종(聖宗)의 회유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다가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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