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양

김치양

[ 金致陽 ]

요약 고려 목종 때의 권신(權臣).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의 총애로 권력을 누렸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다가 강조의 정변으로 처형되었다.
출생-사망 ? ~ 1009
본관 동주(洞州, 지금의 황해도 서흥(瑞興))
활동분야 정치
시대 고려시대

등장과 축출

생년은 미상이다. 동주(洞州, 황해북도 서흥군) 출신으로, 목종(穆宗, 재위 997∼1009)의 어머니 헌애왕후(獻哀王后, 천추태후) 황보씨(皇甫氏)의 외족(外族)이다. 승려를 가장하여 천추궁(千秋宮)에 드나들어 헌애왕후와 각별한 사이라는 추문이 돌았다. 둘 사이에 대한 소문을 들은 성종(成宗, 재위 981∼997)이 김치양을 잡아들여 곤장을 친 후에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 헌애왕후와 한동안 단절되었다.

복귀와 권력 장악

그러나 성종이 사망하고 목종이 왕위를 계승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목종은 어머니 헌애왕후에게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라는 존호를 올렸는데, 천추전(千秋殿)에 거처한다고 하여 세간에서 천추태후(千秋太后)라 불렸다. 곧 천추태후는 유배 간 김치양을 불러들여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에 제수하였고, 우복야(右僕射) 겸 삼사사(三司事)로 임명하는 등 김치양은 천추태후의 비호 아래 파격적으로 승진하였다. 김치양의 권세는 계속 강성해져 그의 일파가 요직을 차지하였으며, 뇌물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는 300여 간(間)의 집에 화려한 누각과 정자, 정원, 연못을 짓고 밤낮으로 천추태후와 즐겼으며, 자신의 고향인 동주에 성수사(星宿寺)를, 궁궐의 서북쪽에 시왕사(十王寺)를 세우기도 하였다. 특히 시왕사의 종에는 ‘같이 선한 업을 쌓아 함께 열반의 지혜(菩提)를 얻으리라’는 내용의 글을 새겼다고 전한다.

강조의 정변과 김치양의 사망

목종은 항상 김치양을 쫓아내고 싶어 하였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 그러지 못하였다. 그런데 김치양과 천추태후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자신들의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세우려 한 것이다. 당시 목종이 자녀가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마지막 남은 태조(太祖)의 손자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이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다. 둘은 12세의 대량원군을 강제로 승려로 만든 뒤 삼각산(三角山)의 신혈사(神穴寺)로 보냈다. 목종이 정무를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병이 들자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관료들을 포섭하고 대량원군을 해치려 하였다. 이에 사람을 시켜 독이 든 술과 음식을 대량원군에게 보냈는데, 신혈사의 노승(老僧)이 대량원군을 숨기고는 그가 절에 없다며 독살을 막았다.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자신들의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세우려 한다는 계획은 곧 목종의 귀에 들어갔다. 지은대사(知銀臺事) 좌사낭중(左司郞中) 유충정(劉忠正)이 김치양이 반란을 모의한다고 알렸고, 대량원군은 간사한 무리가 자신을 죽이려 하니 도와달라는 글을 보낸 것이다. 목종은 급사중(給事中)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채충순(蔡忠順)에게 대량원군을 데려오게 하였고, 서북면순검사(西北面巡檢使) 강조(康兆)를 불러들여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다. 김치양은 목종의 계획을 알았으나 어찌할 방법을 몰라 며칠을 아무 조치를 취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정에 불만을 가진 내사주서(內史主書) 위종정(魏從正)과 안북도호(安北都護)의 장서기(掌書記) 최창(崔昌)이 거짓 정보로 강조를 본영으로 돌려보냈고, 천추태후는 서북면에서 개경으로 향하는 관문인 절령(岊嶺, 자비령) 일대를 통제하여 궁궐의 일이 강조의 귀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목종이 죽고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권력을 장악하였다고 판단한 강조는 군대를 일으켜 개경으로 진군하였다. 이후 강조는 목종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곧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옹립하기로 결정하였다. 목종 12년(1009) 2월 개경에 입성한 강조는 김치양과 그 아들, 유행간(庾行簡) 등 7명을 죽였고 김치양의 일파와 천추태후의 친족 30여 명을 섬으로 유배하였다. 천추태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왕으로 세워 고려의 왕성(王姓)을 바꾸려던 김치양은 강조의 정변으로 최후를 맞이하였다.

김치양 사후 천추태후는 폐위된 목종과 함께 충주(忠州)로 보내졌다. 강조가 목종을 독살한 뒤에는 황주(黃州, 황해북도 황주군)로 옮겨져 21년을 더 살다가 현종 20년(1029) 66세의 나이로 숭덕궁(崇德宮)에서 사망하여 유릉(幽陵)에 장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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