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

강조

[ 康兆 ]

요약 고려의 장군으로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거란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고려를 침략하자 통주에서 맞서 싸우다가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출생-사망 ? ~ 1010
활동분야 정치, 군사
시대 고려

출신과 생년은 확인되지 않는다. 고려 목종(穆宗, 재위 997~1009) 시기 여러 관직을 거쳐 중추사(中樞使) 우상시(右常侍)가 되었고,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로 임명되었다.

강조의 정변

1009년(목종 12) 1월 목종은 김치양(金致陽)의 반란 계획을 눈치채고, 서경(西京)에 나가있던 강조에게 입궐하여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다. 왕명을 받은 강조는 군대를 이끌고 개경(開京, 개성특별시)으로 가다가 내사주서(內史主書) 위종정(魏從正)과 안북도호(安北都護)의 장서기(掌書記) 최창(崔昌)의 거짓말에 속아 진군을 멈추고 임지로 돌아갔다. 그러자 강조의 아버지가 강조에게 ‘왕은 이미 죽었으며 간사하고 흉악한 자들이 국정을 장악하였으니 군대를 이끌고 와 국난을 바로잡으라’는 전갈을 보냈다. 이에 강조는 김치양 일파가 목종을 죽이고 권력을 잡았다고 여겨 이부시랑(吏部侍郞) 이현운(李鉉雲) 등과 함께 5,000명의 군사를 일으켜 개경으로 향하였다.

개경에 입성한 강조는 김치양과 그 아들 등 7명을 처형하였고, 남은 일당과 천추태후(千秋太后, 헌애왕후)의 친족들은 섬에 유배보냈다. 또한 대량원군(大良院君)을 새로운 왕(현종(顯宗))으로 옹립하였고, 목종은 폐위하여 양국공(讓國公)으로 삼았다. 그러나 곧 충주로 이동하던 목종을 죽여 그곳에서 장사지냈다.

거란의 제2차 침략

새로 고려의 왕이 된 현종(顯宗)은 1009년 2월 강조를 중대사(中臺使), 3월 이부상서(吏部尙書)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1010년 5월 강조의 정변이 거란에 알려지자, 거란은 이를 고려 침략의 빌미로 삼기 시작하였다. 7월 거란은 사신을 보내 목종의 죽음에 대해 물었다. 고려는 외교적으로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지만 거란은 군대를 일으켰다. 그리고 고려는 전쟁 준비에 돌입하였다. 강조는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가 되어 이부시랑(吏部侍郞) 이현운, 병부시랑(兵部侍郞) 장연우(張延祐) 등 여러 장군과 군사 30만 명을 이끌고 통주(通州, 평안북도 선천군)에 진을 쳤다. 통주는 대규모 군대가 이동하려면 꼭 거쳐야 하는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11월 거란의 성종(聖宗)이 군주를 시해한 강조를 벌하겠다며 직접 4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흥화진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양규(楊規) 등의 저항으로 흥화진을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강조가 주둔하던 통주로 이동하였다.

통주전투

강조는 군대를 셋으로 나누었다. 자신은 통주성 서쪽의 삼수채(三水砦)에 주둔하였고, 남은 두 부대는 산과 성곽 근처에 배치하였다. 강조는 검거(劍車)를 동원하여 여러 차례 거란군을 막아내었으나 계속된 승리로 방심하게 되었다. 강조가 주변 사람들과 장기를 두고 있었을 때 거란의 선봉장 야율분노(耶律盆奴)가 야율홍고(耶律弘古), 야율적로(耶律敵魯)와 함께 삼수채를 기습하였다. 거란군의 기습을 알리는 급보가 들어왔지만, 강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거란군이 얼마가 오든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재차 많은 거란군이 진영 안에 진입하였다는 보고가 날아들었고, 강조는 그제야 상황의 위급함을 깨달았다. 결국 강조는 거란군에 사로잡혔다. 또한 이 전투로 노정(盧頲)·서숭(徐崧)·노제(盧濟) 등이 전사하였고, 이현운·노전(盧戩)·노의(盧顗)·양경(楊景)·이성좌(李成佐) 등은 포로가 되었다. 강조가 사로잡히자 고려군은 급격하게 무너졌다. 거란군은 추격을 개시하여 고려군 30,000여 명을 죽이고 수많은 식량, 병장기 등을 노획하였다.

사망

강조는 이현운 등과 함께 성종에게 끌려갔다. 성종은 강조의 결박을 풀어주며 신하가 되길 회유하였으나, 강조는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거절하였다. 반면 이현운은 회유에 응하였고, 성종은 결국 강조를 처형하였다.

강조의 정변으로 인해 시작되었던 제2차 거란의 침략은 강조가 죽었음에도 끝나지 않았다. 거란의 성종은 흥화진에서 계속 저항하던 양규에게 강조의 명의로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며 전쟁을 이어나갔다. 이후 거란은 개경까지 진군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양규·김숙흥(金叔興) 등의 분전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였고, 현종의 친조(親朝)를 조건으로 고려와 강화하였다. 제2차 거란의 침략이 끝난 후 1011년 8월 강조의 일파였던 탁사정(卓思政), 박승(朴昇), 최창(崔昌), 위종정(魏從政), 강은(康隱) 등은 섬으로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