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금성관

나주 금성관

[ 羅州 錦城館 ]

요약 나주객사에서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와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시고 예를 올리던 의례 공간. 2019년 10월 25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나주 금성관

나주 금성관

지정종목 보물
지정일 2019년 10월 25일
소장 나주시
관리단체 나주시
소재지 전라남도 나주시 금성관길 8 (과원동, 나주 금성관)
시대 조선시대
종류/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관아
크기 1동(정청 603.19㎡, 월대(계단포함) 79.57㎡)

나주객사는 조선 전기에 건립된 객사(客舍)로 각종 의례를 행하거나 외국 사신이나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이 나주군에 머물 때 사용하던 숙소이다. 나주객사는 정청(正廳)인 금성관과 동·서익헌으로 구분되는데, 금성관은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와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리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하던 공간이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르면 객사의 정청에서는 망궐례 뿐만 아니라 전문(箋文)을 올리는 의식, 교서(敎書)를 받는 의식, 내향(內香)을 맞이하는 의식, 관찰사(觀察使)를 맞이하는 의식 등 여러 의례 행사가 행해졌으며, 관아보다도 위계가 높은 관영시설로 고을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나주객사의 역사 

나주객사가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바탕으로 조선 성종대에 나주 목사 이유인(李有仁)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 1617년(광해군 10)에 나주목사 김개(金闓)가 금성관을 크고 웅장하게 중수하였다. 1775년에는 화재로 인해 전소된 나주객사를 다시 중수하였고, 1885년에는 건물을 다시 한번 중수하고 시설을 확충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이 건국되면서 나주객사 정청에서 망궐례가 더 이상 치루어지지 않게 되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객사로서의 지위를 완전히 잃게 되었다. 1919년 금성관은 나주군청으로 사용되었고, 동익헌과 서익헌, 망화루 등은 모두 철거되었다. 1972년 나주 금성관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그때부터 나주객사 복원이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나주 금성관의 건축 양식

나주 금성관는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건축물로, 통영 세병관, 여수 진남관과 같은 단일형 객사를 제외하고는 현존하는 객사 정청 건축물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다. 의례적 공간이었던 정청이 동·서익헌보다 위계가 높은 건물임을 나타내기 위해 정청의 기단을 좌우 익헌보다 한 단 높게 설계하였는데, 독특한 점은 대개 객사 정청의 경우 양 옆으로 익헌을 거느리기 때문에 맞배지붕 형식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금성관은 팔작지붕으로 설계되어 건축되었다. 민흘림 기둥 위에 1출목3익공공포를 올렸으며, 월대와 건축물의 평면 그리고 천장 등은 다른 객사들과는 달리  궁궐의 정전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가치 및 의의

나주 금성관은 나주객사의 정청으로 조선시대에 나주군 관내의 많은 공적 활동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지방 객사들이 훼철되었으나, 금성관의 경우 철거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남아있어 역사적인 가치가 높다. 또한 나주 금성관(정청)은 조선시대 객사 건축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클 뿐 아니라, 유일하게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건축물로 희소적 가치를 갖는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19년 10월 25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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