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옹

김우옹

[ 金宇顒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명종 ·선조 때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599년 한성부좌윤이 되어 모함에 빠진 류성룡을 위하여 항소하여 그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동강김우옹 신도비

동강김우옹 신도비

출생-사망 1540 ~ 1603
본관 의성
숙부
동강 ·직봉포의
시호 문정
주요저서 《동강문집》 《속자치통감강목》 《경연강의》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경상북도 성주(星州)에서 출생하였다. 자 숙부(肅夫). 호 동강(東岡) ·직봉포의(直峰布衣). 시호 문정(文貞)이다. 남명 조식(曺植)의 문인이며 김우옹의 부친 김희삼(金希參 1507~1560)은 조식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가 15세 되던해 조식의 제자였던 오건(吳健)에게 학문을 배웠다. 24세 때 남명의 외손녀와 혼인하였다. 1567년(명종 2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를 역임하고, 1573년(선조 6)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오랫동안 경연관(經筵官)으로 있었다. 부수찬(副修撰) ·전적(典籍) ·교리(校理) ·직제학(直提學) 등을 역임하고, 1583년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갔다가,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적괴(賊魁) 정여립(鄭汝立)과 교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회령(會寧)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속강목(續綱目)》 15권을 찬(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와 행조(行朝)에 가서 부호군(副護軍)이 되어 비어기무(備禦機務) 7조를 건의하고, 병조참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대사성(大司成)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였다. 1599년 다시 한성부좌윤이 되어 모함에 빠진 류성룡(柳成龍)을 위하여 항소(抗疏)하여 그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김우옹은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학통을 동시에 이어받은 선비로 분류되며 그의 후반기에는 정치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퇴계의 문인들과 교우가 두터웠기 때문에 퇴계 문인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선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붕당정치의 혼란이 심해지자 동인과 서인의 중간자로서 중재 역할을 하였다.

1602년 교정청당상(校正廳堂上) 및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고 이어 부제학 ·이조참판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회령의 향사(鄕祠), 청주의 봉계서원(鳳溪書院), 성주(星州)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저서 《동강문집(東岡文集)》 《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 등과 편저에 《경연강의(經筵講義)》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