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황

김황

[ 金榥 ]

요약 유학자. 당시 한주학파(寒洲學派)의 주리학(主理學)을 대표하던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그 학통을 계승하였다. 제1차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동문들과 《면우집》을 간행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적극적으로 모았다.
출생-사망 1896 ~ 1978.12
본관 의성(義城)
이회(而晦)
중재(重齋)
별칭 우림(佑林)
활동분야 유학
출생지 경남 의령군 어촌리
주요저서 《쇄기》 《사례수용》

본관 의성(義城)이며 자 이회(而晦), 호는 중재(重齋)이다. 일명 우림(佑林)으로도 불리며 동강 김우옹의 후손이다. 그의 부친은 유학자였던 매서(梅西) 김극영(金克永)이다. 경상남도 의령(宜寧) 어촌리에서 출생하였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아버지를 따라 경상남도 산청군 황매산(黃梅山) 만암(晩巖)이라는 산골로 이사하여 독서에 전념하였다. 당시 한주학파(寒洲學派)의 주리학(主理學)을 대표하던 면우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문명을 떨쳐 그 학통을 계승하였다. 1919년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여하였다가 김창숙(金昌淑)을 만났고, 파리강화회의에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김창숙이 장서를 가지고 상하이[上海]로 떠난 후 일본경찰에게 발각, 제1차 유림단사건(儒林團事件)으로 옥고를 치렀다. 1926년 동문들과 《면우집(俛宇集)》을 간행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적극적으로 모았다. 그들이 김창숙에게 건네준 거액의 자금이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폭(東洋拓殖株式會社投爆) 등 독립운동에 사용된 것이 드러나 제2차 유림단사건으로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28년 산청군 내당촌으로 이사하여 강학(講學)을 시작하였는데 그 후 50년 동안 1,000명의 문도(門徒)를 배출하였다. 8·15광복 후에도 대학생·교수들이 몰려와 내당서사(內塘書舍)는 한때 전국 유림의 중심이 되었다.

그는 동서고금의 모든 학문을 광범위하고 치밀하게 섭렵, 한주학파의 ‘심즉이설(心卽理說)’을 기반으로 하는 도학(道學)을 정립하였다. 일제강점기창씨개명을 단호히 거부하고 끝내 보발(保髮)하여 끝까지 도학의 전통을 지키는 마지막 유종(儒宗)의 모습을 보였다. 1978년 12월, 그가 죽자 조객이 운집하였고, 장례는 유월장(踰月葬)으로 지냈다. 저서로 《쇄기(鎖記)》 《사례수용(四禮受用)》 《동사략(東史略)》 《익붕당총초(益朋堂叢鈔) 》 등이 있다.

카테고리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