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숙

김창숙

[ 金昌淑 ]

요약 한국의 유학자·독립운동가·정치인. 3·1운동 후 망명을 결심, 전국 유림대표들이 서명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진정서를 들고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했다. 서로군정서를 조직,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쑨 원과 교섭, 독립운동기금을 원조받았다.
심산 김창숙선생 동상

심산 김창숙선생 동상

출생-사망 1879.7.10 ~ 1962.5.10
본관 의성
문좌
심산·벽옹
활동분야 정치, 유학, 독립운동
출생지 경북 성주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본관 의성(義城). 자 문좌(文佐). 호 심산(心山)·벽옹(躄翁). 경북 성주(星州) 출생이다. 어려서 유학을 배웠고 문장에 능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올라가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한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성토하는 상소(上疏)를 올렸으며,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9년(융희 3)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창립, 육영사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망명을 결심, 전국 유림대표들이 서명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진정서(儒林團陳情書)를 휴대하고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하였다.

그 해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고, 이듬해 귀국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다가 제1차 유림단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가서 1921년 신채호(申采浩) 등과 독립운동지인 《천고(天鼓)》의 발행에 이어, 박은식(朴殷植) 등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조직,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쑨원[孫文]과 교섭, 독립운동기금을 원조받았다.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당선되었다.

1927년 상하이 주재 일본영사관원에게 붙잡혀 본국으로 압송되어 징역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원을 역임,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하고 회장 및 성균관장을 역임하였고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하여, 초대학장에 취임하였다.

6·25전쟁 후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하야(下野)경고문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고,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이시영(李始榮)·김성수(金性洙)·조병옥(趙炳玉)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反獨裁護憲救國宣言)을 발표하여 권력비호세력으로부터 테러를 당하였다.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으며, 그 해 5월 10일 노환으로 별세한 뒤 사회장(社會葬)으로 예장(禮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