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영

이시영

[ 李始榮 ]

요약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정치가. 만주 신흥강습소를 설립, 독립군양성에 힘썼다. 임시정부, 한국독립당에 참여했다. 1948년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승만 통치에 반대했다. 제2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 낙선했다.
이시영선생묘

이시영선생묘

출생-사망 1869.12.3 ~ 1953.4.17
본관 경주
성재 ·시림산인
본명 성흡
활동분야 독립운동, 정치
출생지 서울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49)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본명은 성흡(聖翕), 호는 성재(省齋)·시림산인(始林山人)이다. 조선 말기인 1869년(고종 6) 서울 저동에서 태어났다. 1885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1886년 가주서(假注書), 1887년 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쳐, 1888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89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승지(副承旨)에 이어 우승지(右承旨)에 올라 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의 부제조(副提調)를 겸하고, 다시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궁내부(宮內部) 수석참의(首席參議)를 역임하였으나, 1896년 장인인 김홍집(金弘集)이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905년 외부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에 재등용되고, 1906년 평남 관찰사로 나갔다가 1908년 한성(漢城)재판소장 ·법부 민사국장(民事局長)·고등법원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만주로 망명하여 류허현[柳河縣]에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뒤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 독립군 양성에 힘쓰다가 1919년 4월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총장·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1929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가하여 초대 감찰위원장에 피선되었고, 1933년 임시정부 직제 개정 때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였다.

그뒤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위원장으로 활약하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제헌국회에서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하여 헌신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견제와 실정(失政)으로 뜻을 펴지 못하다가 1951년 '거창 양민학살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부의 실정(失政)과 부패를 성토하는 〈국민에게 고한다〉라는 성명서를 국회에 전달하고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한동안 정계를 떠나 있다가 1952년 5월 민주국민당의 거듭된 요청으로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10.9%의 득표에 그쳐 이승만(74.6%)·조봉암(11.4%)에 이어 3위로 낙선하였으며, 1953년 4월 17일 피난지인 부산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국민장(國民葬)을 치른 뒤 서울의 정릉(貞陵) 남쪽에 안장되었다가 1964년 지금의 강북구 수유동 73-3번지로 이장되었다.

이른바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리던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형 건영(健榮)·석영(石榮)·철영(哲榮)·회영(會榮), 동생 호영(頀榮)과 함께 6형제가 전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집안으로 유명하며,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대종교(大倧敎) 활동에도 힘써 사교교질(司敎敎秩)·원로원장 등을 맡았으며, 저서로는 《감시만어(感時漫語)》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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