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구락부사건

국제구락부사건

[ 國際俱樂部事件 ]

요약 1952년 6월 20일, 이시영(李始榮) ·김성수(金性洙) ·장면(張勉) 등 81명의 인사가 부산의 국제구락부에 모여 정부측이 내놓은 ‘대통령직선제개헌안’에 반대하여 반독재 호헌구국선언(反獨裁護憲救國宣言)을 꾀한 사건.

1952년 1월 8일 정부측이 제안한 대통령직선제(大統領直選制)와 양원제(兩院制) 개헌안이 부결되자 정부측에서는 국회해산과 반민의(反民意)국회의원 소환 등의 위협적인 견해를 표명함과 동시에 관제(官製) 데모를 일으켜 국회의원들을 위협하였다. 이에 국회측은 의원 곽상훈(郭尙勳)으로 하여금 122명의 서명을 얻은 ‘내각책임제개헌안’을 제출하도록 하여 정부와 정면으로 대립하였다. 국회해산을 위하여 정부측이 동원한 땃벌떼, 백골단(白骨團), 민중자결단(民衆自決團) 등의 관제 데모와 공비소탕을 이유로 한 비상계엄 실시, 5월 25일의 국회의원 납치 등의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는 가운데, 28일 국회에서는 11명의 구속의원 석방과 계엄령해제안을 가결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묵살하였고, 국제연합 한국위원단의 계엄령과 연행의원의 석방을 촉구하는 성명 역시 묵살하였다. 6월 20일 신흥우(申興雨) ·김창숙(金昌淑) 등의 인사가 국제구락부에 모여 입법부(立法府) 수호에 대한 구국선언을 꾀하다가, 회장에 난입한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유혈 속에 중지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신라회(新羅會)의 장택상(張澤相)과 삼우장(三友莊) 사이의 의견을 절충한 ‘발췌개헌안’이 7월 4일 통과, 7일 공포되었으며, 7월 28일에는 비상계엄이 해제되었다.

참조항목

부산정치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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