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축옥사

기축옥사

[ 己丑獄事 ]

요약 조선 선조 때인 1589년에 정여립을 비롯한 동인의 인물들이 모반의 혐의로 박해를 받은 사건.

기축사화(己丑士禍)라고도 한다. 기축년(己丑年)인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告變)에서 시작해 그 뒤 1591년까지 그와 연루된 수많은 동인(東人)의 인물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대립과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정여립은 원래 서인(西人)인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과 가까이 교유하였다. 그는 1570년(선조 2) 문과에 급제한 뒤에 예조(禮曺) 좌랑(佐郞),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등을 지냈으며, 이이는 여러 차례 그를 천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동인인 이발(李潑) 등과 가까이 지냈으며, 이이가 죽은 뒤에 공개적으로 이이와 성혼 등을 비판하여 서인들의 반감을 사서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다. 그는 동인의 중심인물로 떠올랐으나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전주(全州)로 내려가 진안(鎭安)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짓고 강론을 하며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다. 1587년에는 전주부윤의 요청을 받아 대동계원들과 함께 전라도 도서 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기도 했다.

하지만 1589년 황해감사 한준(韓準), 안악군수 이축(李軸), 재령군수 박충간(朴忠侃) 등은 정여립이 대동계를 이끌고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선조(宣祖)에게 고변(告變)하였고, 체포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정여립은 죽도에서 갑작스럽게 죽었다. 그가 관군을 피해 피신했다가 자결했다고 하지만, 서인의 음모로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서인 세력은 동인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기회로 삼기 위해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확대하였고, 그 뒤 2년 넘게 서인인 정철(鄭澈)의 주도 아래 수많은 동인의 인물들이 탄압을 받았다. 이발(李潑)·이길(李洁)·이급(李汲) 형제와 백유양(白惟讓)·백진민(白振民) 부자를 비롯해 조대중(曺大中)·유몽정(柳夢井)·최여경(崔餘慶)·이황종(李黃鍾)·윤기신(尹起莘)·이진길(李震吉) 등이 정여립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일당으로 몰려 심문을 받다가 죽임을 당했으며, 영의정 노수신(盧守愼)과 우의정 정언신(鄭彦信), 직제학(直提學) 홍종록(洪宗祿) 등 동인의 핵심 인물들이 파직되었다. 특히 조식(曺植)의 문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는데, 조식의 제자인 최영경(崔永慶)은 역모의 또 다른 괴수로 인식된 길삼봉(吉三峯)으로 몰려 옥사(獄死)를 당하기도 했다.

정여립의 사건과 관련된 국문(鞠問)은 3년 가까이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동인 1,000여 명이 화를 입었으며,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동인은 몰락하고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호남 출신의 관직 등용에 제한이 가해지기도 했다. 1591년 서인들은 이산해(李山海)와 류성룡(柳成龍)도 정여립 사건과 연루된 것으로 몰아가려 했으나, 서인들의 지나친 세력 확대에 반발한 선조가 정철을 파직함으로써 기축년에 시작된 옥사(獄事)가 마무리되었다.

정여립이 실제로 모반을 하였다고 확실히 드러난 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이 사건이 서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은 당시부터 제기되었다. 동인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송익필(宋翼弼)과 정철의 음모로 날조된 사건이라는 것이다. 정여립이 조직한 대동계가 비밀조직이 아니라 관의 요청에 따라 왜구 토벌에도 나섰던 공개 조직이며, 당시 정권을 주도하고 있던 동인 세력이 스스로 모반을 할 이유도 없었다는 것이 이러한 주장의 주된 근거로 제시된다.

정여립이 가지고 있던 급진적인 정치사상이 옥사(獄事)를 불러왔다는 해석도 있다.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公物)로 일정한 주인이 있을 수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라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을 주장하며 혈통에 근거한 왕위 계승의 절대성을 비판하고 왕의 자격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성현(聖賢)의 통론(通論)이 아니었다”며 주자학적인 ‘불사이군론(不事二君論)’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혁신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정치의 도리와 의(義)를 강조한 조식(曺植)의 문인이나 성리학의 주체적 해석을 강조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들에게서 많이 나타나고 있던 것으로 모반의 근거로 볼 수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

기축옥사는 조선시대에 당쟁(黨爭)을 확대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동인과 서인의 갈등은 점차 심화돼 1592년 임진왜란의 발생도 막지 못하였다. 그리고 동인이 다시 정국을 주도하게 되면서 서인에 대한 처리를 둘러싸고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뉘었고, 이는 이황(李滉) 계열의 남인(南人)과 조식(曺植) 계열의 북인(北人)으로 동인이 다시 분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광해군 때에 북인인 정인홍(鄭仁弘)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기축옥사 당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복권을 추진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기축옥사는 모반 사건으로 계속해서 남게 되었다.

카테고리

  •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