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만 전쟁

페르시아 만 전쟁

다른 표기 언어 The Persian Gulf War

요약 이라크와 쿠웨이트간 국경 분쟁으로 인해 발발한 전쟁. 1990년 8월, 국경 분쟁 끝에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강제적으로 병합하자, UN은 이라크에게 철수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사담 후세인은 끝까지 철수를 거부했다. 1991년 1월, UN군의 이라크 공습으로 페르시아 만 전쟁이 시작되었다. 2월 28일 종전이 되었고, 이라크의 기반시설과 군대는 궤멸 상태에 이르렀으며, 쿠웨이트는 독립을 되찾았다. 이라크의 사상자가 20여 만 명이었던 데 비해 연합군의 사상자는 200여 명에 불과했던 이 전쟁은 국제전 중 가장 일방적이었던 전쟁으로 인정받고 있다.

페르시아 만 전쟁(The Persian Gulf War)
페르시아 만 전쟁(The Persian Gulf War)

배경

이라크, 쿠웨이트의 국경 분쟁

쿠웨이트를 병합한 이라크와 국제연합군이 벌인 전쟁. 이 전쟁의 동기는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뿌리 깊은 국경 분쟁에서 비롯되었다. 역사적으로 이라크쿠웨이트와 국경선 확정 문제를 놓고 여러 차례에 걸쳐 국경 분쟁을 겪었는데, 이들 분쟁지역 중 특히 페르시아 만 어귀에 위치한 와르바와 부비얀 섬은 페르시아 만 지역의 세력 균형을 변경시킨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페르시아 만 연안지역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이라크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의 국경 확정 협상에서 이 지역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으므로 쿠웨이트와 벌어진 이후의 협상은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결국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이들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협상'(negotiations)이 아니라 '실력 행사'(force)를 통해서 획득하고자 했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전격적으로 기습, 8월 8일에는 쿠웨이트를 공식적으로 병합했다.

국제연합의 조치

이에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는 1990년 8월 3일 이라크에게 쿠웨이트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8월 6일 이라크에 대한 전세계적인 무역금지 조치를 선포했다. 또한 미국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군은 이라크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에 군대를 파병했으며, 이집트를 비롯한 여러 아랍 국가들도 반(反)이라크 연합에 가담하여 자국의 군대를 파견했다.

철수 경고와 이라크의 거부

11월 29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만약 이라크가 1991년 1월 15일까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지 않는다면, 이라크에 대해 무력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공식 선언했다. 1991년 1월 후세인에 대항하는 '다국적군'의 병력은 미군 54만 명과 영국·프랑스·이집트·사우디아라비아·시리아 군(軍), 그리고 그밖의 몇몇 국가에서 파견된 군대를 포함하여 총 70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후세인은 끝까지 쿠웨이트에서 이라크 군의 철수를 거부했으며,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한 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동).

경과

전쟁 발발

이와 같은 이라크의 태도 표명에 따라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은 1991년 1월 16~17일 대대적인 공중폭격과 함께 페르시아 만 전쟁을 개시했다. 이후 수주일간 지속된 공중폭격은 이라크군의 사령부·통신시설·발전소·군용비행장·방공시설·화학무기 및 핵무기 공장 등의 많은 시설물들을 파괴시켰다. 1991년 2월 중순 연합군은 공격목표를 쿠웨이트와 이라크 남부에 주둔하고 있던 전진 지상군으로 변경하여 요새시설·엄폐호·무기고·탱크·장갑차량 등을 파괴했다. 2월 24일 대대적인 연합군의 지상공격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북동지역에서 쿠웨이트와 이라크의 남부지역을 향해 시작되었고, 3일 후 연합군은 이라크 저항군을 무찌르고 쿠웨이트 시를 탈환했다.

종전과 쿠웨이트 독립

한편 연합군의 주요 장갑차 부대는 쿠웨이트의 서쪽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2월 27일에는 이라크 남동부의 바스라 남부지역에서 끈질기게 저항하던 이라크 수비대를 거의 섬멸시켰다. 2월 28일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정전을 선포할 무렵 이라크 저항군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패전 후 사담 후세인 정권에 반대하는 민중 소요가 이라크 전역을 휩쓸었지만 후세인은 이러한 소동을 가까스로 진압했다. 쿠웨이트는 독립을 되찾았고, UN이 이라크에 가한 무역규제 조치는 종전 후에도 계속되었다(→ 사막의 폭풍 작전).

결과

페르시아 만 전쟁은 현대에 일어났던 어떤 전쟁보다도 가장 일방적인 군사적 승리를 거둔 전쟁으로 기록될 것이다. 전쟁의 희생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쿠웨이트에 배치되었던 약 55만 명의 이라크군 가운데 최소한 5만~1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15만 명이 부상당했으며, 실종자는 15만 명, 포로는 6만 명에 이르렀다. 반면에 다국적군인 연합군의 사망자 수는 전투중에 사망한 약 130명과 그밖의 사고로 인한 사망자 100명을 합하여 약 230명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