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담 후세인

사담 후세인

다른 표기 언어 Saddam Hussein
요약 테이블
출생 1937. 4. 28, 이라크 티크리트
사망 2006. 12. 30, 이라크 바그다드
국적 이라크

요약 이라크의 정치가이자 전 대통령. 대통령 자리에 올라 페르시아만 전쟁과 이란-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수니파 무슬림 하층민 출신으로 1957년 바트 사회주의당에 입당했으나, 바트당 정권이 몰락하자 체포되어 수감생활을 했다. 그 후 국가원수인 바크르 대통령과 함께 권력을 장악했고, 1979년 바크르가 사임하자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1980년 이란 침공을 개시했고, 1990년에는 쿠웨이트를 기습 공격해 페르시아만 전쟁을 일으켰다. 2003년 미국과 동맹군은 제2차 페르시아만 전쟁을 일으켜 이라크를 점령했다. 후세인은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고 처형당했다.

목차

접기
  1. 개요
  2. 초기 생애
  3. 대통령 취임
  4. 이란-이라크 전쟁
  5. 쿠웨이트 침공
  6. UN의 후세인 정권 축출
  7. 제2차 페르시아만 전쟁
  8. 사형 선고
후세인(Saddam Hussein)
후세인(Saddam Hussein)

개요

이라크의 정치인이자 전 대통령. 1972년 이라크 석유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했고,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

초기 생애

사담 후세인은 1957년 바트 사회주의당에 입당하여 바트당이 주도한 이라크의 아브둘 카림 카셈 총리 암살사건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여 부상을 입고 시리아·이집트 등지로 피신했다. 그곳에서는 1962~63년 카이로법과대학을 다녔으며, 1963년 바트당이 이라크에서 정권을 장악한 뒤에는 바그다드법과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그해에 바트당 정권이 몰락하자 사담 후세인은 체포되어 이라크 감옥에서 여러 해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그후 다시 망명하여 바트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또한 쿠데타를 지휘하여 1968년 다시 바트당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했다. 그후 국가원수인 아흐마드 하산 알 바크르 대통령과 함께 권력을 장악하고 1972년 석유산업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대통령 취임

1979년 정부의 개방을 주장하던 사담 후세인은 그해에 바크르가 사임하자 그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그후 사담 후세인은 혁명사령평의회 의장, 총리 및 기타 직위를 겸임했다. 대규모 비밀경찰을 창설하여 후세인의 지배체제에 대한 국내의 반발을 완전히 무마시켰으며, 국민들로 하여금 도처에서 그를 개인 숭배하도록 만들었다. 대통령으로서의 후세인의 목표는 아랍 세계의 지도국으로서 이라크가 이집트를 대신하는 것이었으며, 페르시아 만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국민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석유 수익을 이용하는 것 등이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샤트알아랍 수로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기로 한 사담 후세인은 1980년 9월 이란 침공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곧 소모전의 양상을 띠어갔다. 사담 후세인은 전쟁비용과 석유수출중단 사태로 야심에 찬 경제발전계획을 축소해야 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계속해서 교착상태에 빠지자, 1988년 이란과 이라크는 드디어 종전에 합의했다.

이라크는 전쟁이 끝난 후 많은 외채를 지고 있었으나 후세인은 계속해 군대를 증강했다. 1990년 8월 후세인의 군대는 인접국가인 쿠웨이트를 기습공격했다. 후세인은 표면적으로 이라크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쿠웨이트의 방대한 석유 수입을 이용려 한다고 밝혔으나 그의 쿠웨이트 점령은 전세계적으로 신속한 대이라크 무역 제재조치를 유발시켰다.

쿠웨이트 침공

또한 사담 후세인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국 주도의 대규모 군사력이 증파되고,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을 비난하면서 그러한 불법 점령을 종식시키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국제연합(UN) 결의안이 통과되었는에도 쿠웨이트에서 그의 군대를 철수시키라는 국제여론을 무시했다. 1991년 1월 16일에 시작된 6주일 전쟁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은 이라크 군대를 쿠웨이트에서 몰아냈다. 전쟁에서 대패한 후 사담 후세인은 국내적으로 이라크의 시아파와 쿠르드족이 일으킨 반란에 직면했으나 간신히 이 폭동을 진압하고 그의 권력을 유지했다.

UN의 후세인 정권 축출

UN은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제조치와 함께 생화학 무기와 핵무기의 개발 및 생산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은 UN의 무기사찰을 계속 거부했고, 미국과 영국은 이를 빌미로 1998년 말 '사막의 여우'라는 작전명으로 4일 동안 이라크를 폭격했다. 미국은 무기사찰단의 이라크 입국을 거부하고 UN의 제제 아래 점점 더 잔혹해지는 후세인 정권을 축출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미국은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 테러 사건을 빌미로 국제사회를 계속 압박했다. 결국 UN은 2002년 11월 무기사찰단의 이라크 입국을 허용하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이라크는 무기사찰단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고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이 금지된 무기를 숨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2003년 3월 17일 부시 대통령은 후세인에게 48시간 이내에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와 이라크를 떠나라고 선언했고 그렇지 않으면 전쟁을 하겠다고 선포했다. 또한 후세인이 떠나더라도 새로운 정부를 안정시키고 금지된 대량살상무기를 찾기 위해 미군은 계속 주둔하겠다고 말했다. 사담 후세인은 이를 거부했고 미국과 동맹군은 3월 20일 이라크 공격을 개시했다.

제2차 페르시아만 전쟁

이렇게 시작된 제2차 페르시아만 전쟁은 미국이 4월 9일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5월 1일 이라크를 완전히 점령하며 끝났다. 사담 후세인과 두 아들인 우다이와 쿠사이는 도피했지만 그의 두 아들은 7월 22일 모술에서 미군과의 교전 중 사망했으며, 후세인은 8개월 동안의 도피 끝에 12월 13일 그의 고향인 티크리트 인근에서 붙잡혔다.

사형 선고

2006년 11월 사담 후세인은 1982년 자신의 암살기도 사건과 관련해 두자일 마을의 시아파 주민 148명을 학살한 죄목으로 1심 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2006년 12월 26일 항소심에서 사형 선고가 확정되었다. 그리고 12월 3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