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트 문학

켈트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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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게일어와 그 파생어인 스코틀랜드게일어·맹크스어, 웨일스어와 그 자매어인 브르타뉴어·콘월어로 씌어진 작품들의 총체.

이 모든 글의 기원을 추적하면 그리스도교 이전 시대, 켈트족의 문학까지 더듬어갈 수 있는데, 켈트족에는 학식 있는 드루이드교 성직자들이 있었고, 그중에는 예언자(vates)이자 음유시인(bards)으로서 특수기능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드루이드교 성직자들에게는 초심자들을 훈련하기 위한 학교에서 문자를 사용하지 않고, 완전히 암송에 의존해 가르쳤다. 음유시인들은 찬양시 또는 그 반대의 풍자시들을 노래했다. 이는 그들이 노래 속 주인공들의 명성을 증대 또는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영웅적 행동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여부를 결정했다는 것을 뜻한다. 귀족들과 음유시인들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아일랜드는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된 적이 없었으므로 로마화가 일부 진행된 브리튼 지역(스코틀랜드·웨일스·콘월)보다 훨씬 켈트 문화를 잘 보존할 수 있었으며, 또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고, 그결과 이방(異邦) 신들의 사제인 드루이드교 성직자들은 사라지고 '필리드'(filid)라고 불린 사람들이 그들에 이어 고유의 문화를 육성시켰다. 필리드라는 말은 원래 '예언자'를 뜻했으나 나중에는 시인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들은 선배들이 지녔던 예언자적 힘을 일부 유지하는 사람들이었으리라 여겨진다. 그들은 원래 학식 있는 계층의 사람들로서 국민 구전전통을 지키고 물려줄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들이 남긴 족보 및 법률의 단편들은 외우기 좋게 운문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스도교에는 자체의 문화와 학자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다른 나라들보다 아일랜드의 토착문화에 관대했다. 그들은 또한 수세대를 지나면서도 아일랜드 혼자의 힘으로는 개발할 수 없었던 문자체계도 들여왔으며, 그결과 세속적·종교적인 문화가 크게 융성하게 되었다.

아일랜드인들은 곧 유럽에 그리스도교 선교사들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9세기에는 학자로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이것은 바이킹족 침입의 영향으로 고대 수도원체계가 붕괴되고 많은 학식 있는 아일랜드인들이 귀중한 필사본들을 가지고 외국으로 도망갔기 때문이었다. 바이킹족이 격퇴된 뒤에는 문예부흥이 있었다. 그러나 라틴어가 아닌 게일어 지식을 강조한 부흥이었다. 아일랜드는 비록 앵글로노르만족의 침입으로 사회적 혼란이 초래되기는 했어도 12세기에 발흥한 문예부흥을 받아들이기에 좋은 여건이 형성되어가고 있었다.

또한 교회가 더욱더 로마화되고 유럽 대륙과의 접촉이 빈번해지게 되었다.

성직에 있는 학자들은 구전에 바탕을 둔 전설들을 기술하는 데 새로운 노력을 기울였다. 12세기에 간행된 〈던 카우의 서 Lebor Na Huidre(Book of the Dun Cow)〉와 그뒤의 〈라인스터의 서 Book of Leinster〉가 그러한 노력의 성과를 입증해주고 있다.

이 필사본들과 후대의 필사본, 예를 들어 16세기의 〈리스모어 수석사제의 서 Book of the Dean of Lismore〉에는 스코틀랜드게일어 시인들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고, 또 중세 전반에 걸쳐 게일어를 사용하는 스코틀랜드인들도 아일랜드 문화를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이들 필사본은 그 범위와 다양성, 고풍스러운 점에서 괄목할 만한 문학의 본체를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서 얼스터 전설, 신화, 역사이야기, 떠돌이 애국기사 페니언 전설 등을 다루고 있다.

가장 유명한 일련의 전설담은 울라이드족의 전설이다(울라이드라는 말에서 얼스터라는 명칭이 유래했음). 울라이드의 왕 콘초바, 소년 전사(戰士) 쿠 쿨레인, 코너트 여왕 메드브, 숙명적인 연인 노이지와 데어드라 등이 초기 아일랜드 서사시로 가장 가깝게 접근한 것은 바로 울라이드 사가들의 요소들인데 〈쿨리의 가축습격 Tráin Bó Cuailnge〉이 그것이다.

이 책은 7, 8세기에 처음 편집되었으며, 간결하고 생생한 묘사가 특히 두드러진다. 가장 멋진 부분은 얼스터에서 망명해온 페르거스가 쿠 쿨레인의 젊은시절의 업적들을 회상하는 부분이다.

비록 고대문학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통틀어 〈마비노기온 Mabinogion〉이라 불리는 11편의 웨일스 이야기는 아일랜드어로 된 것보다 후대의 것이며 후대의 필사본, 14세기경의 〈리데르치의 백서(白書) White Book of Rhydderch〉·〈헤르게스트의 홍서(紅書) Red Book of Hergest〉에 보존되어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11세기 후반 또는 그 이후의 〈마비노기의 4가지 The Four Branches of the Mabinogi〉인데, 이것은 명확히 민담의 특징을 지닌 〈쿨루치와 올웬 Culhwch and Olwen〉(1100경)보다 훨씬 세련된 서술구조를 보여준다. 〈쿨루치와 올웬〉과 3편의 로맨스 〈오아인과 루네드 Owain and Luned〉·〈게라인트와 에니드 Geraint and Enid〉·〈에프라우그의 아들 페레뒤르 Peredur the Son of Efrawg〉에 아서 왕이 주인공으로 나오며, 이 3편의 로맨스는 각각 12세기 프랑스의 시인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이뱅 Yvain〉·〈에레크 Erec〉·〈페르스발 Perceval〉에 상응하는 작품이지만 이들 작품 사이의 정확한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다.

연대기 작가 몬머스의 제프리가 쓴 〈영국 왕 열전 Historia regum Britanniae〉(1136경)은 아서 왕 전설과 켈트 문학의 주제들을 유럽 문학의 주류가 되게 한 책이었다. 제프리는 노르만족과 함께 브리튼 정복에 나선 브르타뉴 가문의 후예였는데, 브르타뉴 사람들은 당시 이야기꾼으로 유명했다.

그러므로 브르타뉴는 켈트 전설이 나온 또 하나의 원천이었을 수도 있다. 불행하게도 1450년경에 발견된 브르타뉴의 정치적 예언서 〈아서와 구엔글라프의 대화 The Dialogue between Arthur and Guenglaff〉를 제외하고는 브르타뉴어나 콘월어로 씌어진 켈트적 중세 산문이나 시는 별로 없는 편이다. 초기 브르타뉴 문학은 몇 편의 단편적인 시를 제외하고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현존하는 중세 브르타뉴 텍스트는 16세기와 그 이후의 것으로서 대부분 원본이 아니다.

이들은 크게 종교시와 운문으로 씌어진 종교희곡으로 나눌 수 있는데, 종교시 가운데 가장 긴 것은 〈죽음의 거울 The Mirror of Death〉(1519)이고 3편의 종교희곡은 성 논, 성 그웨놀레, 성 바버라의 생애를 다룬 것이다. 〈성 캐서린의 생애 The Life of St. Catherine〉(1576 출판)는 번역물이기는 하지만 현존하는 것 중 최초의 중요한 산문이다. 중세 콘월어로 씌어진 현존하는 최초의 텍스트는 1400년경의 극작품으로, 한 소녀의 미덕을 칭송하며 아내로 삼을 것을 권하는 내용이다. 15세기 이후의 것으로는 장시(長詩) 〈우리 주의 수난 The Passion of Our Lord〉과 희곡 3부작 〈오르디날리아 Ordinalia〉가 있으며, 1504년부터는 〈메리아세크의 생애 The Life of Meriasek〉가 나왔다.

최초이자 유일한 근대 콘월어 작품 〈천지창조 The Creation of the World〉(1611)는 콘월어가 몰락하기 시작할 때 나타났다. 아일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 등지에 살고 있는 켈트족의 대표적인 문학가였던 음유시인들이 콘월이나 브르타뉴에서는 자신들의 위치를 확립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중세 후기의 게일어·스코틀랜드게일어·웨일스어 음유시인들은 그들 선대로부터 물려받았던 찬양시의 전통을 이어갔고 실제로 찬양시는 그들의 주요 장르였다.

여러 종류의 학교에서 계속 훈련을 받은 덕분으로, 그들은 엄격한 운율과 세련된 기교가 조화를 이루고 있고 가장 전통적인 내용이 담긴 시편들을 쓸 수 있었다. 아일랜드에서 시인들은 점차 음유시인을 배출하는 가문의 일원이 되었으며, 그 대표적인 것이 오델리 가문이다. 그들은 작품의 범위를 오로지 그들을 후원하는 군주를 찬양하는 것으로 제한했으며, 보다 엄격한 시운과 호화로운 장식을 고집했고 역사와 족보학의 두 분야에 관련된 전통민간전승을 주특기로 삼았다.

토착 귀족이 사라지면서 후원이 끊기게 되자 음유시인의 학교들이 해체되었고 'dán díreach' 운율은 여전히 수식이 많기는 하지만 보다 간결한 'amhran'(노래운)에 밀려나게 되었다. 웨일스 시는 6세기초의 음유시인인 탈리에신·아네이린과 더불어 시작되었는데, 12~13세기에 주로 왕을 위해 시를 쓴 시인들의 송시(awdlau)에서 발흥하여 귀족계급과 영지 소유 귀족을 위해 글을 썼던 시인들의 시(cywyddau)에서 그 전통이 이어졌다. 튜더 왕조 때부터 영지 소유 귀족들이 점차 앵글로화됨에 따라 시인들은 후원자를 잃고 그들의 직업적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cywyddau'격은 이 운을 잘 활용한 최초의 천재 시인 다피드 아프 그윌림(1340~70 활동)에 의해 '송시'보다 융성하게 되었으며 1435~1535년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엄격한 이들 운율은 그이후 '자유운'에 밀려나긴 했지만 계속 쓰였다.

인쇄술의 발명, 르네상스, 종교개혁(이는 특히 아일랜드에서 강한 저항에 부딪혔음)은 켈트 문학에 거의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인문주의 영향이 두드러지고 웨일스어로 번역된 성서가 심대한 영향을 끼쳤던 웨일스에서는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8세기의 감리교부흥운동은 처음으로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된 웨일스인들의 가슴에 프로테스탄티즘을 깊이 심어주었으며, 가장 위대한 찬송가 작가인 윌리엄 윌리엄스(1717~91)를 배출했다.

다른 곳에서는 중세식 사고방식이 사라진 지 오래된 후까지도 아일랜드·스코틀랜드·브르타뉴의 일부지역에서는 좀체로 없어지지 않고 지속되었다.

그 결과 이 지역에는 20세기까지 예외적으로 풍부한 민간전승이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자치정부가 없었고, 또 모국어가 아닌 기타 언어에 바탕을 둔 교육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켈트어 산문은 발전이 지연되어 현대생활의 필요에 잘 적응할 수 없었고, 소설과 같은 새로운 문학형식을 받아들이는 일이 지체되었다. 켈트어가 쇠퇴함으로써 그 사용자들은 2개 국어 사용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작가들은 제2언어 또는 외국어를 문학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앵글로아일랜드어, 앵글로스코틀랜드어, 앵글로웨일스어, 프랑코브르타뉴어 문파(文派)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언어부흥운동은 아일랜드어·스코틀랜드게일어·웨일스어·브르타뉴어를 쓰는 작가를 배출했다. 이들은 대단히 활기차게 훌륭한 장편·단편 소설, 희곡들을 써냈으며, 현대적 감각이 돋보이는 시들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