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드

필리드

다른 표기 언어 filid

요약 고대 게일의 전문적인 낭송시인.
단수형은 fili.

공식적인 임무는 과거의 이야기와 족보를 보존하여 구전하고 통치자의 과거와 현재의 영광을 시로 짓는 것이었다.

필리드는 거대한 귀족계급을 형성했기 때문에 이들을 유지하는 비용이 점점 더 많이 들게 되었고, 애호가들에게 지나친 요구를 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필리드의 위력은 대단하여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들이 신체적인 피해나 심지어 죽음까지도 가져올 수 있는 대단한 위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진 풍유시(아에르)를 지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했기 때문이다. 5세기에 아일랜드가 그리스도화한 뒤 필리드는 불법으로 쫓겨난 드루이드의 시적 기능을 대신 떠맡았다. 그리스도화되기 전만 해도 드루이드는 이교도인 켈트족 학자를 대표하는 세력 있는 계급이었다. 필리드는 그 결과 당시 학문의 본산이었던 수도원들과 연계를 갖게 되었다.

필리드는 7개의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중 가장 학식이 낮고 최하위에 있는 계급이 바드(고대 켈트의 음유시인)였다. 최상위 계급은 올람이라고 했는데 12년의 연구를 거쳐 300개의 어려운 운율과 250개의 기본적인 이야기 및 100개의 복잡한 이야기를 터득해야만 올라갈 수 있었다. 올람은 자주빛 새털로 장식된 외투를 걸치고 그 직위를 상징하는 막대기를 들고 다녔다.

필리드는 처음에는 독일어 시가와 비슷한 시행을 구사했으나(두운으로 연결된 2행의 불완전 시행) 후에는 운율법을 자세히 규정해 반드시 이 법칙에 따르는 시를 제작했다. 시행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데비데 시형이었는데, 2행의 영웅 연구로 이어진 4행연구로서 강약강약의 압운 형식을 취했다. 6세기 이후에는 필리드에게 토지가 하사되었다. 그들은 공식적인 시가를 쓰는 것 이외에 그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법률·문학·국사 등을 가르쳤다. 이들의 학문이 후일의 바드 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12세기경에 이르러 필리드는 애호자들의 조상이나 영웅적 행위에 대해 노래하지 않고 애호자들의 인간성을 칭송한 개인적인 시나 서정적인 자연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이상 엄격한 운율법을 지키지 않게 되었다. 필리와 바드 간의 경계도 점차 허물어졌으며, 13세기경에 이르러 필리드는 사라지고 바드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