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운동

여성운동

다른 표기 언어 women's liberation movement , 女性運動 동의어 feminist movement, 페미니즘, feminism

요약 feminist movement라고도 함.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지위 및 권리를 가지며, 직업과 생활양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하려는 운동.

여성운동(women's liberation movement)
여성운동(women's liberation movement)

여성의 권리에 대한 관심은 계몽운동에서 비롯되었다. 계몽운동기에 자유·평등·개혁 사상이 부르주아·농민·도시노동자 계급에서 여성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여성의 권리에 대한 초기 사상을 완성한 사람은 1792년에 영국에서 〈여성의 권리 옹호 A Vindication of the Rights of Women〉를 출간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였다. 그녀는 여성은 남성의 쾌락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관념을 비판하면서 여성도 교육·직업·정치에서 남성과 똑같은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9세기에 이르러 남녀동권사상을 구체화한 것은 여성참정권획득 운동이었지만 그당시까지는 사회적 지위·역할·경제 분야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근본적이고 폭넓은 재평가를 하지 못했다. 19세기 후반 소수의 여성들이 전문직업을 갖기 시작했고, 20세기에 이르러 여성 전체가 참정권을 얻었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들이 직장을 갖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으며, 아내·어머니·주부라는 전통적인 역할에만 여성을 묶어두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한편 여성들이 아이를 덜 낳게 되고 가전제품이 발달하여 이전의 가사노동과 관련된 여러 고된 일로부터 해방됨에 따라, 여성에게 낮은(또는 적어도 의존적인) 지위를 강요하는 기반이 되었던 경제적인 조건도 변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수십 년 동안 서구사회의 경제분야에서 서비스 부문이 성장한 결과 남성과 여성이 함께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직업들이 생겼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사회의 전통적인 고정관념은 여성의 실제 생활조건의 변화에 비해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960년대 미국의 민권운동에 고무되어 여성들은 대중선동 및 사회비판과 같은 운동을 통해 스스로 더 나은 조건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현대 여성운동의 기원을 이루는 획기적인 사건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저서 〈제2의 성 Le Deuxième sexe〉(1949)의 출간이었다. 곧 전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은 여성운동에 대한 의식을 한층 끌어올렸다. 여성운동의 발전에 기여한 또다른 주요저서는 1963년 미국의 베티 프리던이 출간한 〈여성의 신비 The Feminine Mystique〉였다. 프리던은 여성에게 수동적인 역할을 강요하고 남성의 지배에 의존하도록 의식을 마비시키는 가정생활을 맹렬히 비난했다. 1966년 프리던과 다른 여성운동가들이 전국여성연맹을 창설한 것을 계기로 미국과 서유럽에 여권운동단체들이 급속히 늘어났다. 이 단체들도 계약권과 소유권, 고용 및 임금, 재산관리 같은 문제, 성·출산과 관련된 문제에서 여성을 차별함으로써 여성의 낮은 지위를 강요하는 법률과 관습을 철폐하려 했다. 여성운동이 점점 활발해지면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약하고 수동적이며 의존적일 뿐 아니라 남성보다 합리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이라는 사회의 지배적 고정관념을 바꾸려고 노력했으며, 여성이 하려고만 한다면 노동을 할 수 있고 남성으로부터 경제적·심리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자유를 얻어야 한다고 했다. 또한 여성이 성적인 욕망의 대상임을 강조하는 사회의 일반적인 여성관을 비판하고, 남성과 동등해지기 위해 여성의 자기인식과 기회를 넓히려고 노력했다. 여성운동의 또 하나의 목표는 정치적인 의사결정과 모든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의 참여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여성운동의 목표는 나라마다 크게 달랐다. 여성운동이 가장 강력하게 전개되었던 미국에서는 그 절정기에 오른 1970년대 여성운동가들이 남녀평등헌법수정안통과에 노력을 집중했다. 이밖에 미국과 서유럽 여성운동가들은 대중매체에서 나타나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 상투적인 여성 묘사에 대한 비판운동을 벌였다.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는 여성운동의 목표가 신부값 폐지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집중되었으며, 중동 이슬람교 지역에서는 여성의 의복에 관한 규율과 격리제도의 완화를 추구했다. 또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아내가 계약을 하거나 소송을 할 때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관행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국가 정치참여 교육 결혼과 출산 고용
여성선거권 인정연도4)각주1) 성인 문맹률1)각주2) 여성취학률2)각주3) 평균초혼 연령3)각주4) 신생아수/여성(총출산율)5)각주5) 노동력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6)각주6)
초등 중등 고등
아메리카
니카라과 1955 42 42.9 51 58 55 7)각주7) 7)각주8) 5.3 33.2
멕시코 1953 10.5 14.9 49 50 33 24.4 21.2 3.2 23.5
미국 1920 4.3 4.7 49 49 53 26.2 24.3 1.9 45.0
브라질 1932 18.2 19.4 49 54 52 26.1 22.9 3.1 35.1
아르헨티나 1947 4.5 4.9 51 51 53 26.4 23.1 2.8 27.9
캐나다 1918 4.4 4.3 48 49 56 27.3 25.2 1.7 45.0
쿠바 1934 5.0 7.0 48 52 58 27.7 25 1.9 36.1
아시아
사우디아라비아 8)각주9) 26.9 51.9 46 42 43 7)각주10) 7)각주11) 7 3.6
시리아 1949 10.3 30.7 46 41 41 25.9 20.7 6.5 15.4
이란 1963 35.5 56.7 46 41 30 25 18.5 6.2 10.3
이스라엘 1948 5.0 11.3 49 51 47 26 22.7 2.8 41.1
인도 1949 38.2 66.3 41 34 30 22.7 17.7 3.8 27.0
일본 1945 0 0 49 49 39 28.2 25.7 1.6 40.8
중국 1947 13 32 46 42 33 7)각주12) 7)각주13) 2.4 44.5
타이 1932 6.8 15.5 49 48 40 24.7 22 2.4 45.4
터키 1934 10.3 28.9 47 37 34 25.2 21.7 3.4 31.1
필리핀 1937 10.1 12.5 49 50 53 26.1 23.5 37.0
한국 1948 0.0 0.0 49 48 32 28.6 25.5 1.6 47.9)각주14)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1954 46.2 68.5 44 42 27 7)각주15) 7)각주16) 5.9 33.3
남아프리카 공화국 1930 19.4 22 50 7)각주17) 7)각주18) 25.1 22.4 4.2 41.0
알제리 1958 30.2 54.5 45 43 34 26.3 20.8 4.9 9.2
이집트 1956 37.1 66.2 45 44 33 26.2 20.4 3.9 10.9
케냐 1963 30.4 50.8 49 41 28 7)각주19) 7)각주20) 6.5 40.5
튀니지 1959 26.4 48.5 46 43 39 26.8 21.9 3.4 20.9
오세아니아
오스트레일리아 1902 0 0 49 50 53 27.1 24.8 1.9 41.4
파푸아뉴기니 1975 35.1 62.2 44 38 24 7)각주21) 7)각주22) 5.1 39.8
유럽
그리스 1952 2.4 10.9 49 47 49 27.6 23.4 1.5 37.1
독일 1919 0 0 49 48 43 27.1 24.7 1.5 39.0
스웨덴 1919 0 0 49 50 54 30.2 27.6 1.9 48.0
아일랜드 1922 0 0 49 51 45 27.5 25.6 2.1 30.7
영국 1928 0 0 49 50 48 26.6 24.5 1.8 42.8
이탈리아 1946 2.2 3.6 49 49 48 27.1 23.8 1.3 37.2
폴란드 1918 0.8 1.7 49 50 56 25.1 22.6 2.1 45.4
프랑스 1944 1.1 1.3 48 50 53 27.2 25.1 1.8 43.3
자료 : 조니 시거와 앤 올슨 공저, 〈세계의 여성 : 국제적 도표집 Women in the World : An International Atlas〉, 1986/국제노동기구(ILO),〈노동통계연감 Yearbook of Labour Statistics〉, 1992/국제연합(UN),〈인구통계연감 Demographic Yearbook〉, 1982, 1990/국제연합, 〈세계인구 추세와 정책, 1987년 조사보고서 World Population Trends and Policies, 1987 Monitoring Report〉, 1988/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 〈통계연감 Statistical Yearbook〉, 1992/국제부흥개발은행, 〈세계은행 아틀라스〉, 1992/그외 각국의 자료
주요국가에서의 여성의 지위

한국의 여성운동

한국의 근대시기는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참정권운동과 같은 여성운동 대신 여성운동과 독립운동의 하나로 애국계몽운동과 결합되어 나타나는 양상을 보였다.

한국의 여성운동은 한말 교육운동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서민 여성들은 지주와 봉건국가의 수탈, 유교적 가부장제의 통제 속에서 생산과 가사의 과중한 부담을 지고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뜬 진보적인 여성들은 여성이 교육을 받아 지식이 생기면 남자에게 억눌리지 않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이들의 여성교육에 대한 주장은,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인한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여성교육은 서양처럼 문명에 눈뜬 현모양처를 양산함으로써 부국강병의 초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남성 개화사상가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결과 1898년 찬양회가 조직되고 순성여학교가 세워졌으나 주체적인 역량의 결여와 일제의 사회운동 탄압으로 여성교육운동은 1900년대초에 중단되었다.

1905년 일제가 보호국이라는 미명 아래 한국을 실질적인 식민지로 만들어버리자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으로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런 기운 속에서 전국적으로 많은 여학교가 생겨났고 부인 계몽을 위한 여성단체들도 등장했다. 특히 1907년 애국계몽운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국채보상운동에서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국채보상부인회를 조직해 쌀이나 패물을 모으는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국내의 모든 사회운동은 설 땅을 잃고 말았으나, 1919년 3·1운동으로 일제가 폭력적인 무단정치를 포기하고 문화정치라는 기만전술로 식민통치정책을 바꿈에 따라 사회운동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20년부터 전국 각지에서 여자청년회가 무수히 발족하여 여성교육과 의식계몽운동을 전개하고, 신교육을 받은 지식여성들이 억압된 여성의 삶과 그로부터의 해방을 외치는 데 앞장섬으로써 본격적인 여성해방운동의 개화기가 열렸다. 1920~23년의 여성운동은 교육계몽운동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여기에는 기독교계 여학교 출신의 여성들이 교회조직을 기반으로 전개한 여성계몽운동의 비중이 컸다.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기독교여자청년회(YWCA)와 조선여자교육회가 대표적인데, 이들은 열악한 조건에서도 산간벽지 구석구석까지 찾아다니면서 여성계몽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또 일본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신여성들이 서양 여성해방사상의 영향을 받아 자유연애와 정조관념의 남녀평등을 주장함으로써 교육에만 치중되어 있던 여성해방의 이념에 일보진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전퉁적인 윤리관이 여전히 뿌리깊은데다 민중의 경제적 고통이 극에 달한 식민지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 이들의 성적 평등에 대한 주장과 그에 따른 행동은 사회적으로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노동자·농민의 항일투쟁은 생존권 투쟁의 양상으로 나타나면서 한층 격화되었다.

민족차별과 성차별의 이중의 질곡으로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받던 여성노동자들의 투쟁도 빈번했는데, 1923년 7월에 있었던 경성고무공장 파업은 가장 대표적인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사례였다. 이러한 국내상황으로 여성운동은 여성해방을 대다수 민중들의 생존권적 요구 속에서 민족해방의 과제와 연결시켜야 한다는 중요한 과제를 인식하게 되었고 이로써 사회주의 여성운동이 시작되었다. 1922년 조선여자고학생 상조회로 시작된 사회주의 여성운동은 1924년 결성된 조선여자동우회로 본격화되었다.

1927년 신간회가 성립되는 등 민족운동의 통일전선적 요구 속에서 여성운동계도 사회주의 여성조직과 기독교계 여성조직이 결합하여 1927년 5월 근우회가 조직되었다. 근우회는 지금까지 전무후무한 여성운동의 통합조직이었으나 여성해방의 실천적 이념을 제대로 뿌리내리기 전에 일제의 잔혹한 말기적 탄압으로 해체되고 말았다.

1930년대 일제 말기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강도 높은 탄압 정책을 밀고나갔다.

이런 가운데 사회주의 여성운동은 비합법 여성노동운동과 여성농민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여성노동운동을 조직하는 데에는 여학생 출신 노동자들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1930년의 부산조선방직 파업과 평양고무공장 총파업, 정미소 파업 등에서는 산전산후 휴가, 수유시간 보장, 동일노동·동일임금과 같은 여성들의 특수한 요구를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민중 여성들의 투쟁이 격화되는 것과 달리 1930년대 후반 기독교계와 교육계, 사회주의 활동을 했던 일부 여성 지도자들은 일제의 침략정책, 내선일체의 황민화 시책을 선전하고 정신대, 징병, 징용, 학병동원 참여를 촉구하는 강연, 가두선전, 방송, 위문공연 등을 하여 대조적이었다.

8·15해방 이후 여성운동은 여성노동운동과 여성계의 여성운동이라는 2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여성노동자들은 해방직후부터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생활권을 보장하기 위해 공장의 자주관리를 요구하며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했는데, 8·15해방 이후 최초의 파업인 경성방직 파업과 1945년말의 영등포 동면섬유 파업이 그 대표적인 사건이다. 이들 파업에서는 동일노동·동일임금·생리휴가와 같은 여성노동자의 특수한 요구들을 쟁취했다. 여성노동자들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도 적극 참여, 조직원의 15%를 차지해 강령 속에 '동일노동·동일임금 지불, 산전산후 2개월 유급휴가, 탁아수유소 설치'의 요구조건을 포함시킬 수 있었다.

한편 여성운동계는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와 보조를 맞추어 정치적 입장이나 일제시대의 행적에 관계없이 각계각층의 여성들을 모아 8월 17일 건국부녀동맹을 결성했다.

그러나 8월말 미군의 진주가 확실해지면서 일제말 친일경력을 가진 김활란·우각경·임영신 등의 민족주의계 여권론자들은 여기에서 탈퇴하여 여성단체를 결집, '전국여성단체총연맹'을 결성했다. 이 단체는 '위대한 아내와 어머니가 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수입된 현모양처주의를 강조했고, 실제 활동에서는 남한단독정부수립을 선전하는 모임 등 이승만과 한민당의 정치노선을 추종하는 각종 집회에 여성들을 동원하는 데 치중했다.

반면 자주민족국가 건설과업을 수행하면서 여성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여성운동가들은 건국부녀동맹에 남아 있었다. 이 단체는 1945년 12월 22일 조선공산당의 외곽단체인 조선부녀총동맹으로 조직을 개편하고 일제 잔재의 청산과 민족국가 건설을 목표로 설정했다. 이를 위해 좌익진영이 전개하는 각종 정치집회에 참여함과 동시에 선전계몽활동, 독자적인 대중집회, 공사창제 폐지운동, 원호활동 및 쌀요구투쟁 등의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좌우익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공사창제 폐지는 좌우익 여성 모두가 요구한 것으로, 그 결과 미군정은 1948년 2월 14일 공사창제 폐지 법령을 공고하게 되었다.

미군정 3년 동안 좌익단체 탄압 속에서 좌익여성단체는 소멸되고 우익여성단체가 미군정의 부녀국과 긴밀한 유대를 맺으며 독점적인 지위를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분단시대 여성운동은 여성해방 이념의 부재, 권력과의 결탁, 대중과 유리된 여성 명사 중심의 조직이라는 특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여성운동의 성격은 1950~60년대에 계속되어 정부시책에 호응하는 사회봉사 및 위문활동, 정권지지를 위한 관제모임 동원 등을 주요 활동내용으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실질적인 여성운동의 부재 속에서 여성운동의 명맥을 이어온 것은 이태영을 중심으로 전개된 가족법개정운동이다. 이태영이 1956년에 가정법률상담소를 열면서 시작된 이 운동은 1977년 가족법 제1차개정과 1989년 제2차개정으로 1991년에 개정가족법 시행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한편 1970년대에 이르러 동일방직사건, YH사건과 같은 여성노동자의 생존권 투쟁이 격화되고 대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 여대생들이 참여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1975년에는 1980년대의 본격적인 여성대중운동의 전개를 예고하는 크리스천 아카데미의 '여성인간선언'과 기생관광 반대, 여성노동자 생존권투쟁을 지원하는 교회여성운동이 생겨났다. 이같이 이전의 어용적인 여성운동과 결별한 새로운 진보적 여성운동은 1970년대의 모색과정을 거치고 1980년대 들어와서는 여성노동운동, 여성농민운동, 여성빈민운동, 소비자운동, 참교육운동, 반공해운동을 주도하는 주부운동, 성차별적 이데올로기와 문화의 불식을 목표로 하는 각종 형태의 문화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운동의 구심체로서 1983년의 여성평우회를 비롯해 여성의 전화, 민청련 여성부, 또하나의 문화 등 새로운 조직들이 결성되었다.

이들 진보적 여성단체들은 1985년 25세 여성 조기정년제 철폐운동(일명 이경숙사건)을 전개하면서 한국여성단체연합을 결성하게 되었다. 1992년 현재 한국여성단체연합의 가입단체수는 준회원단체와 참관단체를 합해 29개에 달한다. 이같은 여성운동의 활성화는 여전히 개정의 요소를 안고는 있지만 가족법과 남녀고용평등법의 개정, 영유아보육법 제정이라는 성과를 가져왔다.

1990년대에 들어와 여성운동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1990)·성폭력상담소(1991) 등의 결성으로 가부장적·군사문화적인 성질서의 개선을 위해 애쓰고 있으며, 반핵·반전 평화운동, 통일을 위한 남북여성의 공동대응을 모색하는 등 남북여성교류의 물꼬를 트고 있다. 이러한 전개 속에서 한국 여성운동은 가정과 직장에서의 성차별·인신매매·매춘·성폭력 등의 여성문제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도, 아울러 여성해방의 문제를 민주화·통일의 과제와 연결시키려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앞으로 여성운동의 과제는, 1980년대의 여성운동조직 중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전체 사회운동과 여성운동을 내용적으로 결합하여 여성운동의 저변확대를 모색하고 대중적인 실천으로 여성운동의 목표를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