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법개정운동

가족법개정운동

다른 표기 언어 家族法改正運動

요약 성차별 조항을 가지고 있는 가족관련법을 개정하려는 운동.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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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관
  2. 가족법개정운동의 시작
  3. 제2차 가족법개정
  4. 여론조성
  5. 제3차 가족법개정

개관

가족법은 민법 중 가족생활을 규정하는 제4절 친족편과 제5절 상속편을 가리키는 말로 친족상속법이라고 하지만 법전에서 쓰는 말은 아니다.

지금(1992)의 가족법은 1958년 2월 제정, 1960년 1월 1일부터 효력이 발생한 것으로 그동안 3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다.

헌법은 '법 앞의 평등'을 선언하여 성(性)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있지만 가족법은 제정 당시부터 헌법의 정신을 위배하고 남자만의 혈족 관계 중심으로 만들어져 민주적 법질서를 거스르는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1960년에 새 민법을 만들기 전부터 여성계는 합리적인 가족법을 제정하도록 관계기관에 건의서를 제출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지만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바탕을 둔 가족법이 제정되었다.

그뒤로 여성계·가족법학자·진보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30여 년 동안 악법 폐지 차원에서 가족법개정운동을 꾸준히 펼쳐왔다(→ 여성운동). 그 결과 1989년 12월 19일 제147회 정기국회에서 가족법개정안을 통과시킴으로써 가족상속법을 대폭 개정했다. 그러나 동성동본금혼조항과 호주제를 완전히 폐지하지 않는 등 가족법이 가지고 있는 가부장적 요소를 뿌리 뽑지는 못했다.

가족법개정운동의 시작

1949년 3월 대법원에 '법전편찬위원회'가 설치되었으며 1953년 9월에 가족법의 초안을 완성했다.

정화순·표경조·황신덕·이태영 등 여성지도자들은 '한국여성단체연합' 이름으로 "남녀평등을 이념으로 하는 헌법정신에 비추어 민법 중 친족·상속 편을 제정해달라"는 건의서와 27개 여성단체가 모여 만든 의견서를 법전편찬위원회에 제출하고 90회가 넘는 강연회를 열었다. 그러나 여성계의 노력은 좌절된 채 1958년 2월 새 민법이 제정되었고 1960년 1월 1일 시행되었다. 그후 민법은 1962년 법정분가제도를 신설하고 호적법을 1차로 개정했으며, 1963년 가사심판법을 제정하고 호적법을 2차 개정했다.

이 시기 여성계의 활동은 법과 제도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불합리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고 가족법개정운동을 시작했다는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제2차 가족법개정

민법 제정 때부터 운동을 계속해온 한국가정법률상담소대한 YWCA연합회는 1973년 4월 27일 가족법개정 강연회를 열고 가족법개정을 위한 범여성운동을 펼칠 것을 다짐했다.

가족법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짐에 따라 1973년 6월 28일 61개 여성단체가 힘을 합한 '범여성가족법개정촉진회'(이하 촉진회) 결성대회가 삼일당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 모인 1,200여 명의 여성대표들은 "가족법 개정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계속 연합운동을 펼칠 것"을 다짐하고 10개항의 개정요강을 채택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가정법개정 10개 항목은 ① 호주제도 폐지, ② 친족범위의 남녀평등, ③ 동성동본 불혼제도 폐지, ④ 불분명한 소유의 부부재산은 부부 공유, ⑤ 이혼배우자의 재산분배 청구권, ⑥ 협의이혼제도 합리화, ⑦ 친권의 부모 공동행사, ⑧ 적모서자관계와 계모자관계 시정, ⑨ 상속제도 합리화, ⑩ 유류분(遺留分)제도 신설 등이다.

촉진회는 1974년 7월에 '범여성가족법개정촉진회안'을 여성국회의원을 통해 국회에 상정했다.

그러나 촉진회 회장이며 국회 제안자인 이숙종 의원은 호주제도 폐지·동성동본 불혼제 등을 삭제한 수정안을 국회에 제출, 이른바 '단독수정법안사건'을 일으켰다. 우여곡절 끝에 이숙종 의원이 수정안을 철회하고 1975년 4월 9일에 촉진회가 마련한 원래 개정안을 국회에 냈다.

1977년 12월 17일 제90회 정기국회에서 개정안의 중요사항을 모두 없애고 국회법사위원회가 마련한 대안이 통과, 가족법이 일부 개정되었다. 제2차 개정가족법은 일부 개정에도 불구하고 남녀평등 이념과는 거리가 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개정가정법은 1979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재산상속에서 호주상속을 하는 장남을 제외한 아들과 미혼인 딸은 동일한 몫, 처의 상속분은 장남과 같고 출가한 딸은 차남의 1/4이다. 자녀없이 남편이 사망했을 때 아내는 남편 직계존속과 공동으로 상속하되 시부모의 몫에 50% 가산, 반대로 아내가 사망했을 때 남편은 아내의 모든 재산을 아내 직계존속과 상관없이 단독 상속한다.

둘째, 협의이혼제도를 보완, 법원으로부터 이혼의사 확인을 받도록 한다. 셋째, 귀속불명의 재산은 부부 공동소유로 추정한다. 넷째, 친권은 부모가 공동으로 행사하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아버지가 행사한다. 다섯째, 유류분제도를 신설하여 유언 자유에 제한을 둔다. 여섯째, 남녀 모두 만 20세가 넘으면 부모의 동의없이 혼인할 수 있다.

이밖에 1978년에만 효과가 있는 '혼인에 대한 특례법'을 제정, 동성동본의 혼인신고 및 자녀 입적신고를 받기로 했다.

개정가족법은 1979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모든 여성단체가 힘을 모았던 가족법개정운동이 부족하나마 결과를 낳은 뒤 촉진회는 사실상 해체되었고 가족법개정운동은 얼마 동안 침체기에 들어갔다. 그뒤 1984년 7월 18일 '가족법개정을 위한 여성연합회'가 만들어지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여론조성

촉진회를 해체한 뒤 가족법개정운동이 활기를 잃자 한국가정법률상담소는 정규 프로그램인 가족법 강좌와 외부초청 강좌를 여는 한편 언론매체를 통해 가족법개정이 필요한 이유를 강조했다.

1979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는 대한 YWCA연합회와 '가족법개정을 위한 1,000만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이 서명운동은 가족법개정운동이 일부 지도층 여성들 중심에서 일반 여성들 중심으로 전환하는 데 하나의 계기를 마련했다. 1982년 11월 YWCA는 '현행가족법은 개정되어야 한다'는 팜플렛을 배부하고 1983년 9월 28일 제20회 전국여성대회의 결의문에서 "가족법개정을 완결해줄 것"을 국회에 건의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가족법개정에 대한 여론이 활발하게 일어난 결과 1984년 7월 18일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주관으로 41개 여성단체가 '가족법개정을 위한 여성연합회'(이하 여성연합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이태영을 선출했다.

가족법개정운동이 30여 년에 이르도록 합리적인 가족법을 개정하지 못한 데 대한 반성으로 8월부터 각 회원 단체별로 서명운동을 시작했고 회장단이 국회를 방문하여 건의문을 제출했으며 30일에는 회원단체가 5개 도시에서 일제히 거리 서명운동을 펼쳐 4만 4,800명의 서명을 받는 등 열띤 활동을 펼쳤다.

시민들은 '다 같은 인간이다', '가족법개정운동에 동참합시다' 등의 포스터와 플래카드를 보고 스스로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여성연합회의 움직임이 활발해질수록 유림 단체 중심의 가족법개정 반대운동도 드세져 동성동본금혼법 및 호주제 수호 궐기대회를 열기도 했다. 여성연합회는 1984년 11월에 109개항에 걸친 가족법 개정안을 국회의원들에게 전달했으나 제안 의원수의 미달로 국회 상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제11대 국회는 임기가 끝났다.

가족법이 개정될 때까지 존속할 것을 결정한 여성연합회는 국회의원선거를 맞이해 1985년 1월 25일 '올바른 투표권 행사를 위한 여성대표자 간담회'를 개최, "인간평등을 위한 가족법개정에 반대하는 후보자에게는 투표하지 않는다"는 '여성유권자선언'을 채택했다.

1985년 7월 18일 여성연합회 발족 1주년을 맞이하여 '모든 여성의 참여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986년 4월부터 국회의원에게 편지·엽서보내기 운동을 시작으로 서명운동·가족법강연 등 개정운동을 활발히 펼친 결과 11월 18일 제12대 국회 말에 여야의원 61명이 공동명의로 개정안을 제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기만료로 이 개정안은 법적효력을 띠지 못했다.

여성연합회는 건의문 발송, 전화·편지보내기 운동, 성명서 발표와 같은 활동을 꾸준히 계속해 1987년 10월 30일 '혼인에 대한 특례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여성계와 일부 법조인이 노력한 끝에 1988년 11월 7일에는 13대 국회에 여야합동 의원입법으로 가족법개정안을 상정했다. 11월 19일에 여성연합회는 5만 1,630명이 서명한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제3차 가족법개정

1989년 가족법개정운동은 열기를 더해갔다.

1988년말 한국응용통계연구소의 국민여론 조사 결과 서울시민 가운데 79%가 가족법개정을 찬성했다.

1989년 10월 가족법개정안 통과를 목표로 '한국여성단체연합 가족법개정 특별위원회'(회장 한명숙, 이하 가족법개정 특별위원회)가 발족되어 가족법개정을 위한 여성계의 연대투쟁이 활발해졌다. 이 시기 가족법개정운동은 가족법개정이 필요하다는 시민들의 공통된 인식을 바탕으로 전체 여성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1989년 12월 19일 제147회 정기국회에서 가족법개정안이 통과되어 민법 중 친족상속법이 대폭 개정되었다. 그러나 개정가족법은 1988년 제기한 개정안이 아니라 개정안을 심의한 법제·사법위원회가 내놓은 개정안으로 여성계 및 각계각층의 요구를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1991년 1월 1일부터 효력이 발생한 제3차 개정가족법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친족의 범위를 아버지쪽, 어머니쪽 모두 8촌으로 하고 처가·시가 구별없이 4촌이내로 함, ② 호주제도를 그냥 두되 호주상속제도를 호주승계제도로 하고 호주권과 남녀불평등 조항의 삭제, ③ 법정친자관계였던 계모자관계와 적모서자관계를 인척관계로 시정, ④ 부부의 공동생활비용은 부부가 공동으로 부담하도록 하여 재산분할 청구권의 근거 마련, ⑤ 이혼시 자녀의 양육에 관한 사항을 부모가 함께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고 면접교섭권 신설, ⑥ 이혼 배우자의 재산분할 청구권 신설, ⑦ 부모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가정법원이 친권을 행사할 사람을 정하도록 함, ⑧ 아들·딸 구별이나 결혼 여부에 관계없이 똑같이 재산을 상속받고 아내가 죽었을 때 남편은 아내 친정부모와 함께 공동상속하도록 하는 등 상속제도를 합리적으로 조정한 것 등이다.

그러나 개정가족법은 가부장적 제도로서의 호주제 자체를 폐지하지는 못했으며 사회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동성동본 불혼규정을 개정대상에서 제외했다.

이는 남녀평등의 원칙을 선언한 헌법을 위배한 것으로 앞으로 계속 논의해야 할 부분이다.

앞으로 개정·보완해야 할 조항은 ① 동성동본 혼인 금지 범위의 합리적 조정, ② 가족에 대한 부양의무와 권리는 없고 상징만 남은 호주제도 폐지, ③ 혼인연령을 남녀 동일하게 규정(현행법 남자 18세, 여자 16세), ④ 처의 재혼금지기간 삭제, ⑤ 재산분할청구권 때 기여도의 판단기준(가사노동 인정 기준) 마련, ⑥ 공동상속분의 내용에서 부인의 재산범위 조정, ⑦ 친권행사 때 가정법원의 판단기준과 부모 모두 양육 거부시 강제성의 유무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