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불혼

동성불혼

다른 표기 언어 同姓不婚

요약 동성간에 혼인을 못하게 하는 관습.

오늘날의 동성불혼에 이르기까지 혼인규제는 다음과 같다.

신라는 전시대에 걸쳐 이성혼보다는 동성혼·근친혼(近親婚)이 많았다. 이러한 동성혼·근친혼의 경항은 왕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 사이에서도 행해졌다. 〈삼국사기 三國史記〉 신라본기 권3에 "신라에서는 동성을 아내로 맞이할 뿐만 아니라 형제의 여(女), 고이(姑姨)나 종자매(從姉妹)를 모두 처로 맞는다. 비록 외국과는 서로 풍속이 다를지라도 중국의 예속을 기준으로 이를 책망하면 큰 잘못이다"라고 했다.

이 기록은 일반 백성의 결혼 풍속은 아닐지라도 신라 왕위계승의 원리와 유사하다. 또한 왕실이 아닌 거천모(巨川母)의 계보 등으로 미루어볼 때 신라시대의 혼인·가족·친족의 성격은 왕실과 왕실 아닌 사람 간에 큰 차이가 발견되지 않는다. 인접시대인 고려시대의 혼인 양상이나 고려 초기부터 내려진 동성혼·근친혼의 금령 등으로 미루어보아 신라시대의 일반 백성도 동성혼·근친혼을 했을 것이다. 여기서 신라시대가 근친혼·동성혼이었다는 것은 그 사회 모든 사람들이 근친혼·동성혼을 행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혼인도 용납되었음을 뜻한다.

고려시대에는 초기부터 말기까지 총12회에 걸쳐 동성혼·근친혼 금령이 내려졌다.

이러한 수많은 금혼령(禁婚令) 자체가 고려시대는 동성혼이나 근친혼을 행했다는 증거가 된다. 고려왕실은 근친혼이나 동성혼을 행하고 일반 백성은 동성금혼을 지켰다고 볼 수는 없다. 신라나 고려의 근친혼을 왕족에만 국한시켜 행하면서 금혼령을 내리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왕권을 배타적으로 독점하려는 의도에서 행해졌다는 근거는 더욱 없다. 최초의 근친혼 금령은 4촌인 당자매(堂姉妹)까지의 혼인을 금지시킨 〈고려사 高麗史〉 권75에 나온 1058년(문종 12)의 것이었으나, 그로부터 38년 후인 1096년에는 6촌인 재종자매(再從姉妹)까지 금혼시켰고, 고려 말기인 1309년에 문무 양반가는 모두 동성혼을 금하게 되어 금혼의 범위가 더욱 확대되어갔다.

이러한 금혼령으로 동성혼과 근친혼은 약화되어갔지만 대공친(大功親)이나 당질녀(堂姪女)와 혼인하는 사례도 있었으며 동성간의 혼인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은 법적 강요로 조선시대는 대체로 고려시대보다는 동성불혼제가 지켜졌다. 그러나 각종의 족보에는 동성혼을 한 사례가 적지 않게 보인다. 〈단성호적 丹城戶籍〉을 분석해보면 17세기까지 동성혼을 행한 비율이 6∼7%에 이른다. 즉 1606년과 1630년에는 각각 541쌍(5.9%)과 431쌍(5.8%)이 동성혼을 했으며, 1606년과 1678년에는 각각 233(6.9%)과 149쌍(7.4%)이 동성혼이었다.

결과적으로 신라시대보다는 약화되었지만 고려시대까지도 동성혼·근친혼이 많이 행해졌다. 서류부가 기간이 단축되는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그러한 경향이 더욱 약화되어 이성혼으로 대체되어가다가 조선 후기에는 거의 전적으로 이성혼으로 굳어졌다. 즉 17세기 이전의 우리나라 혼례는 전래의 고유한 혼인 관행이 상당부분 지속되었다. 또한 서옥제에 연원을 둔 서류부가혼속 역시 왕실과 일부 사대부층을 제외하고는 그대로 관행되던 단계였다.

따라서 그당시 가족생활은 사위가 장인·장모와 한가족이 되었고, 아들과 사위, 친손과 외손의 차별이 없어 이때의 가족유형은 양변적(兩邊的) 방계가족(傍系家族)이었다. 이 시대에는 동성혼·근친혼·부락내혼(部落內婚)이 자연스럽게 행해졌으며, 모(母)나 외조부(外祖父)가 아들이나 외손자의 혼주(婚主)가 될 수 있었다.

16세기말 무렵에 이르러서는 〈주자가례 朱子家禮〉의 혼인풍습이 서서히 정착되기 시작했다.

양변적인 방계가족이 부계의 직계가족으로 변했고, 동성혼·근친혼이 동성동본불혼과 마을 밖의 원거리 통혼권(通婚圈)으로 바뀌었다. 남녀차별·장남우선의 상속관행으로 바뀌었고, 양자제도가 강화되어 부계혈연의 계승을 중요시했으며 적서(嫡庶)의 차별이 심해져 족보에는 부계친만이 기재되었다. 또한 출가외인의 관념이 강해졌고 부계친의 집단화를 꾀하여 씨족관념이 투철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가족의 비부계적(非父系的) 요소의 감소에 따른 부계가족으로의 변화과정이다. 우리나라의 가족은 17세기 중엽 부계가족으로 변화함에 따라 가부장제가 강화되었고 여성의 지위도 거듭 변했다. 결혼관행도 동성혼·근친혼은 사라졌고 이성혼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한말의 〈형법대전 刑法大典〉(1903)에서 혼인위반율을 언급하면서 "씨관(氏貫)이 같은 사람이 서로 결혼하거나 또는 첩을 삼는 자는 태(笞) 100에 처하고 이이(離異)함이라. 동성무복친(同姓無服親) 또는 무복친의 처를 취한 자는 징역 1년이다.

내외친속(內外親屬)끼리 혼인하는 자는 다음과 같이 처한다.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른 자매(姉妹)는 징역 5년, 외숙의 처나 생질의 처에는 징역 1년 반, 첩에는 징역 1년, 처첩 전부(前夫)의 딸에는 징역 3년, 내외종(內外從) 또는 이종자매(姨從姉妹)나 할머니 또는 외할머니의 본종자매(本從姉妹)나 자기의 종자매(從姉妹)의 딸이나 여매(女妹)의 자매, 또는 자손부(子孫婦)의 자매에게는 모두 태 100"이라고 동성혼의 불가함을 법으로 규정했다.

지금도 "동성동본인 혈족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고 하여 동성동본불혼을 법률에서 규정하고 있다(민법 제809조 1항)(민법). 그러나 외형상 동성동본일지라도 동일 남계혈족이 아닌 사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동성동본이 아니므로 혼인할 수 있다.

또한 사성(賜姓) 등에 의해 성이 다른 경우 실질적으로는 동성동본이기 때문에 혼인할 수 없지만, 외형상으로는 이성동본이기 때문에 혼인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동성동본일지라도 혈족이 아닌 자 사이에 혼인하는 경우에는 혼인신고서에 혈족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재해야 한다. 한편 민법 제809조 2항은 "남계혈족의 배우자, 부(夫)의 혈족 및 기타 8촌 이내의 인척이거나 이러한 인척이었던 자 사이에서는 혼인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혼인을 금하는 범위가 지나치게 넓게 되므로 금혼의 범위를 좁히기 위한 비판론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동성동본금혼제도와 근친혼금지의 범위에 대해 여성계와 유림은 첨예한 의견 대립을 가져 왔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1997년 7월 16일 동성동본금혼제도가 헌법이념인 개인의 존엄성과 남녀평등 및 혼인의 자유를 침해하므로 헌법불합치라는 결정을 내림에 따라 최근 법무부는 동성동본금혼제도를 폐지하고 근친혼금지제도로 전환하되 근친혼금지범위를 합리적으로 정하며, 그 동안 실무상 개정이 요망되었던 각종 제도를 정비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중개정법률(안)을 1998년 7월 20일 입법예고한 바 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대법원도 그 동안 혼인 취소사유로 되어 있었으나 사실상 혼인신고를 수리하지 않았던 실무를 예규의 개정을 통하여 수리하도록 이미 조치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