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3세

에드워드 3세

다른 표기 언어 Edward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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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312. 11. 13, 잉글랜드 버크셔 윈저
사망 1377. 6. 21, 서리 신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을 주도했다. 그에게서 난 일곱 아들과 다섯 딸의 후손들은 몇 세대에 걸쳐 왕위분쟁을 벌였으며, 장미전쟁(1455~85)이 그 절정이었다. 무능력과 대관식 서약을 어긴 잘못에 대해 탄핵받고 왕위에서 물러난 에드워드 2세에 이어 1327년 15살의 나이로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젊고 열정적이며 활발한 성품이었던 그는 잉글랜드를 에드워드 1세 때 같은 강대국으로 재건하려고 했다. 1330년대에 잉글랜드는 점차 프랑스와 적대관계에 빠져들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잉글랜드의 가스코뉴 통치를 둘러싼 분쟁이었다. 1340년 1월 그는 프랑스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플랑드르인들은 에드워드가 정당한 프랑스 왕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프랑스 왕과 싸우는 데 주저하는 마음을 없앨 수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점점 왕위에 대한 권리주장이 더욱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와 그의 후계자들이 끈질기게 그런 주장을 내세움으로써 100년이 넘도록 평화정착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백년전쟁이었다. 1801년까지 모든 잉글랜드 왕들은 프랑스 왕의 칭호를 겸해서 사용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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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
  3. 백년전쟁
  4. 몰락기(1360~77년)
  5. 에드워드의 성품
에드워드 3세(Edward III)
에드워드 3세(Edward III)

개요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을 주도했다.

그에게서 난 일곱 아들과 다섯 딸의 후손들은 몇 세대에 걸쳐 왕위분쟁을 벌였으며, 장미전쟁(1455~85)이 그 절정이었다.

초기생애

에드워드 2세와 프랑스의 이자벨라 사이의 큰아들인 그는 체스트 백작의 직함으로 의회에 등원했으며 아키텐 공작의 작위를 받았으나(1325) 관례와는 반대로 웨일스 공의 칭호는 받지 못했다.

그는 부왕이 왕권을 제한하려는 귀족들과 분쟁을 벌이는 와중에서 성장했다. 그의 어머니는 귀족들에 대한 남편의 처우에 반발하는 한편 남편의 지지자들이 잉글랜드에 있는 그녀의 영지를 몰수한 데 불만을 품고 그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25년에 그녀는 잉글랜드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가서 남편의 프랑스 영지인 기옌·가스코뉴·퐁티외의 문제에 대해 친정 동생인 프랑스의 샤를 4세와 남편 사이에 벌어진 분쟁에 개입하여 이 일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잉글랜드 왕이 샤를에게 충성의 예를 바치는 조건으로 그 영지는 잉글랜드 영토로 확보되었다.

아직 어렸던 그가 아버지를 대신해 이 협상을 수행했다. 잉글랜드 왕의 법정상속인인 그는 확실하게 그의 어머니편이었다. 1323년 프랑스로 피신한 이자벨라는 연인이 된 로저 모티머와 함께 남편을 폐위하기 위해 잉글랜드를 침공할 준비를 시작했다. 이 계획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에드워드 3세를 에노 및 홀란트의 백작 빌렘의 딸 필리파와 약혼시켰다. 이자벨라 왕비와 귀족들은 잉글랜드를 침공한 지 5개월 만에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에 힘입어 국왕의 세력을 제압했다.

에드워드 2세는 무능력과 대관식 서약을 어긴 잘못에 대해 탄핵받고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1327년 1월 29일 15살의 에드워드 3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명목상으로 그의 후견인은 랭커스터 백작 헨리였지만 뒤이은 4년 동안 이자벨라와 모티머가 실질적인 통치를 맡았다. 1327년 여름 그는 실패로 끝난 스코틀랜드인과의 전쟁에 참가했다. 이 전쟁의 결과 노샘프턴 조약이 체결되고(1328) 스코틀랜드는 독립왕국이 되었다.

에드워드는 그 협상에 대해 깊이 고민했으나 이자벨라와 모티머의 설득을 듣고서야 그 조약에 서명했다. 그는 1328년 1월 24일 요크에서 필리파와 결혼했으며 그 직후부터 자기 어머니와 모티머에 대한 불명예스러운 종속에서 탈피하고자 노력해 성공을 거두었다. 노팅엄에서 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그는 밤을 틈타 지하통로로 성에 잠입해 모티머를 체포·감금한 뒤 처형했다(1330. 11). 에드워드는 사려깊은 태도로 자기 어머니와 모티머의 연애관계를 모른 체하고 모든 면에서 어머니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대했으나 그녀의 정치적 영향력은 끝이 났다.

이제 에드워드 3세는 군림할 뿐 아니라 통치하기 시작했다.

젊고 열정적이며 활발한 성품이었던 그는 잉글랜드를 에드워드 1세 때 같은 강대국으로 재건하려고 했다. 노샘프턴 조약으로 스코틀랜드 독립을 허용한 데 대해 여전히 한을 품고 있던 그는 1329년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1세가 죽자 자기 지위를 회복할 기회를 얻었다. 스코틀랜드의 새 왕인 그의 매제 데이비드 2세는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했는데 에드워드는 그 약점을 이용해 로버트 1세에게 쫓겨났던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자신들의 우두머리 에드워드 베일리얼을 스코틀랜드 왕위에 앉히도록 도왔다.

데이비드 2세는 프랑스로 달아났으나 베일리얼이 잉글랜드 왕의 꼭두각시로 경멸받게 되자 1341년에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백년전쟁

백년전쟁
백년전쟁

1330년대에 잉글랜드는 점차 프랑스와 적대관계에 빠져들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잉글랜드의 가스코뉴 통치를 둘러싼 분쟁이었다.

또다른 부수적인 이유는 프랑스의 새 왕 필리프 6세가 스코틀랜드를 지원하고 에드워드는 당시 프랑스의 군주와 사이가 나빴던 플랑드르의 도시들과 동맹을 맺은데다 또한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1337년에 재개한 데 있었다(처음에 주장한 것은 1328년이었음). 에드워드는 1339, 1340년 2차례에 걸쳐 북쪽으로 프랑스 침공을 시도했으며 그결과 파산상태로 전락했을 뿐이었다.

1340년 1월 그는 프랑스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처음에 그것은 플랑드르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다. 플랑드르인들은 에드워드가 정당한 프랑스 왕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프랑스 왕과 싸우는 데 주저하는 마음을 없앨 수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점점 왕위에 대한 권리주장이 더욱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와 그의 후계자들이 끈질기게 그런 주장을 내세움으로써 100년이 넘도록 평화정착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백년전쟁이었다. 1801년까지 모든 잉글랜드 왕들은 프랑스 왕의 칭호를 겸해서 사용했다.

에드워드는 1340년 6월 플랑드르의 슬뤼스 시 근해에서 벌어진 대해전에 몸소 참전해 프랑스 해군을 거의 전멸시키다시피 했다(슬뤼스 전쟁). 이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상전에서 자금이 고갈되어 휴전협정을 맺은(2년 뒤에 깨졌음) 뒤 잉글랜드로 돌아와야 했다.

1342년 이후의 시기에 그는 윈저 성을 재건하고 가장 서열이 높은 가터 훈장을 제정해 많은 시간과 돈을 소비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은 1346년 7월 에드워드 2세가, 이후 흑세자로 알려진 큰아들 에드워드 왕자(1330 태어남)를 대동하고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부터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처음에 그는 전략적인 목적을 분명히 하지 못한 채 대규모 약탈전을 전개하는 데 그쳤다.

그러다가 그해 8월 26일 퐁티외의 크레시에서 프랑스군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는 필리프 6세가 북동부로의 퇴각로를 차단하기 위해 배치했던 군대를 격파하면서 기념할 만한 전과를 올렸다(크레시 전투). 에드워드는 1346년 9월 프랑스의 칼레 항을 포위해 1347년 8월에 항복을 받아냈다.

또한 가스코뉴와 브르타뉴에서 승리를 거두고 더럼 근처 네빌스크로스에서 데이비드 2세를 제압해 생포함으로써(1346. 10) 에드워드는 한층 더 힘을 과시했으나 지속적인 정복지로 남은 것은 단지 칼레뿐이었다(네빌스크로스 전투). 그는 칼레의 프랑스 주민들을 대부분 추방하고 잉글랜드인들을 정착시켜 프랑스 침공의 전진기지를 마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창 승전의 기세를 올리던 중에 자금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1347년 9월 또다시 휴전협정을 맺어야 했다.

에드워드는 1347년 10월 잉글랜드로 돌아왔으며 일련의 호화로운 마상시합을 열어 승리를 기념했다.

1348년에는 신성 로마 제위를 거절했다. 같은 해에 흑사병이라고 알려진 선(腺)페스트가 잉글랜드에 처음 발병해 1349년말까지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흑사병의 공포에도 아랑곳없이 에드워드의 궁정에서는 요란한 주연이 끊이지 않았고 전염병이나 휴전협정에 상관 없이, 부분적이고 소규모이기는 했지만 프랑스와의 전쟁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뒤이은 수 년 간 에드워드는 책임있는 장수라기보다는 호방한 기사로서 군사적 공적을 올렸다.

잉글랜드 하원(House of Commons)도 이제는 전쟁에 싫증을 냈지만 평화를 이루려는 노력은 아무 결실도 없었고 1355년 또다시 대규모 군사행동이 개시되었다. 이 작전에서 에드워드는 칼레 외곽지역을 공격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불에 탄 성촉절(聖燭節)'이라고 알려진 유명한 원정을 벌여(1356. 1~2) 스코틀랜드 남동부에 있는 로디언 지방을 약탈했으며 같은 해에 베일리얼에게서 스코틀랜드 왕국의 정식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아들 에드워드의 공적이 그를 훨씬 능가했다. 그의 아들은 푸아티에에서 승전을 거두어(1356. 9. 19) 프랑스 왕 장 2세(1350년에 필리프 6세를 계승)를 포로로 잡고 프랑스로 하여금 새로운 휴전협정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에드워드는 포로가 된 프랑스 왕을 융숭하게 대접했으나 런던 조약(1359)에서 너무나 많은 영토를 양도하도록 압력을 넣었으며 프랑스는 이 협정을 거부했다.

프랑스로 하여금 협정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기 위해 에드워드는 칼레에 상륙해(1359. 10. 28) 랭스를 포위했으며 그곳에서 프랑스 왕위에 오르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이 계획은 무산되고 그는 부르고뉴로 진격했다가 결국에는 파리로 돌아왔다. 이러한 한 차례의 원정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는 브르타뉴에서 예비적인 평화조약을 맺는 데 기꺼이 동의했다(1360. 5. 8). 런던 조약보다는 프랑스에 덜 불리한 내용을 담은 이 조약은 칼레 조약으로 최종 타결되어 양국 왕의 비준을 받았다(1360. 10). 그결과 에드워드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자신의 권리주장을 철회하고 그 대가로 프랑스 남서부의 비옥한 땅 아키텐을 전부 차지했다.

몰락기(1360~77년)

칼레 조약은 잉글랜드·프랑스 모두에 안정이나 번영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1361, 1369년 잉글랜드에 또다시 흑사병이 발생해 사회적·경제적 혼란이 심해졌으며 물가와 임금을 발병 이전 수준으로 묶어두기 위해 절박하게 노동자법령(1351)을 시행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1350년대에 제정된 그밖의 유명한 법령으로는 외국 성직자들에 대한 대중적 적대감을 반영한 1351년의 후임성직자규제법(Statute of Provisors)과 1353년의 교황존중처벌법(Statute of Praemunire) 등이 있었다. 이들 법령은 빈번하게 다시 제정되었으며 에드워드는 1366년에 잉글랜드에 대해 교황청이 주장하는 봉건적 우월권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장 2세의 아들인 프랑스 왕 샤를 5세가 칼레 조약을 파기하자 에드워드는 다시 프랑스 왕의 칭호를 썼으나 이 문제에 대해 전과 같은 열성을 보이지는 않았고 대부분의 전투와 외국영지의 관리를 자신의 아들인 흑세자 에드워드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에게 맡겼다.

프랑스에 민족의식이 고조되면서 그들이 싸움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반면 에드워드는 자금이 부족해 자발적으로 교회의 부와 특권을 공격하는 데 가담했다. 한편 아키텐은 점차 프랑스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에드워드 왕자는 건강이 나빠져 잉글랜드로 돌아왔으며(1371) 곤트의 존은 프랑스를 가로질러 칼레에서 보르도까지 행군했으나(1373)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친히 마지막으로 해외출정을 시도했으나(1372) 역풍이 불어 그의 군대는 프랑스에 상륙조차 하지 못했다.

1375년에 그는 기꺼이 휴전협정을 맺었으며 이 협정은 그가 죽을 때까지 유효했다. 그 협정에 따라 잉글랜드의 수중에 남은 중요한 영지는 칼레·보르도·바욘·브레스트로 줄어들었다.

에드워드는 1369년 필리파 왕비가 죽은 뒤 탐욕스러운 정부 앨리스 페러스에게 완전히 사로잡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고 에드워드 왕자와 곤트의 존은 각기 자기 세력을 이끌고 왕실과 추밀원에서 날카롭게 대립했다.

곤트의 존은 1374년 4월 잉글랜드로 돌아와 앨리스 페러스의 도움으로 아버지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그의 통치는 명예롭지도 못했고 성공을 거두지도 못했다. 1376년의 유명한 이른바 선린의회(Good Parliament)에서 지배세력인 곤트의 존 일파에 대한 대중적 분노가 마침내 전면에 터져나왔다. 앨리스 페러스는 축출되었고 곤트의 추종자 일부는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의회가 일을 다 마무리짓기 전에 에드워드 왕자가 죽음으로써(1376. 6. 8) 하원은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을 잃게 되었다.

곤트의 존이 다시 권력을 잡았고 에드워드 3세가 죽자 선린의회가 제정한 조례는 번복되었다.

에드워드의 성품

에드워드 3세는 남다른 활력과 열정적 기질을 지닌 인물로서 탁월한 전술가였고 완벽한 기사였다.

그의 궁정은 당대 유럽에서 가장 화려했으며 그 자신도 프랑스 전쟁에서 명성을 얻은 용맹한 기사단의 우두머리로 전혀 손색이 없었다. 그의 야망은 주로 군사적 영예를 얻는 데 치우쳤지만 잉글랜드에서 그는 나쁜 군주가 아니었고 관용적이고 친절하고 호의적이며 가까이하기 쉬웠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보급물자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백성들의 청원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의회의 힘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약점은 부당한 배신행위, 낭비벽, 경솔함, 방종한 생활 등이었다. 그의 야망은 결국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었으며 그가 죽기 전에 백성들까지도 그의 실패를 느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