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표기 언어 John of Gaunt, duke of Lanc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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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340. 3, 헨트
사망 1399. 2. 3, 런던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랭커스터 공작.
Earl of Richmond(1342~62), duc d'Aquitaine(1390~)이라고도 함.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와 에노의 필리파 사이의 넷째 아들이나 살아남은 아들 중에서 셋째 아들이다. 존은 조카인 리처드 2세가 왕으로 있을 동안 정치적이고 헌법적인 투쟁 과정에서 중재 역할을 했다. 그는 3명의 15세기 랭커스터 왕가의 군주들, 즉 헨리 4세·5세·6세의 직계 조상이다.

곤트(Gaunt)라는 말은 그의 고향인 헨트(Ghent)가 변한 것인데, 그가 3세가 된 이후로는 전혀 사용되지 않다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2세 Richard Ⅱ〉에서 이 말이 사용되면서 사람들이 그의 이름에 붙여서 부르게 되었다.

존은 첫번째 부인인 블랜치(1369 죽음)를 통해 랭커스터 공작 작위와 잉글랜드 및 웨일스에 있는 광대한 랭커스터 가문의 영지를 획득했다. 1367~74년에 그는 프랑스와의 백년전쟁(1337~1453)에서 지휘관으로 복무했고 전쟁에서 돌아와 부왕과 함께 막중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정부요직을 탐내는 유력한 고위 성직자들 가운데는 그를 적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종교개혁가 위클리프와 기묘한 동맹을 맺어 그들의 적대적 태도에 대응했다. 존은 지독하게 인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10세 된 그의 조카가 왕위를 계승한 후에도 자신의 직위를 유지했다. 1377년과 1381~86년에는 왕당파와 자기 동생인 글로스터 백작 토머스 우드스톡이 이끄는 반대파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했다.

존은 1371년 카스티야의 콘스탄시아와 결혼한 것을 근거로 카스티야-레온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하기 위해 1386년 스페인으로 떠났으나 왕위계승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1388년에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으나, 딸 캐서린(카탈리나)을 스페인의 젊은 귀족과 결혼시켰고 그 귀족은 마침내 카스티야­레온의 왕 엔리케 3세가 되었다. 한편 잉글랜드에서는 국왕 리처드 2세의 추종자들과 글로스터 백작의 추종자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존은 1389년 잉글랜드로 돌아와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다시 떠맡았다. 부인 콘스탄시아가 1394년에 죽었고 2년 뒤 정부(情婦) 캐서린 스윈퍼드와 결혼했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에 낳은 자녀 4명은 1397년에 적출로 인정되었다. 이 식구들이 바로 보퍼트가(家)를 이루어 15세기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99년에 존이 죽었을 때 리처드 2세는 랭커스터 가문의 영지를 몰수함으로써 그 재산이 존의 아들 헨리 볼링브룩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그러자 헨리는 리처드를 폐위하고 1399년 9월 헨리 4세로 왕위에 올랐다. 존에 관한 권위있는 전기는 아직도 S. 아미티지 스미스의 〈곤트의 존 John of Gaunt〉(1904)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책은 당시의 정치사 연구와 결부시켜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