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2세

리처드 2세

다른 표기 언어 Richard II 동의어 보르도의 리처드, Richard of Bordeaux
요약 테이블
출생 1367. 1. 6, 프랑스 보르도
사망 1400. 2, 잉글랜드 요크셔 폰티프랙트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흑세자 에드워드의 아들이다. 1377년 6월 할아버지의 왕위를 계승,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 때문에 숙부 랭커스터 공작을 비롯해 여러 귀족들의 후견을 받았다. 숙부의 실정은 흑사병과 백년전쟁으로 일어난 경제난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 결과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때 소년이었던 리처드는 폭동 지도자들을 설득시켜 발란세력을 무마시켰다. 1389년 5월 성년이 된 군주로서 독자적인 통치를 하겠다는 의사를 공표했다. 이후 리처드는 숙부의 아들 헨리 볼링브룩을 추방하고 숙부의 영지를 몰수했다. 그러나 리처드가 아일랜드 원정을 하던 중 헨리 볼링브록이 잉글랜드를 침공해 귀족들을 규합하자, 리처드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볼링브룩에게 항복했다. 리처드는 감금되어 4개월 뒤 죽었다.

리차드 2세(Richard II)
리차드 2세(Richard II)

강력한 반대파 귀족계급과 싸워 패배·사망했으며, 이때문에 이후 85년간 잉글랜드의 왕권은 약해지고 불안정하게 되었다.

흑세자(黑世子) 에드워드의 아들이며 에드워드 3세의 손자로 1377년 6월 할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아직 미성년이었기 때문에 숙부였던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을 비롯해 에드워드 3세 재위 말년에 권력을 잡은 귀족들이 계속 나라를 다스렸다.

곤트의 실정(失政)은 흑사병과 백년전쟁(1337~1453)으로 일어난 경제난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결과 1381년 와트 타일러의 난이 일어나 리처드는 최초로 큰 위기를 맞았다. 이때 그는 고문관들의 지시에 따라 행동하기는 한 듯하지만 대단히 침착하게 거짓 약속을 제시하여 반란세력을 무마시켰다(1381. 6. 14~15). 1382년 보헤미아의 앤 공주(1394 죽음)와 결혼했으며 아내를 매우 사랑했다. 1385년에 이르러 그는 옥스퍼드 백작 로버트 드 비어 같은 대수롭지 않은 정신(廷臣)들로 개인적 추종세력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그와 동시에 글로스터 공작 우드스톡의 토머스, 애런들 백작 리처드 피철런, 워릭 백작 토머스 드 비첨 등이 이끄는 반대세력들도 등장했다.

곤트는 줄곧 파벌들 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다가 1386년 7월 카스티야에 자신의 왕조를 세우겠다는 개인적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나면서 리처드를 적들의 수중에 내버려두었다.

리처드의 적들에게 부추김을 받은 의회는 리처드의 비서인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을 탄핵하고(1386) 11인위원회를 만들어 1년간 국왕의 활동을 감시하도록 했다. 리처드가 이같은 조치에 대해 왕권을 침해하는 반역적인 위법행위라고 선언하자 그의 적들은 이에 맞서 1388년 의회를 열어 리처드의 가장 가까운 측근들을 범법자로 몰았고, 일부를 처형하기까지 했다.

궁지에 몰린 국왕은 청원파(appellants)라고 불리는 5명의 반대파 주요 지도자들에게 굴복했지만 1389년 5월에 이르러 성년이 된 군주로서 독자적인 통치를 하겠다는 의사를 공표했다.

1389년말 곤트가 스페인에서 돌아와 상황을 진정시킴에 따라 리처드는 이후 8년간 곤트 및 청원파들과 외견상 화목한 관계로 지냈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국왕은 줄곧 이전의 적들에게 보복할 기회를 기다렸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다시 더욱 강력한 국왕 지지파를 결속해나갔으며 1397년 무렵에는 공격태세를 갖추었다.

그는 애런들을 반역죄로 기소해 처형시켰으며 워릭을 추방하고 글로스터를 투옥·살해했다.

청원파였던 곤트의 아들 헨리 볼링브룩과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가 1398년 9월 분쟁을 일으키자 국왕은 이 기회를 틈타 두 사람을 모두 추방했다. 뒤이어 1399년 2월 곤트가 죽자 리처드는 볼링브룩에게 넘어갈 랭커스터 가문의 막대한 영지를 몰수했다.

그러고 나서 같은 해 5월 그는 아일랜드로 떠났는데 이것은 큰 실수였다. 그가 없는 동안 볼링브룩이 잉글랜드를 침공해 귀족들을 규합했고, 리처드는 8월에 잉글랜드로 돌아왔지만 싸워보지도 못하고 볼링브룩에게 항복했다. 그는 9월 30일 폐위되고 볼링브룩이 국왕 헨리 4세로 왕위에 올랐다. 리처드는 10월에 폰티프랙트 성에 감금되어 4개월 뒤 그곳에서 죽었는데 아마도 스스로 굶어 죽은 듯하다. 셰익스피어가 〈리처드 2세 Richard Ⅱ〉에서 그가 살해당했다고 이야기한 것은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

리처드는 예민한 문학적 감식안을 지녀 제프리 초서, 존 가워, 장 프루아사르 같은 문인들을 후원했다. A. B. 스틸이 쓴 전기 〈리처드 2세 Richard Ⅱ〉가 1941년 출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