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4세

헨리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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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366. 4(?), 잉글랜드 링컨셔 볼링브룩 성
사망 1413. 3. 20, 런던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15세기에 잉글랜드를 다스린 랭커스터 왕가 최초의 왕으로서 왕위를 찬탈해 국왕이 된 뒤 강력한 귀족들의 반란이 잇달았음에도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재정적·행정적 취약점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이로 인해 랭커스터 왕조는 무너졌다.
헨리 4세는 자신이 헨리 3세(1216~72재위)의 후손인 점을 이용해 왕위찬탈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몇몇 귀족들은 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 헨리를 위협했다. 국내외적으로 많은 충돌과 갈등에 시달리다가 결국 건강이 나빠져 죽고, 헨리 왕자가 헨리 5세로 왕이 되었다.

헨리 4세(Henry IV)
헨리 4세(Henry IV)

15세기에 잉글랜드를 다스린 랭커스터 왕가 최초의 왕으로서 왕위를 찬탈해 국왕이 된 뒤 강력한 귀족들의 반란이 잇달았음에도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재정적·행정적 취약점을 극복하지 못했고 결국 이로 인해 랭커스터 왕조는 무너졌다.

헨리는 랭커스터 공작인 곤트의 과 그의 첫 아내 블랜치 사이의 살아 남은 아이들 중 맏이였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헨리 볼링브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사촌인 국왕 리처드 2세에게서 더비 백작위(1377)와 헤리퍼드 공작위(1397)를 받았다.

리처드 2세의 치세(1377~99) 초기에 곤트의 존이 정부를 이끄는 동안 헨리는 표면에 나서지 않았다. 곤트의 존이 1386년 스페인으로 원정을 떠나자 헨리는 정계에 입문해 왕에 반대했다. 그는 토머스 모브레이(뒤의 노퍽 공작 1세)와 함께 청원파의 가장 젊은 일원이 되었으며 청원파는 1387~89년 리처드 왕의 총신들을 범법자로 규정하고 자신들에게 복종할 것을 왕에게 강요했다. 그러나 곤트의 존이 이들을 화해시키려고 스페인에서 돌아오자 리처드는 우월한 위치를 회복했다.

헨리는 리투아니아(1390)와 프로이센(1392)으로 십자군 원정을 떠났으나 리처드는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1398년 리처드는 헨리와 노퍽 공작 사이의 불화를 구실로 두 사람을 왕국에서 추방했다. 그러나 곤트의 존이 죽은(1399. 2) 뒤 리처드가 랭커스터의 영지를 몰수해 헨리의 재산을 빼앗자 이를 기회로 삼아 헨리는 귀족세력의 대표자로서 잉글랜드를 침략했다(1399. 7). 리처드는 다음달에 항복했으며 그가 퇴위한 1399년 9월 30일 헨리는 헨리 4세로 왕위에 올랐다.

헨리 4세는 자신이 헨리 3세(1216~72재위)의 후손인 점을 이용해 왕위찬탈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몇몇 귀족들은 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 헨리를 위협했다. 치세 처음 5년 동안 헨리는 국내외의 여러 적들에게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 위험에 처했다. 1400년 1월에는 리처드의 지지자들이 꾸민 음모를 분쇄했으며 8개월 뒤에는 웨일스인 지주 오웬 글렌다우어가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잉글랜드의 웨일스 지배에 항거했다. 헨리는 1400~05년 웨일스로 계속 원정대를 보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그의 아들인 헨리 왕자(뒤의 헨리 5세)는 이 지역에 다시 잉글랜드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한편 글렌다우어는 강력한 퍼시 가문의 헨리 퍼시(노섬벌랜드 백작) 및 그의 아들 헨리 퍼시 경(조급쟁이라고 불림)과 힘을 합쳐 헨리 4세의 통치에 반대하는 국내 반란을 조종했다. 헨리 퍼시 경이 일으킨 반란은 헨리 4세의 치세 가운데 가장 심각한 반란이었으나 1403년 7월 슈롭셔의 슈루즈버리에서 벌어진 전투중 국왕군에게 패배하고 진압되었다. 1405년 헨리 4세는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와 공모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와 요크 대주교 리처드 스크루프를 처형했다.

이로써 그는 정치적 위기를 넘겼으나 이때부터 육제적인 고통을 겪었다. 당대의 사람들은 이를 문둥병이라 여겼으나 아마도 선천성 매독인 듯하다. 헨리 4세의 치세에 마지막으로 일어난 무장봉기는 1408년에 일어난 노섬벌랜드의 반란이었으나 곧 진압되었다. 이동안에도 헨리는 스콧족과 계속 국경 분쟁을 치렀으며, 1405~06년 웨일스의 반란을 지원한 프랑스와도 충돌할 뻔했으나 무사히 넘겼다.

이러한 군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헨리는 의회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1401~06년 의회는 계속해서 왕에게 재정관리를 잘못하고 있다고 비난했으며 이전에 왕실의 지출과 직위 임명권에 관해 갖고 있던 권리를 차츰차츰 되찾기 시작했다. 헨리 4세의 건강이 점점 나빠지자 행정부 내에서는 권력 투쟁이 벌어졌으며 그의 총신인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애런들에 맞서 헨리의 이복동생들인 보퍼트 가문 사람들과 헨리 왕자가 파벌을 형성했다. 헨리 왕자 쪽 사람들은 1410년초 애런들을 대법관직에서 쫓아냈지만 1411년 실권을 잃었다.

헨리 4세는 헨리 왕자와 절친한 부르고뉴인들에게 대항해 전쟁중이던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그결과 왕자와 헨리 4세의 사이는 나빠졌으며 헨리 4세가 정치를 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진 1412년에는 사이가 더욱 악화되었다. 몇 개월 뒤 헨리 4세는 죽었으며 헨리 왕자가 헨리 5세로 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