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시 전투

크레시 전투

다른 표기 언어 Battle of Crecy

요약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이 시작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잉글랜드가 승리한 전투(1346. 8. 26).

1346년 7월 중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코탕탱 반도에 약 4,000명의 중기병(重騎兵)과 1만여 명의 궁사수(장거리 활잡이)를 상륙시키고 센 강 서쪽의 노르망디 저지대를 약탈하는 한편, 남쪽으로 파리 바로 외곽에 위치한 푸아시까지 내려갔다. 에드워드가 궁극적으로 어느 방향으로 나갈지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프랑스 왕 필리프 6세는 1만 2,000명의 중기병과 많은 병력을 이끌고 에드워드를 향해 진격했다. 그러자 에드워드는 재빨리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푸아시에서는 센 강을, 아브빌에서는 솜 강 하류를 각각 건너 크레시앙퐁티외에서 방어 태세를 취했다.

말에서 내린 중기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오른쪽(그의 아들 흑세자 에드워드가 지휘)과 왼쪽(애런들·노샘프턴 백작이 지휘)에는 각기 기병을, 또 그들의 양쪽 진영에는 궁사수를 배치했다. 필리프군의 이탈리아인 궁수들은 잉글랜드 진영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나, 잉글랜드 궁사수에게 밀려 프랑스 기병대의 첫번째 돌격로까지 후퇴했다. 프랑스 기병대는 잉글랜드군의 중앙을 향해 한층더 무모한 공격을 가해 왔다.

그러나 잉글랜드군의 중기병은 끄떡도 하지 않고 버티는 한편, 궁사수들은 전방으로 대열을 선회하여 계속해서 파송되어 오는 프랑스 기병대를 향해 양쪽에서 화살 공격을 퍼부어 거의 전멸시켰다. 전투가 끝났을 때는 필리프의 동생 알랑송의 샤를 2세와 필리프와 동맹을 맺었던 보헤미아의 얀 왕, 플랑드르 백작 느베르의 루이 2세를 비롯한 1,500여 명의 기사와 향사가 목숨을 잃었다. 필리프는 부상만 입은 채 참사를 면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칼레를 포위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