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시카고

다른 표기 언어 Chicago
요약 테이블
위치 미국 일리노이 주 북동부, 시카고 강 하구
인구 2,638,159명 (2024년 추계)
면적 606.42㎢
언어 영어
대륙 북아메리카
국가 미국

요약 미국 일리노이 주 쿡 군에 있는 시. 미국에서 3번째로 인구가 많은 시이자 대도시권이다. 1830년대까지는 미시간 호 남서쪽 끝 부근에 있는 늪지성 강어귀의 작은 교역소에 불과했다. 이후 1920년대와 1930년대초 금주법이 시행되던 시기를 전후하여 시카고는 세계적인 지하폭력의 대명사가 되었다. 경관이 멋졌던 것으로 유명한데, 1871년에 발생했던 화재를 딛고 혁신적인 현대 공법으로 건축물을 세웠을 뿐 아니라 높은 빌딩들을 건설하면서 빼어난 건축 미술을 자랑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 대부분 사라졌다. 대표적인 제조업 분야로는 철강·금속제품·식품·제과·철제가구·화학제품·비누·페인트·기계장비·통신장비·전자제품·철도부품·외과용기구·과학기구 등이 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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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특징
  2. 자연환경
    1. 지형
    2. 기후
    3. 시의 구조
  3. 주민
  4. 경제활동
  5. 교통
  6. 정치
  7. 사회
    1. 사회환경
    2. 주택
    3. 교육
    4. 보건
  8. 문화
    1. 예술활동
    2. 오락
    3. 대중매체
  9. 역사
    1. 정착과 개발
    2. 급격한 경제성장
    3. 시의 재건과 시민
    4. 시 병합의 특징
    5. 20세기
시카고
시카고

미국에서 3번째로 인구가 많은 시이자 대도시권이다. 1830년대까지는 미시간 호 남서쪽 끝 부근에 있는 늪지성 강어귀의 작은 교역소에 불과했다. 내륙에 있으면서도 수로를 끼고 있는 입지조건 덕분에 미국의 팽창과 더불어 세계적인 공업 및 상업 단지의 중심으로 도약했다.

시카고의 발전은 미국 전체의 발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이 시의 문제점은 곧 현대 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이다. 한마디로 시카고는 전형적인 미국의 도시이다. 시카고 대도시권의 인구는 일리노이 주 전체인구의 약 2/3를 차지한다.

역사적으로 시카고 시와 현재의 대도시권을 이루는 시 주변의 군들은 대개 전원적인 일리노이 주 남부와는 정치적·사회적·정신적인 면에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당시 급속히 성장하던 시의 초기 정착민들은 주로 미국 북동부의 주들이나 유럽으로부터 온 사람들이었다. 이에 비해 주의 남부에 정착한 사람들은 대부분 애팔래치아 산맥 지방이나 미국 남부의 주들로부터 왔다. 이들은 사상이나 생활면에서 서로 대조적이었다. 예를 들어 시카고 시는 남북전쟁 당시 북부연방정부를 지지해 물자와 인력을 조달했으나 일리노이 주 남부인들은 남부연합과 동맹관계를 맺고 연방탈퇴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실패했지만 강력한 것이었다. 이런 이질적인 요소들이 계속 시와 주의 정치적·사회적 생활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 

지도
시카고

특징

미국 산업의 미개척지가 개발되면서 성장한 시카고는 그 부산물로 이른바 '모든 사건이 벌어지는' 시로 조롱받기도 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초 금주법이 시행되던 시기를 전후하여 시카고는 세계적인 지하폭력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시카고뿐만 아니라 미국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폭력이 일상적으로 난무했다. 사람들은 또 오랫동안 시카고 시정부가 업계와 결탁해 타락했다고 생각했다.

시카고가 정치적·사회적인 면에서 신랄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해도 시의 외적 경관이 멋지다는 데는 거의 이견이 없다.

시는 1871년에 발생했던 대화재를 딛고 혁신적인 현대 건축공법으로 건축물을 세웠을 뿐 아니라 매우 높은 빌딩들을 건설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수십 년 사이에 갑작스럽게 상업지구가 들어서게 되면서 시의 과거를 알려주는 귀중한 장소들이 사라져갔다. 오디토리엄 빌딩이나 뉴베리 도서관 등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들은 몇몇 소수개인의 힘으로 보존되고 있다. 최근 사람들의 인식이 고양되고 효율적인 법률이 생겨 옛 건축물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늘고 있다.

한편 새로운 건물들을 짓기 위해 보다 많은 땅이 필요하게 되자 시의 중심부를 남쪽과 서쪽으로 확장해서 원래 황무지였던 지역까지 개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들도 들어서게 되었고 시의 윤곽은 옆으로 확장되는 가운데 위로 치솟고 있다. 중심가의 뒤로는 여러 해 동안 상업 중심지의 자리를 지키는 원동력이 되어온 대규모 공업단지가 불규칙하게 퍼져 있다.

공업도시로도 인정받는 시카고의 경계는 원래 초원지대였던 지역을 포함하여 계속 불규칙하게 확장되고 있는 시 근교지역과 공업 위성도시들 쪽으로도 뻗어가고 있다.

시의 중심부에 있는 미시간가(街)에서 북쪽으로 가면 그랜트 공원의 녹지가 있다. 공원에는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으로 지은 시카고 미술협회 건물이 있고, 일리노이센트럴걸프 철도의 선로가 울창한 숲을 통과한다. 또 시카고 공공도서관 문화 센터도 있다.

이 문화 센터에는 아치형으로 된 방과 지난 시대의 정교한 모자이크 작품으로 장식된 통로가 있다. 또 계속 가다보면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층건물 단지가 있다. 시카고 강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 위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는 시원스런 도시공간을 볼 수 있다. 이 미관이 수려한 지구는 원래 강어귀였던 곳의 양쪽 가장자리를 따라 뻗어 있다. 미시간가를 따라 강의 북쪽으로 가면 '매그니피선트 마일'이 나온다. 이곳은 세련된 상점가로서 뉴욕 시의 5번가에 버금 간다.

이곳의 올드 워터 타워는 중세식의 작은 석탑들로 이루어져 있다.

중심지를 벗어나면 미국 생활의 인종적·민족적 다양성을 반영하는 변화무쌍하고 복합적인 시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시카고는 특히 생산직 노동자들의 시로 알려져 있는데, 노동자들은 대개 19세기 유럽의 도시나 농촌으로부터 흘러들어온 사람들과 미국 최남부에서 노예로 지냈던 사람들의 후손이다(노동운동). 최근에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정착해 살고 있고, 동남 아시아와 동부 유럽에서 이주해오는 사람들도 있어서 복합성의 정도가 더 심해지고 있다.

시와 시의 근교에 널리 퍼져 있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주민들은 시카고 대화재를 비롯해서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된 재난들을 겪었다. 19세기에는 경찰이 파업노동자들을 공격해서 여러 명의 부상자와 사상자를 낸 사건이 있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무정부주의자들은 폭탄을 투척했고 7명의 경찰관이 죽었다.

이어서 헤이마켓 폭동에 가담한 독일계 미국인 지도자들을 규탄하는 사건도 있었다. 철강·철도·식품가공 공장들을 비롯한 산업체에서는 노동쟁의가 여러 번 발생했는데, 격렬하고 치명적이었다. 이어 비극적인 이로쿼이 극장 화재가 발생했고, 시카고 강에서 유람선인 이스트랜드호가 가라앉아서 800명 이상이 익사했다. 20세기초에 일어난 성 발렌타인 데이의 대학살은 갱들 사이의 암투로 빚어진 일이었는데 유명한 알 카포네 같은 갱들이 시카고를 무대로 활동했다.

1968년 민주당 대회가 열렸을 때는 경찰과 항의자들 사이에 발생한 폭력사건이 텔레비전으로 방송되기까지 했다. 그리고 크고 작은 부패가 시 당국에 의해 계속 행해졌다. 한편 시는 '윈디시티'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데 이는 초기에 이 시를 건설한 사람들의 허풍스런 주장에서 유래한 이름이지만 기상학적으로도 들어맞는 이름이다. 또 미국의 지적·예술적·사회적 생활을 비약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데 이바지한 뛰어난 시민들에게 걸맞는 이름이기도 하다. 시카고의 예술적 위업들은 과감한 실험정신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시는 극장 중심지로서의 면모를 회복했고, 상상력이 풍부한 최근의 건축양식은 종종 논쟁거리로 떠오른다. 피카소가 직접 시에 기증한 거대한 추상 조각품은 주저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정신을 상징한다. 시민들과 수백만 명의 관광객들은 시카고의 예술 작품들이 지닌 그러한 면모를 즐길 수 있다.

자연환경

지형

정확히 시카고 시만 대상으로 할 때 시의 면적은 590.8㎢이다.

시카고의 표준대도시권통계지역(SMSA)은 쿡 군과 주변에 있는 5개의 군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시카고-개리-커노샤 표준통합통계지역(SCSA)은 9개 군으로 구성된다. 9개 군 가운데는 인디애나 주 북서쪽에 있는 2개 군과 위스콘신 주 남동쪽에 있는 군 하나가 포함되어 있다. 시카고 지형은 대체로 평평하다. 미시간 호 지역이 해발 176m이고, 시의 외곽지역은 183m를 조금 웃도는 정도이다. 시의 대부분은 후빙기의 시카고 호가 남긴 지형인 평야에 위치한다. 시카고 호는 약 1만~1만 2,000년 전에 대륙의 빙하가 후퇴하면서 세인트로렌스 계곡을 따라 북동쪽으로 흘러가는 물의 흐름을 막았을 때 생긴 것이다.

대도시권 외곽부분들은 빙하작용에 의해 생긴 지형들로 이루어졌는데, 높이가 213m 이상이다.

폭이 좁은 시카고 강은 미시간 호에서 내륙 쪽으로 1.6㎞ 흘러가다 갈라진다. 갈라진 강줄기를 따라 시는 북부·서부·남부로 나누어진다. 원래 시카고 강은 미시간 호로 흘러들어가는 것이었는데, 1900년에 시카고 운하가 완성되면서 그 흐름이 거꾸로 바뀌었다.

운하 바닥이 미시간 호 표면보다 낮기 때문이다. 시의 남동쪽 가장자리 근처에는 캘러멧 강이 있는데 1922년에 완성된 캘러멧새그 수로 때문에 캘러멧 강의 흐름도 바뀌었다. 캘러멧새그 수로는 1955~72년에 확장되어 현대적인 유람선의 통로로 이용된다. 두 수로는 시의 남서쪽에서 만나게 되고, 시카고 대도시권 위생국의 3개 처리장에서 처리된 하수와, 공장들과 외곽지역의 하수가 흘러든다.

물의 양이 많을 때는 때때로 강의 흐름이 바뀌어서 원래의 방향인 호수 쪽으로 흘러 낮은 지대에 홍수가 발생하기도 한다.

기후

기단이 대개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날씨 변화가 심하다.

미시간 호가 극단적인 기후변화를 경감시켜 호수에서 가까운 곳은 여름기온이 다른 곳에 비해 낮고, 겨울기온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1월평균기온은 약 -4℃이고, 7월평균기온은 약 24℃이다. 연평균강수량은 838㎜ 정도이다. 때때로 폭설 때문에 교통이 두절되기도 한다.

시의 구조

시카고는 동쪽으로 호반과 접하는데 호수는 남동쪽에서 북서쪽으로 굽어 있다.

그밖의 세 방향으로는 시 근교와 접하고 있으며 경계선의 모양은 고르지 않다. 강의 분기점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1830년에 석쇠 모양으로 구획정리되었다. 이 정리작업은 1787년 시행된 노스웨스트 법령의 세부 설계사항들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시카고의 중심부는 1897년 이래 '루프'로 알려져 있다.

이런 별칭은 약 35블록에 걸친 지역을 순환하는 고리 모양의 고가철도가, 외곽에서 들어오는 여러 고가철도와 연결되어 있는 모양을 보고 붙인 것이다. 이 환상선에서 북쪽·서쪽·남쪽으로 지선들이 뻗어 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건설 붐으로 고도로 밀집된 상업지구가 루프의 서쪽으로 확장되었는데, 1970년대에는 강의 남쪽 지류를 지나 니어웨스트사이드까지 확장되었다. 새로 생긴 많은 고층건물들 때문에 시의 윤곽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1920년에 미시간 애버뉴 다리가 완공되면서 개발된 노스미시간가(街)와 부근의 니어노스 지역에는 1960년대 이후 상업용·주거용 고층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건물은 100층으로 된 존 핸콕 센터와 74층의 워터 타워 플레이스이다. 두 건물 모두 다목적으로 이용되는 고층건물로 쇼핑 시설, 식당, 사무실, 아파트 등을 갖추고 있다.

워터 타워 플레이스에는 호텔도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기에 완공된 시내 중심부의 사무용 건물들 가운데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시어스 타워가 있다. 시어스 타워는 443m 높이의 110층짜리 건물로 루프의 바로 서쪽에 있다. 루프 동쪽에는 80층의 스탠더드석유회사 건물이 있다. 그밖에 일리노이 센터 빌딩이 있는데, 아파트·사무실·호텔 등을 갖추고 있다. 1980년대초까지 시카고 중심부에서 새로운 건물을 짓는 데 사용된 땅의 면적은 매년 평균 26만㎡였다.

시 근교에도 상당수의 사무용 건물들이 들어섰다. 시카고의 중심부에는 그랜트 공원이 있고, 시의 북쪽에는 링컨 공원이 있다. 남쪽으로는 잭슨 공원과 버넘 공원이 있다. 이 공원들은 모두 호반을 따라 수㎢에 걸쳐 펼쳐져 있다.

주요공업지역은 시카고 강의 두 지류를 따라 들어서 있고, 남동쪽의 캘러멧 지역에도 있다. 그밖의 공업지역은 철도를 따라서 발달해 있고 워키건·오로라·졸리엣 시 등 위성도시들에도 발달해 있다. 그리고 시카고 중심부에서 64㎞ 떨어진 곳에는 인디애나 주의 개리-해먼드-이스트시카고 공업단지가 있다.

사우스시카고 쪽으로는 캘러멧 강 주변과, 가까운 인디애나 주의 호반을 따라 정유공장·제철소·화학공장·조립공장 등이 많이 있다(강철). 이 지역 최초의 제철소는 1880년 캘러멧 강 입구에 세워졌다. 이어 1900년대초에는 인디애나 항과 그 부근에 큰 공장들이 생겼다. 1906년 철강생산 중심지로 개리 시가 세워졌다. 1960년대에 인디애나둔스 지역에 속하는 개리 시 동쪽의 번스 항에 큰 제철소가 2군데 생겼다. 한편 1956년 이후 시카고 지역항만국은 오대호-세인트로렌스 수로에 주요기착지를 개발해서 해상항로를 더욱 효율적으로 운영했다.

이 항로의 기착지는 미시간 호에서 캘러멧 강을 따라 10㎞ 내려간 곳에 세워졌다. 1970년대말에 캘러멧 강 입구에 이로쿼이 랜딩 기착지가 세워져서 앞서 생긴 기착지를 보완해주고 있다.

주민

이주민들이 몰려든 결과, 시와 시카고 대도시권 인구 가운데 외국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크게 증가했다.

1970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주로 폴란드·독일·이탈리아·소련·스웨덴·아일랜드 등에서 많은 이주민들이 몰려들었으며, 1980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라틴아메리카 출신이 크게 늘었고 아시아계 인구도 많이 늘었다. 시가 성장하기 시작한 초기에 시카고에는 흑인들이 많지 않았으나 제1차 세계대전과 그이후 흑인 이주민들이 계속 늘어났다. 1930년에는 흑인 인구가 23만 3,000명이었는데, 1980년에는 시 전체인구의 2/5에 해당하는 약 120만 명으로 늘었다.

루프의 북쪽에 있는 레이크 쇼어 도로의 대저택들은 호화로운 고층 아파트 건물들로 급속히 바뀌어갔다.

호화로운 새 건물들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호반의 골드코스트를 따라 거의 시의 경계선까지 이어져 있다. 이곳에서 시의 중심 쪽으로는 2, 3층 아파트 건물들과 좀 오래된 주택들이 대상(帶狀)으로 늘어서 있다. 이곳에는 독신자나 전문직 종사자와 그 가족들이 산다. 사우스사이드에 있는 시카고대학교 부근은 시에서 가장 지식수준이 높은 지역 가운데 하나이지만 시에서 가장 황폐한 구역에 속한다. 지역사회의 생활양식에 영향을 끼친 다른 대학들로는 노스사이드에 있는 디폴대학교, 로욜라대학교, 시카고에 있는 일리노이대학교가 있다.

1960년에 시카고대학교를 지으면서, 시카고 중심부의 남서쪽에 있는 오래된 이탈리아인 지역사회가 거의 파괴되었다.

시의 곳곳에 민족적·인종적 집단이 형성한 단일공동체가 계속 생기고 있다. 넓은 지역에 퍼져 살고 있는 아일랜드인은 오랫동안 시의 정치를 지배해왔는데, 특히 사우스사이드에 있는 아일랜드인 지역공동체는 커다란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1933~76년에 4명의 시카고 시장을 배출했다.

그들 4명 모두 민주당원이었다. 한편 미국에서 가장 큰 폴란드인 지역공동체가 시카고에 있다. 그들은 대부분 니어노스웨스트사이드에 모여 살고 있다. 북쪽과 북서쪽으로는 스웨덴과 독일인들이 주로 모여 살고, 보헤미아인들과 체크인·슬로바키아인 들은 남서쪽에 있는 시서로 교외지역까지 분포한다. 그리스인들은 루프 바로 서쪽에 정착해서 살고 있다. 북쪽 맨 끝과 시의 근교인 링컨우드와 스커키는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이다. 중국인 지역공동체는 사우스사이드에 몰려 있고, 일본인과 한국인 지역공동체는 주로 노스사이드에 있다.

한편 중북부 지역에는 애팔래치아 지방의 백인들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는데 도시화된 고립영토로 남아 있는 인디언 지구로는 전국에서 2번째로 크다. 이 많은 민족집단들은 후손들이 미국의 생활에 동화되어감에 따라 그들이 본래 가졌던 두드러진 특색들을 잃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던 언어들은 확실하게 남아 있다. 각 민족 고유의 언어와 함께 가게 앞에 딸린 식당이나 민속상점 등은 시카고 주민들에게 흘러가버린 옛날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요소들이다.

초기에 흑인들은 대부분 대중 운송수단인 철도변을 따라 정착했다.

특히 공업지역에서 가까운 사우스사이드는 일자리를 찾는 흑인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중일 때부터 전쟁이 끝난 뒤까지 남부에 있던 이른바 블랙 벨트(흑인지구)는 시의 다른 지역이나 가까운 교외로 확장되었다. 유대인들이 많았던 웨스트사이드 확장지역과 니어노스의 일부 지역에도 흑인들의 거주지가 생겼다. 시와 교외에 생긴 흑인 거주지들은 그 이전에는 다른 외국인 이주민들이나 그 2세들이 살았으나 환경이 나빠지고 흑인들이 몰려옴에 따라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중산층과 부유한 흑인주거지는 사회적·경제적으로 안정된 지역으로 성장했다. 교외주거지는 처음에 주요철도를 따라서 발전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교외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초기의 방사형 도로축 사이사이에도 주거지가 들어섰다. 대개 주거지 조밀도는 철도주변의 주거지보다 낮은 편이었다.

1869년에 교외지역의 부동산매매가 급증해서 새로운 주거지들이 들어섰는데 대화재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이 새로운 교외지역으로 많이 몰려들었다. 이 가운데 하나가 시의 서쪽에 있는 리버사이드이다. 에번스턴·위넷카·레이크포리스트 등 시의 북쪽에 있는 호반지역들도 꾸준히 성장해 20세기 들어 노스쇼어는 가장 유명한 교외지역이 되었다. 한편 서쪽에 있는 오크파크도 이에 버금 가는 성장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거주지의 분산을 유도한 요인은 시의 발전과 관계 있는 것들이었는데 고속도로 건설이 그 한 예이다.

또 공업단지들이 시 외곽까지 확장되었고, 시내 중심가 못지 않게 규모가 큰 상점가가 외곽지역에 들어섰다. 오헤어 국제공항도 교외발전에 한몫을 했고, 그 주변의 호텔·모텔 단지, 상점가들, 사무용 건물들, 공업지구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아곤 국립연구소와 페르미 국립가속실험실 등 핵연구기관들이 버테이비아 근처에 있다. 그밖에 많은 지역 공동체들과 새로운 읍들이 생겼다.

경제활동

시카고 시와 그 대도시권은 여전히 북아메리카 내륙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활동의 중심지이다. 이 지역의 경제적 기반은 매우 다양하며 공업과 상업이 균형 있게 발달되어 있다. 지역 노동인구의 1/4이 제조업에 종사한다.

대표적인 제조업 분야로는 철강·금속제품·식품·제과·철제가구·화학제품·비누·페인트·기계장비·통신장비·전자제품·철도부품·외과용기구·과학기구 등이 있다.

시카고는 철공급지이며, 대륙의 주요 교통중심지라는 전략적 위치에 힘입어 다양한 분야의 제조업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특히 기계와 조립용 금속제품들의 생산에 있어서 선두를 달린다. 디젤 전기기관차에서 인쇄기, 도구조작 기기, 대규모 토목공사 장비, 농기구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다양한 화학제품 및 관련제품들은 일반 소비자들뿐만 아니라 공업체들에도 중요하다. 주로 캘러멧 지역과 인디애나 주 북서부에 큰 정유공장들이 여러 개 몰려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인쇄업체들도 여러 개 있다. 전국적으로 배포되고 있는 많은 잡지들, 통신판매용 상품안내서, 전국 전화번호부의 상당량이 이곳의 인쇄공장에서 만들어진다. 방대한 양의 종이는 수상 교통로를 통해 운반되는데, 그 가운데 많은 부분이 캐나다로부터 들어온다. 시는 뉴욕에 이어 2번째로 사무직 노동자 상대의 출판물이 많은 곳이다. 교육자료·백과사전·전문서적·무역출판물 등 출판물의 종류는 세분되어 있다. 시에는 큰 광고회사와 홍보기관들도 많다. 농업이 발달한 중서부 지방과 공업 위주인 북동부 지방 사이에 위치하기 때문에 식품가공업도 발달했다.

시카고는 미국의 다른 어떤 시보다도 시사회·집회·법인체 등의 회담이 많이 열리는 곳이다. 머천다이즈 마트는 여러 해에 걸쳐 세계에서 가장 큰 상업거래소로 손꼽혀왔다. 이 건물의 거래소 면적은 11만㎡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도매거래만이 이루어진다. 시카고 어패럴 센터를 비롯한 다른 몇몇 시설들도 전문적인 도매업체들에 의해 이용되고 있다. 각종 집회와 시사회 등은 보통 호반에 있는 매코믹 플레이스에서 열리는데 이 건물은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71년에 증축한 것이다. 그밖에 호텔이나 모텔, 특히 오헤어 공항 주변과 시내 중심가에 몰려 있는 호텔과 모텔의 시설물들이 많이 이용된다.

시카고에는 1914년에 설립된 연방 준비은행이 있으며 대부분의 큰 은행들은 루프에 몰려 있다. 일리노이 주는 은행의 지점운영을 법으로 금한다. 따라서 시의 외곽에 사는 사람들과 교외에 사는 사람들은 소은행·환전소·저축대부조합 등을 이용해야만 하는데 이런 기관들의 활동영역은 제한되어 있다.

시에는 미드웨스트 증권거래소와 주요 중개사무소들이 많이 있다. 미국에서 가장 큰 2개의 자동차보험회사를 포함해 많은 보험회사들이 시와 교외에 있다.

교통

시카고는 주요 내륙항이면서 전국 철도의 중심지이다. 오헤어 국제공항은 세계에서 가장 분주한 공항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1960년대말에는 이 공항의 혼잡함을 덜기 위해 규모도 작고 오래된 미드웨이 공항을 다시 이용하기도 했다.

철도회사 합병, 혼합 교통수단의 개발, 운송산업이 여러 가지 면에서 통제를 덜 받게 된 점 등 때문에 교통 중심지로서의 시가 위상이 많이 위협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카고 대도시권은 여전히 북아메리카 철도화물 운송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시가 가진 몇몇 통근철도 노선들은 미국 내에서 가장 편하고 정확하고 서비스가 좋기로 이름 나 있다. 통근철도를 이용하면 교외로부터 시의 북부와 서부로 쉽게 오갈 수 있다.

1973년에 설립된 지역교통국(RTA)이 대부분의 교외 철도와 버스 운행을 관리한다. 또 시카고 운송국(CTA)이 운행하는 시내와 근교의 고속수송열차와 버스 노선에 대해서도 RTA가 책임을 지고 있다. CTA와 RTA는 둘 다 국내에서 가장 비싼 요금 체제를 시행하고 있지만 점점 부채가 늘어가는 형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건설된 고속도로망은 점차 혼잡해졌는데 레이크쇼어 도로망도 마찬가지였다. 레이크쇼어 도로는 시의 북쪽 경계에서 거의 남쪽 경계까지 뻗어 있는데 도로 주변을 따라 호수의 경치와 시의 윤곽이 펼쳐져 있다.

정치

시카고와 주의 다른 지역 사이에 존재하는 정신적인 단절은 아마 정치·사회 분야에서 가장 심각할 것이다.

시청과 주정부 사이의 갈등도 매우 심하다. 시카고의 민주당원들과 일리노이 주 남부의 공화당원들은 오랫동안 당략에 치우친 논쟁을 일삼았다. 시카고 시정부는 오랫동안 부실한 구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는 현대적인 도시의 행정에 적합한 효율적인 구조가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권력은 시장이 독점하며 시장은 50개 구(區)의 대표들로 구성된 시의회의 의장이기도 하다. 시장은 시의회의 동의를 얻어 교육위원회, 공원관리국, 주택공사, 기타 특별위원회와 여러 직책들의 구성원을 임명할 수 있다.

시정부의 권력분산은 오랫동안 형식적으로만 존재해왔지만, 시카고가 가진 정치체제는 그 나름대로 구조가 잘 짜여 있으며 통제력도 강하다.

리처드 J. 데일리 시장이 시정부를 통솔할 때 시카고의 행정구조는 가장 큰 효과를 발휘했다(폴리티컬 머신). 데일리 시장은 1975년에 4년 임기의 시장직에 6번째 당선되었다. 쿡 군의 민주당 의장이기도 했던 그는 커다란 권력을 행사해 일리노이 주 전체 민주당이나 전국 민주당 안에서도 상당히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행정부의 모든 분야는 다른 분야와의 철저한 상호부조 체제로, 정치권은 자금지원을 받고 그에 대한 보상을 하는 식으로 움직인다(엽관제). 선거 때가 되면 이런 움직임이 극도로 활발하게 진행된다. 불법선거 행위를 비난하고 거부하는 사례는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어서, 시카고 정치활동의 특징이 되어버렸다.

시정부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종종 시의 건축감독원과 다른 공직자들이 법적인 상벌제도를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그것은 시정부에 대한 충성심을 강화하기 위한 장치로서 시정부에 대한 불만을 처벌하려는 제도라고 말한다. 또 시의회의 무소속 의원과 공화당 의원들이 정책 결정권의 분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시의회는 시장의 계획안에 무조건 찬성하는 기관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시카고 정치의 특징을 이루는 체제의 기초는 1931~33년에 이루어졌다.

이 체제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조직'이라고 부른다. 이 조직의 기초를 세운 사람은 보헤미아 이주민인 안톤 체르마크였다. 그는 빠른 시일 안에 시카고의 소수민족 집단들이 가진 정치적 성향을 터득해내고 이주민 노동자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는 금주법에 반대했다. 그리고 민주당원들을 선거후보로 지명할 때, 민족적·노동적·상업적 이해 관계자들 사이의 균형을 고려해서 후보 명단과 정견을 정했다.

시의 보존지구와 재개발지구 설립을 골자로 한 행정개혁은 개혁주의자인 마틴 케널리 시장(1947~55 재임)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으나, 케널리의 정책이 급속도로 추진되기 시작한 것은 1955년에 데일리가 시장직에 오른 뒤부터였다. 20년이 넘게 노동조합·시민대표·교외거주인들을 포함한 경제 지도자들, 그리고 선거구 단위에서 그 이상에 이르기까지 당을 지지하는 열성당원들은 비공식적이긴 해도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이 동맹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생산근로자들과 민족공동체에서 던진 지지표였다. 동맹관계가 지속되면서 이 조직은 시카고의 정치적 풍토를 결정짓게 되었다. 조직의 단합을 유지하는 중간자 구실을 했던 데일리가 1976년에 죽자 조직의 영향력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1979년에는 시카고의 첫 여성 시장으로 제인 M. 번이 당선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초에는 조직과는 무관한 비조직파 민주당 의원들이 시의회의석을 많이 차지했다. 1983년에는 해럴드 워싱턴이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시카고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사회

사회환경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카고에 있어서 가장 뚜렷한 변화는 흑인 인구가 엄청나게 늘어나 시 전역에 널리 퍼진 것이다.

이에 따라 중산층·상류층 백인들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백인들은 시를 벗어나 교외 쪽으로 이주해갔다. 소수의 흑인 의원들은 정치적 제도를 이용해 세력을 키우려 했다. 흑인집단의 지지표를 모아 선거에 이기는 것이 그 예이다. 흑인들의 저항은 차츰 커져서 1960년대에는 조직적인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초기의 저항조직으로 오퍼레이션 브레드배스킷(Operation Breadbasket)이 있는데 이것은 마틴 루터 킹 2세 목사가 설립한 남부 그리스도교 지도자회에서 전개한 경제운동이었다.

이 조직은 흑인공동체의 경제적·정치적 권한을 확대하기 위해 때때로 백인이 관할하는 기업가 집단이나 시민단체와 결합하기도 했다. 그 조직의 뒤를 이은 오퍼레이션 푸시(Operation PUSH)와 기타 단체들은 계속해서 흑인들을 규합해 데일리 시장과 그 조직에 대항하고 그들을 방해했다. 1980년대초에 대대적인 선거인등록운동이 성과를 거두어 흑인공동체가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결과 흑인인 워싱턴이 시장에 당선될 수 있었고 대부분 비조직파인 흑인 민주당 시의원들이 시의회의 약 1/3을 구성했다.

주택

1960년대에 시카고는 전국에서 가장 인종차별이 심한 곳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데일리 시장은 이에 반박해서 시카고에 소수민족들의 빈민가가 없다고 큰소리쳤다. 이때부터 시의 행정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오랫동안 까다로운 부동산 규제관행이 지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흑인 거주지역은 외부로 확산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시의 사우스사이드와 웨스트사이드에 사는 백인 시민단체들과 '구역주민협의회'가 이를 격렬히 반대했다. 1980년대에 시카고 주택공사는 약 4만 5,000가구의 싼 임대주택을 건설했다.

이 주택계획은 주로 대규모 고층 아파트 건설사업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런 주택의 건설로 완화시키고자 의도했던 범죄, 사회적 소외를 비롯한 빈민가의 전형적 병폐들이 오히려 심화될 뿐 아니라, 인종차별과 사회적·경제적 차별을 신랄하게 보여주게 된다고 우려했다. 사우스사이드에 있는 일리노이공과대학 같은 사설기관은 개인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서 중산층 대상의 주택을 설계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시카고대학교 지역을 중심으로 한 통합적인 재개발, 보호사업, 사회 프로그램들은 변모해가는 도시권에 대응하기 위해 등장한 전형적인 정책이었다.

1971년에 시는 연방정부가 재정지원을 하는 도시계획사업에 참가하려 했지만 백인 밀집지구에 값싼 공동임대주택을 짓는 것을 꺼리는 행정당국의 반대에 부딪혔다. 뿐만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주택공정거래법에도 불구하고 많은 교외 거주인들도 그러한 주택사업을 반대했으며, 시의 주택사업 협력요청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교육

시카고 공립학교들에서 볼 수 있는 인종적 양상은 학교 주변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인종적 분포를 반영한다.

각 인종 사이의 조화를 이루려는 시도는 거의 없고 전국의 평균수준과 비교해볼 때 학업성취도도 낮은 편이다. 공립학교나 사립학교 모두 재정적 위기에 처해 있는데 이때문에 시와 주정부 사이의 정치적 갈등은 더 심해졌다. 사립학교는 미국의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가톨릭 교구의 학교들이다. 시의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오래 전부터 전국적으로 권위있는 대학교로 인정받아온 시카고대학교가 있다. 일리노이공과대학이나 노스웨스턴대학교도 전국적으로 유명하고, 로욜라대학교와 디폴대학교는 가톨릭 재단에서 설립한 주요 교육기관들이다.

노스웨스턴대학교 캠퍼스는 에번스턴에도 있고, 시카고에도 있다. 1945년에 설립된 루스벨트대학교는 시카고 중심부에 있는데, 특히 도시지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교과과정들을 갖추고 있다. 시카고 소재 일리노이대학교의 본교는 섐페인어배나에 있다.

보건

시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의학·치의학 교육지역이다.

병원시설과 의료연구시설은 매우 높은 수준이지만 전문인력 중 많은 사람들이 외지로 떠났기 때문에 시와 주 전체에 걸쳐 의료인력 부족현상이 나타난다. 다른 시와 마찬가지로 빈민들을 위한 의료혜택은 부족하다. 공공지원을 받는 쿡 군 병원은 전국적인 규모의 병원이다. 때때로 이곳까지 정치적·재정적 위기가 닥쳐 의료활동이 영향을 받는 경우도 있다. 한편 흑인과 스페인어 사용자들이 사는 지역에서 진료소를 운영하는 젊은 의사와 의학도들은 정치적 성격을 띤 공중위생국과 종종 마찰을 겪는다.

문화

시카고
시카고
예술활동

시카고는 시끄럽고 현란한 상업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견고한 예술적 기반을 확립하려는 노력이 역사적으로 계속 이어져왔다.

시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까지 주요극장가였고, 20세기초 할리우드가 개발되기 전에는 미국 영화산업의 개척지였다. 1950년대 세컨드시티 극단은 새로운 극적 기법들을 잇따라 창안했고 이런 기법을 익힌 감독과 배우들을 배출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굿맨 연극학교는 오랫동안 시카고 미술원에 속해 있었으나 1970년에 전문 상설회사를 설립해서 독립했다. 이어 1978년에 디폴대학교의 8개 단과대학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주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구역에는 전위예술단체들이 있다. 시와 교외에 있는 '극장식 식당'들에서도 예술적인 찬사를 받는 작품들이 공연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카고 교향악단의 명성은 1969년 숄티가 지휘자로 임명된 이후 더욱 확고해졌다. 소규모라도 정기적으로, 그리고 잘 다듬어진 오페라 공연을 선보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1954년 리릭 오페라단이 설립되었고, 그에 힘입어 시의 오페라 공연도 다시 활성화되었다.

〈시 Poetry〉가 발간되기 시작한 20세기초에 시카고의 문학적 명성은 최고조에 달했다. 시카고는 재능 있는 작가들도 많이 배출했지만 신문·잡지의 발간에 있어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전원적이고 친근한 중서부식의 설교지에서부터 사회적·정치적 쟁점을 예리하게 다루는 잡지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시의 미관을 지키려는 보존주의자들과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시의 아름다운 유산은 무관심 때문에 파괴되고, 보다 수익성 높은 무미건조한 건물들만 늘었다. 1971년에 루이 설리번 주식거래소가 철거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건축학적 가치를 지닌 옛 건물들을 지키려는 노력도 점차 늘어 많은 건물들이 복원되거나 새로운 기법으로 개축되었다.

시카고 미술원은 회화·조각·판화·사진·수공예품 등 다양한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세계적인 박물관이다. 부속학교는 순수예술을 교육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현대미술관에는 첨단 예술기법들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시민들에게 새로운 조류에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지역 예술가들은 물론 국내외적으로 명성을 지닌 예술가들까지 작품을 출품하는 상업적 화랑들도 있다. 미국 내에서 시카고의 과학·산업 박물관의 전시품들에 필적할 수 있는 것은 워싱턴 D. C.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협회의 소장품들뿐이다. 일반에게 소장품을 개방하고 공공탐사활동을 벌이는 필드 자연사박물관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과학연구소이다. 가까이에 존 G. 셰드 수족관과 애들러 천문관이 있다.

오락

시 주위와 쿡 군 교외에는 삼림보호지구가 있다.

미시간 호를 따라 간헐적으로 이어진 모래해변은 여름 휴양지로 유명하다. 야구·하키·미식축구·축구·농구 등 전문 프로 스포츠는 시민들의 열광적 지지를 얻고 있다. 니어노스사이드에는 나이트 클럽과 카바레들이 있는데 시민들과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대중매체

시는 〈시카고 트리뷴 Chicago Tri-bune〉·〈시카고 선 타임스 Chicago Sun-Times〉 등 대도시권을 대상으로 하는 일간지 2개를 갖고 있다.

〈시카고 디펜더 Chicago Defender〉는 주로 흑인들을 대상으로 한다. 교외에서 발행되는 신문·주간지·월간지, 외국어로 된 일간지·주간지 등도 많다. 〈시카고 코머스 Chicago Commerce〉·〈크레인스 시카고 비지니스 Crain's Chicago Business〉는 경제와 금융계 소식을 다룬다. 정기간행물인 〈시카고 Chicago〉는 일반기사, 지방소식, 연예계 동향 등을 싣는다. 시에는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국들도 여럿 있다.

공영방송사인 WTTW는 미국에서 최초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한 방송사들 중 하나이다.

역사

정착과 개발

1673년 프랑스의 탐험가인 루이 졸리에와 자크 마르케트는 인디언들이 이용하던 연수육로를 따라 Y자형의 강이 흐르는 지역에 도달했다.

강은 미시간 호로 흘러들어가고, 주변은 진흙 토양이었다. 강줄기는 미시시피 강 수계의 유역분지까지 이어져서 사실상 북아메리카의 큰 수로 2개를 연결해주고 있었다. 18세기 내내 덫사냥꾼·무역상인·투기꾼들이 드나들면서 수송로와 물품교역소로 이용되었다. 이곳에 정착한 최초의 비(非)인디언은 장 바티스트 푸앵 사블(또는 푸앵트 뒤 사블)로 알려져 있다.

그는 1770년대에 오대호 지방에 정착했다. 1795년 강어귀에 있는 15.3㎢의 땅이 미국 소유지로 되었다.

1803년 디어번 요새가 세워졌으나 인디언의 습격으로 1812년 파괴되었다. 이 습격으로 민간인과 군인 가운데 단 1명만이 살아 남았다. 요새는 1816년에 재건되어 1830년대까지 존속했다. 요새의 담 바깥쪽에는 무역상인들이 지은 판잣집이나 오두막이 몰려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정착하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1818년 정식으로 일리노이 주가 성립된 뒤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1825년에 이리 운하가 개통되어 대서양과 오대호가 이어지게 되자 서부로 가는 경로가 오하이오 강에서 더 북쪽으로 이동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카고는 서부 교통로의 기점이 되었다. 쿡 군은 작은 지역사회에 군청소재지를 세웠고, 연방 국유지관리국도 그곳에 사무실을 열었다. 갓 서부로 온 사람들을 상대로 소매상점이 많이 생겼고, 동부 지방의 시장에 내다 팔 모피와 모피제품들도 늘었다.

1837년 이곳이 시가 되었을 때 인구는 약 4,200명이었다. 1848년 일리노이-미시간 운하가 완성되어 오대호와 미시시피 강 수계가 연결되자, 수로의 관문으로 이용되기에 적합한 시의 지리적 이점이 더욱 강하게 부각되었다. 1852년에 동부와 시카고를 잇는 철도가 잇따라 건설되었고, 1856년에 시카고는 전국적인 철도 중심지가 되었다. 도심에서 방사형으로 뻗은 간선철도들을 잇는 환상철도가 1856년에 건설되었다. 이어서 시 외곽에 사는 사람들과 교외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통근열차의 운행이 시작되었다.

급격한 경제성장

철도건설을 기반으로 산업활동이 활발해져, 1850년대 어퍼미시간 지역에서 생산되는 철광석들이 배를 통해 시카고의 용광로로 운반되었다.

1880년대에 시카고는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제재목 보급지가 되었다. 철도를 이용해서 서부와 남부 지방으로부터 농작물이 운송되어왔고, 시카고 상품거래소는 생필품 거래의 중추 조직이 되었다. 소·돼지·양 등도 철도를 통해 시카고로 운반되어 도살·가공되었다. 합병회사인 시카고연합가축수용소가 9개의 철도회사와 시에 있는 다른 여러 가축수용소의 자본으로 1865년 크리스마스에 문을 열었다.

시카고는 미국 중서부 지방의 중심도시로 도약했다. 1880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거주인구는 50만 명 이상으로, 이는 1850년 수치의 17배에 달하는 것이다. 1870년경 시의 인구는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시의 인구를 웃돌았다. 1860년 공화당 전국집회가 시카고에서 열렸고, 일리노이 주 출신인 에이브러햄 링컨이 이 집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다. 시카고의 공장에서 일하려는 이주민들이 미국의 다른 지역과 북부 유럽에서 철도편으로 계속 몰려들었다. 1871년 10월 8~10일에 계속된 화재로 상업지구를 포함한 10㎢의 시가지가 파괴되었다(시카고 화재). 불은 남서쪽에서 발생해 목조건물과 도로를 타고 옮겨갔는데 오랫동안 건조기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쉽게 번졌다.

불길은 북동쪽으로 번져 시카고 강을 지나 미시간 호에 이르러서야 꺼졌다. 이 화재로 약 250명이 죽었고, 9만 명가량이 집을 잃었으며 재산 피해액은 거의 2억 달러에 달했다.

시의 재건과 시민

화재에도 불구하고 상수도·하수시설·교통시설 등 시의 물리적 기본설비들은 많이 남아 있었다.

시카고는 이전과 비슷한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그러나 건물들은 한결 현대적이었고, 새로운 화재예방 법규에 맞추어 건설되었다. 중앙의 상업지구에는 대형 백화점들, 대규모 은행들, 상업회의소, 신흥공사의 지국, 상업 중심지, 법률 중심지, 행정본부 등이 들어섰다.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이 지역에 건축되었다(마천루). 1885년에 홈보험회사 건물이 완성된 후 9년 동안 12층에서 16층에 이르는 21개의 건물들이 시 중심가를 메워나갔다.

통근철도·마차·케이블카·시가전차·고가고속도로 등이 루프에 등장했다. 제2차 유럽인 이주가 한창일 때 많은 노동력이 유입되었다. 이주민들은 러시아계 유대인, 이탈리아인, 폴란드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보헤미아인, 기타 남부 및 동부 유럽인 등이었다. 1890년과 1900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시카고 인구의 3/4이 이주민과 그들의 자녀들이었다.

초기의 노동운동은 산업근로자들을 조직화하려는 몇 차례의 시도로 표면화되었다.

1886년에 발생한 헤이마켓 사건으로 노동자와 경관들이 죽었다. 1894년에는 선두적인 노동조합 조직자인 유진 V. 데브스와 몇몇 선동가들이 풀먼팰리스차량회사를 상대로 파업을 주도했다. 제인 애덤스와 웨스트사이드의 헐 하우스 거주지에 있는 애덤스의 지지자들은 그곳의 비참한 주거환경과 보건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1889년에 시카고는 미국에서 2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되었다.

1900년 무렵에는 경제·사회범죄·사회개혁·이민·교육·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 최고의 도시로 손꼽히게 되었다.

시 병합의 특징

시카고의 특징을 형성시킨 주된 계기는 1909년에 시행된 '시카고 플랜'이었다(도시계획). 대니얼 H. 버넘과 에드워드 H. 버넷은 금세기에 시카고가 지니게 될 모습의 일반적 윤곽을 세우고, 시의 공업과 상업을 주도하는 지도계층의 의견을 참고해서 이 미래지향적인 계획을 마련했다.

이 계획은 1893년 아메리카 대륙발견 400주년을 기념해 열렸던 콜럼버스 국제박람회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 그 박람회 이후 시카고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도시계획사업이 활발해졌다. 도시미화운동이 오랫동안 전개되었고, 시카고는 건축혁신의 중심지가 되었다.

루이스 설리번,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헨리 H. 리처드슨 등에 의해 유명한 건물들이 세워졌다(시카고파). '버넘 플랜'이라고 하는 시카고 도시계획의 영향으로 다른 분야의 개발도 활기를 띠었다. 미시간 호를 따라 연안해변·대로·유람선선착장 등을 갖춘 공원지역들이 생겼고, 시 가장자리를 둘러싼 삼림보호지대도 조성되어 휴양지로 이용되었다. 시민회관, 시카고 강가의 중심가에 있는 2층 가로수길도 이때 생겼다.

20세기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산업발달과 번영이 계속 이어졌고, 새로운 정착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인구성장은 차츰 더디어졌고 1929년 주식시장의 몰락 이후에는 인구성장률도 낮아져 1940년의 인구는 약 340만 명이었다. 인구성장이 둔화된 이유는 시카고에 대한 나쁜 인식이 세계적으로 널리 퍼지고, 1930년대의 대공황, 경제계와 정치계에 파고 든 강력한 범죄조직의 영향 때문이었다. 반면 교외의 인구는 급속히 늘었다. 사무실은 여전히 도심에 집중되어 있으나 인구, 도·소매업, 유흥업 등에 있어서 교외지역은 급성장했다. 1970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시의 인구가 대도시권 전체인구의 절반도 못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