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펜서

스펜서

다른 표기 언어 Edmund Spenser
요약 테이블
출생 1552/53, 런던
사망 1599. 1. 13, 런던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영국의 시인.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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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청년시절과 교육
  3. 초기작품
  4. 아일랜드 시절
  5. 〈요정 여왕〉과 말년

개요

긴 우화시 〈요정 여왕 The Faerie Queene〉은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개신교와 청교도 정신을 옹호하고 영국과 엘리자베스 여왕을 찬양한 작품이다.

이 시의 형식은 후에 스펜서식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청년시절과 교육

스펜서에 대해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목양업으로 재산을 모은 중부지방의 귀족 스펜서가의 친척이었으며, 이 가문에 속한 케어리 부인, 콤프턴, 스트레인지 세 사람에게 시를 헌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집은 부유하지 못해서, 영어를 문어로 존중한 진보적 사상가 리처드 멀캐스터가 교장으로 있던 머천트 테일러스 그래머 스쿨에 가난한 소년으로 입학했다. 여기서 주당 45시간의 수업을 받으면서 주로 라틴어를 공부하고 히브리어·그리스어·음악도 약간씩 공부했다. 16세 무렵이던 1569년에 그가 16세기 프랑스 시인 조아생 뒤 벨레의 시를 영역한 것과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의 프랑스어판 시를 번역한 것이 산문으로 된 반(反)가톨릭 소책자 〈속물들을 위한 극장 The Theatre for Worldlings〉의 서두에 실렸다.

이 번역시들은 이 책자의 주요저자로서 플랑드르에서 추방된 부호 얀 반 데르 누트의 청탁을 받고 쓴 것이 분명하다. 이 시 가운데 일부는 나중에 개작되어 시집 〈고소장 Complaints〉에 실렸다.

스펜서는 1569년 5월 케임브리지대학교 펨브로크홀(지금의 펨브로크 칼리지) 학생이 되었다. 학비를 다 낼 능력이 없어서 학교에서 지시한 잡일을 하면서 공부하는 근로장학생에 속했는데, 이러한 부류는 전체 학생의 1/4 정도였다.

1570년의 교칙에 따라 스펜서의 일과는 새벽 5시에 시작해 저녁 8,`9시에 끝났으며, 예배와 강의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했다. 1573년에 문학사학위를 받았으며 이를 위해 고대 수사학·논리학·철학의 대가들이 쓴 글을 라틴어로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석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그리스어와 문학, 산술, 기하학,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공부했을 것이다. 역병에 걸려 1574년 케임브리지를 사실상 떠났으나, 1576년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다.

케임브리지 시절의 가장 잘 알려진 친구는 나이가 약간 더 많은 펨브로크 동급생 가브리엘 하비였다.

유식하고 재치 있으며 고대 및 당대 문학에 흠뻑 빠져 있던 하비는 자신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권력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은 현학적이고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스펜서가 이러한 성품의 가장 혐오스러운 부분을 공유했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없지만, 사회적 신분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던 당시의 분위기로 미루어볼 때 튜더 왕조의 새로운 귀족계급들 가운데 끼어 있던 스펜서가 신분상승을 꿈꾼 것은 놀라운 일이 못된다.

스펜서는 생애의 몇몇 시기에서 자신의 욕구와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해 좌절한 적이 있는 듯하나 이러한 좌절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 같지는 않다.

케임브리지 시절은 라틴 고전과 그리스 고전의 일부뿐만 아니라 이탈리아·프랑스 문학과 당대·고대 영문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쌓은 중요한 시기였다. 서정시와 설화시(narrative poem)의 전통적 형식과 주제에 대한 지식을 쌓음으로써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형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로마의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Aeneid〉, 15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 Orlando Furioso〉, 토르콰토 타소의 〈예루살렘 해방 Gerusalemme liberata〉(1581)이 없었더라면 스펜서의 영웅서사시 〈요정 여왕〉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또 베르길리우스의 〈목가 Bucolics〉를 비롯해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이어져온 전원시의 전통이 없었다면 그는 〈양치기의 달력 The Shepheardes Calender〉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극히 전통적인 라틴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 결혼 송가나 페트라르카와 후세 소네트 시인들의 소네트·칸초네 형식이 없었다면 스펜서의 가장 뛰어난 서정시 〈결혼축가 Epithalamion〉와 그에 딸린 소네트 〈아모레티 Amoretti〉는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의미구조는 그리스·로마 시대와 스펜서 시대를 거치면서 발전된 이교도의 신화·신·철학에 대한 전통적 해석과, 그리스도교 신앙 및 교리에 대한 강렬한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중세와 당대의 이야기·전설·민담을 작품에 이용함으로써 이러한 구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스펜서가 받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은 종교훈련이었다. 새로 탄생한 영국성공회가 로마 가톨릭과 극단적인 청교도주의 사이에서 취해야 할 노선을 두고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벌어진 격렬한 논쟁에 스펜서도 조금이나마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전의 견해와는 달리 그가 청교도 쪽으로 기울었다고 하는 것은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

그가 맡은 최초의 직책으로 알려진 것은 1578년 케임브리지대학교 펨브로크홀의 전임학장인 존 영 로체스터 주교의 비서직이었다. 최초의 중요한 출판물 〈양치기의 달력〉(1579/80)은 그 뒤의 작품들보다 영국성공회의 주교와 성사(聖事)에 더 깊이 관련되어 있다.

초기작품

〈양치기의 달력〉은 영국 문예부흥에 불을 당긴 최초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베르길리우스와 많은 후세 시인들의 예를 따라 스펜서도 대개 목가적인 대화 형식으로 된 짧은 '전원시' 연작을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목가문학). 이러한 시에서는 순박한 양치기로 가장한 여러 등장인물이 매끄럽게 다듬어진 다양한 운문형식을 빌어 삶과 사랑을 논함으로써 당대의 문제들에 대해 유력하고, 때로는 풍자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이 전원시가 양치기의 소박하고 한적한 삶과 그들이 상징하거나 거론하는 인물(또는 독자)의 약아빠진 세속적 야심을 역설적으로 결합시킨 것은 현대 문학비평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때때로 흠으로 지적되는 고어체는 초서처럼 옛 영시 전통을 잇겠다는 소망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의 후기작품에서는 고어가 그전처럼 많이 사용되지 않는다.

1578~80년의 2년간은 스펜서의 삶에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1580년에는 매혹적이고 방자한 권력자인 레스터 백작의 시중을 들면서 그의 조카 필립 시드니 경이 이끄는 문학모임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스펜서는 〈양치기의 달력〉을 시드니에게 헌정했고, 시드니는 그의 중요한 비평서 〈시의 변호 An Aplogie for Poetrie〉(1595)에서 스펜서의 시를 칭찬했다. 스펜서는 뛰어난 문인인 동시에 훌륭한 귀족인 그를 평생 존경해 자신의 시 속에 여러 인물로 등장시켰고, 그의 요절을 슬퍼하는 애가를 쓰기도 했다. 1580년경에는 〈요정 여왕〉을 쓰기 시작했으며, 그 전해에는 매커비아스 카일드라는 여성과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1578년 런던에서 가브리엘 하비를 만났을 때 그에게 영어 유머집 4권을 주면서 이듬해 1월 1일까지 그 책들을 전부 읽지 않으면 루키아노스의 그리스어 재담집 4권을 자기한테 넘겨줘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는 일화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스펜서의 독특한 성격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하비의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스펜서는 그에게 한 소책자를 건네주면서 외국여행을 권하며 나폴리의 모습을 자세히 묘사하고 실제로 도움이 되는 조언도 했다고 하지만 스펜서가 외국여행을 한 적이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뒤의 기록을 보면 1580년경 스펜서는 유행을 따르는 한량생활을 하면서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동경했던 것 같다. 1579년에 하비에게 보낸 라틴어 자작시는 스펜서가 레스터 백작의 업무로 프랑스에 가는 일을 맡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면서도 미칠 듯이 사랑하는 한 여성을 영국에 홀로 남겨두기가 내키지 않아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하비라면 자기처럼 사랑이 야망을 가로막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편지와 함께 보낸 다른 편지 1통도 공개되었는데, 그것은 자기가 시드니에게 작품을 헌정했을 때 시드니가 작품을 탐탁지 않게 여길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표명하는 내용이다. 하비와 스펜서가 주고받은 편지는 너무 난해해서, 스펜서의 신상에 대해 그가 젊고 야심만만하며 학식이 높고 시의 이론과 창작에 관심이 깊다는 것 외에는 알기 어렵다. 1580년에는 마침내 시드니가와 친분이 있는 신임 아일랜드 총독 아서 로드 그레이의 비서가 되었다.

아일랜드 시절

16세기에 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인은 영국의 식민지로 천대받았다.

게다가 가톨릭의 적국인 스페인의 침략 위협, 위압적인 영국성공회와 퇴폐적이었던 초기 아일랜드 가톨릭 사이의 대립은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아일랜드 족장과 멀리 노르만 정복에 그 기원을 둔 영국계 아일랜드 귀족들은 토착민들을 부추겨 새로 도착하는 영국인 관리와 지주들한테 저항하게 했다. 그레이의 비서로 있는 동안 스펜서는 일상적인 여행뿐만 아니라 위험한 군사행동에서도 총독을 수행했다.

그러나 스펜서에게 아일랜드는 결코 유배지가 아니었다. 그는 그 국민과 경치를 비롯해 아일랜드라는 나라에 깊은 애착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아일랜드의 경치에 대한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감흥, 그에 못지않게 강하게 느껴지는 아일랜드의 미개함과 무질서에 대한 혐오를 여러 번 시로 표현했다. 그레이가 취한 직접적이고 과감한 행정조치와 여왕 특유의 미온적인 태도가 충돌하는 바람에 스펜서는 기대에 어긋나게 곧 본국으로 소환당했다.

그러나 스펜서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레이의 방법을 존경했다. 그뒤에 쓴 소책자 〈아일랜드의 현상태에 대한 견해 A View of the Present State of Ireland〉(1595~96, 출판 1633)는 철저하게 복종하는 시민에게만 관대하면서 일관된 강경조치를 취하는 전형적인 16세기식 통치론을 명쾌하게 옹호한 글이다.

1584년 무렵부터 4~5년간 스펜서는 친구 로더윅 브라이스킷을 대신해 아일랜드 최남단 지역인 먼스터 주 총독의 서기로서 아일랜드에서 2번째 공직을 수행했다.

그곳에서 일한 대가는 상당하여 누군가가 몰수당한 토지의 처분을 비롯한 몇 가지 특혜와 명예직을 얻었다. 한동안 그는 킬데어 군(郡) 뉴애비에서 약간의 땅을 임대해서, 이를 기반으로 처음 '젠트리' 대열에 끼었고 마침내 먼스터에 그보다 넓은 토지를 장만할 수 있었다. 전쟁과 기근이 할퀴고 지나간 이 지역 통치자들의 주요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이곳에 다시 사람을 거주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영국인 '점유자'들에게 대규모 경작지를 주고, 다양한 직업의 영국인들로 농장을 채워 자급자족할 수 있게 하는 임무를 맡겼다. 1588(또는 1589)년에 스펜서는 코크에서 북쪽으로 약 40㎞, 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킬콜먼에 있는 3,000에이커 규모의 농장을 넘겨받았다. 이때 아들과 딸,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면 아내(1594년에 죽었다고 알려짐)까지 그곳으로 데려왔을 것이 분명하다. 이 토지를 손에 넣음으로써 스펜서는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게 해준 모국의 북적거리는 땅덩어리에서 권력과 높은 지위를 찾는 것보다, 어느 면으로 보나 기회가 풍부한 식민지에서 상류층으로 도약하는 쪽을 택했다.

다른 점유자들과 마찬가지로 스펜서도 그 지역에서 옛 영국계 아일랜드 귀족을 대표하던 모리스 로드 로시와 충돌이 잦았다. 게다가 영국인들로 농장을 채우는 일도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무적함대의 패배(1588) 이후에도 스페인의 침략 가능성은 매우 높아보였으며, 아일랜드인들의 봉기 위험은 10년 뒤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지배가 정당한가 또는 지속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떠나서, 스펜서가 그의 최고 걸작시를 완성한 것은 이러한 상황 덕분이기도 했다.

〈요정 여왕〉과 말년

현재 전해지고 있는 〈요정 여왕〉은 6권과 〈Mutabilitie Cantos〉로 알려져 있는 미완성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격인 편지 형식의 글에 따르면, 원래 이 작품은 글로리아나 여왕의 기사 중 한 사람의 모험을 12권으로 구성할 계획이었다(서사시). 다른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스펜서도 작품구상을 여러 번 수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 편지 글은 현존하는 각 권의 갖가지 줄거리의 세세한 부분과는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한 단계에서 스펜서가 어떤 구상을 하고 있었는지를 꾸밈없이 보여준다.

실제로 출판된 이야기는 성(聖 : 붉은 십자가 기사)·절제(가이언 경)·순결(여자 기사 브리토마트)·우정(트리아몬드와 캄벨로로 추정)·정의(아티갈)·예절(캘리도어)을 다룬 것이다. 그 배경으로 요정의 나라와 글로리아나 여왕을 만들어냈다. 자신의 독창성을 드러내기 위해 약강 5보격 8행과 약강 6보격 1행을 합해 총 9행으로 이루어지며, 압운 형식은 ababbcbcc인 시형을 처음 시도했다(스펜서식연). 이 작품을 통해 스펜서는 거장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배경·음악·운율·줄거리가 모두 시의 깊은 속뜻과 조화를 이루고 색채, 상징, 전설, 민담, 신화적 암시를 통한 도덕적 전언(傳言)은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본능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는 스펜서의 농장 동쪽에 대토지를 소유한 월터 롤리 경의 도움으로 출판되었다. 1589년 킬콜먼에서 알게 된 두 사람은 서로의 시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스펜서의 글을 보면, 롤리는 스펜서에게 자기와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가 〈요정 여왕〉의 완성된 부분을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보여줄 것을 권한 듯하다.

이 일화에 얽힌 이야기는 〈콜린 클라우츠 다시 집에 돌아오다 Colin Clouts Come home againe〉에 매혹적으로 기록되어 있다(엘리자베스 시대 문학). 이 작품도 순박한 시골뜨기와 세속적인 권력가의 대립을 목가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한 스펜서의 수작 가운데 하나로서, 피상적인 거짓사랑과 조화로운 세상에 생기를 불어넣는 참사랑에 대해서도 고찰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여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의 지원을 업고 런던에 도착한 스펜서는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요정 여왕〉의 첫 3권은 여왕에게 바치는 헌사뿐만 아니라 궁정의 명망가들을 칭송하는 소네트와 함께 1590년에 어엿하게 출판되었다. 스펜서는 책이 인쇄기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서둘러 아일랜드에 갔다가 곧장 런던으로 돌아왔는데, 이는 자기가 높은 직위를 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던 듯하다. 이무렵 그는 또다른 시들을 모아 〈고소장〉이라는 시집을 펴내는 작업을 주관했다.

여기 실린 시는 대부분 이전에 쓴 것인데, 새로 발표한 영웅시가 대성공을 거두자 이에 편승하여 출판 준비를 한 것 같다. 일찍이 언급된 적이 있으나 나중에 없어져버린 여러 제목의 시는 잘 알려진 작품 속에 다른 제목과 변형된 형태로 포함되어 출판된 것으로 보인다. 〈고소장〉의 잡다하고 고르지 못한 성격으로 보아 스펜서는 자기가 짜낼 수 있는 것을 남김없이 짜내어 서둘러 작품화한 인상을 풍긴다. 그래서 〈고소장〉에는 초기의 번역시와 비가, 유쾌한 의사(擬似)영웅시 〈뮈오포트모스 Muiopotmos〉 등이 실려 있다.

또다른 수록작품인 동물우화 〈프로소포포이아, 허버드 아주머니 이야기 Prosopopoia, or Mother Hubberd's Tale〉가 버를리 경을 노골적으로 비난한 까닭에 당국에서 1592년경에 아직 팔리지 않은 책들을 회수했다. 스펜서는 버를리의 막강한 권세가 자신을 비롯한 유능한 인재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여긴 듯하다. 그러나 1591년 여왕은 스펜서에게 약간의 종신연금을 하사했다.

아일랜드로 돌아와서는 농장 운영의 부담이 있었으나 글쓰기에 열중해 1595년초 〈아모레티〉와 〈결혼축가〉를 출판했다.

〈아모레티〉는 소네트 연작이고 〈결혼축가〉는 열렬한 구애 끝에 1594년 엘리자베스 보일과 2번째로 결혼하게 된 것을 자축하는 결혼송가이다. 이 부류의 시는 결혼으로 끝맺는 성공적인 사랑을 찬양했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시대 소네트 연작 중 독특한 것이다. 그해 스펜서는 〈요정 여왕〉 제4·5·6권을 포함한 다수의 작품 출판을 감독하느라고 또다시 런던에서 바쁜 나날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갑자기 많은 출판을 한 것이 그의 생애 마지막 일이었다.

1598년의 아일랜드 봉기가 먼스터까지 번진 것이 스펜서의 요절을 재촉했는지도 모른다. 영국인 토지점유자들과 영국 지지파는 봉기에 대처하지 못했다. 킬콜먼은 불탔고, 스펜서는 추밀원으로부터 코크의 사법장관이라는 요직에 임명되었으면서도 희망이 없음을 느끼고, 절망적인 상태를 전하는 주 총독의 공식서한을 런던에 전달했다. 그곳에서 숨을 거둔 스펜서는 정중한 예우기 갖추어진 속에서 웨스트민스터 대사원 제프리 초서의 묘 가까이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