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시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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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54. 11. 30, 잉글랜드 켄트 펜스허스트
사망 1586. 10. 17, 네덜란드 아른헴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엘리자베스 시대의 궁정신하·정치가·군인·시인.

시드니(Sir Philip Sidney)
시드니(Sir Philip Sidney)

학자와 시인들을 후원하기도 했으며 당대의 이상적인 신사로 여겨졌다.

〈아스트로펠과 스텔라 Astrophel and Stella〉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다음 가는 엘리자베스 시대 최고의 소네트 연작으로 평가받는다. 〈시의 변호 The Defence of Poesie〉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비평개념을 영국에 소개했다(엘리자베스 시대 문학).

헨리 시드니 경과 노섬벌랜드 공작의 딸인 메리 더들리 부인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으며,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대부였다.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에 오른 뒤 아버지는 웨일스의 지방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그뒤 아일랜드 총독을 3번 역임했음), 외삼촌 로버트 더들리는 레스터 백작의 작위를 받고 여왕에게 가장 신임받는 고문관이 되었다. 그러한 집안배경에 걸맞게 시드니는 어려서부터 정치가와 군인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으며 10세 때 슈루즈버리 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만난 동급생 풀크 그레빌은 뒷날 엘리자베스 여왕의 궁정관리가 되었는데 평생 친구로 남았으며 처음으로 그의 전기를 썼다.

1568년 2월부터 3년간 옥스퍼드대학교의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서 공부했으며, 그뒤 1572년 5월부터 1575년 6월까지 유럽을 여행하면서 라틴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에 대한 지식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그뿐만 아니라 유럽의 정치를 직접 몸으로 배우고, 유럽의 많은 정치지도자들과 안면을 익혔다.

1576년 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연회에서 여왕에게 술을 따르는 의전관에 임명됨으로써 궁정관리 생활을 시작했다.

그뒤 1577년 2월에는 불과 22세로 독일 황제 루돌프 2세와, 왕권과 동등한 권한을 가진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 루이스 6세에게 특사로 파견되어, 두 사람의 부친상에 대한 엘리자베스 여왕의 조의를 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식 임무와 더불어, 프로테스탄트 동맹 결성에 대한 독일 제후들의 의중을 떠보라는 비밀지시도 받았다. 프로테스탄트 동맹은 영국이 유럽의 다른 프로테스탄트 국가들과 손잡음으로써 로마 가톨릭 강대국인 스페인의 위협을 막아내려는 중요한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

시드니는 그러한 동맹 결성이 가능하다는 낙관적인 보고서를 갖고 돌아왔으나, 조심성이 많은 여왕은 다른 특사들을 보내 그의 보고서를 확인하게 했다. 그들은 시드니의 보고에 비해 별로 낙관적이지 않은 결론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 일로 시드니는 8년 동안 주요관직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영국의 정치·외교 분야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1579년에는 프랑스 왕위를 계승한 로마 가톨릭교도인 앙주 공작과 결혼하라는 제안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는 편지를 남몰래 여왕에게 보냈다. 또 1581, 1584~85년에는 켄트 지방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외국 정치인들과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귀빈들의 방문도 받았는데, 1577년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사절 필립 드 모르네, 1578년에는 독일의 칼뱅교도 제후인 카시미르, 1581년 포르투갈 왕을 사칭하는 돔 안토니오, 그뒤에도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당시 새로 발견된 아메리카 대륙에 관심을 가진 몇 안 되는 영국인 가운데 하나로서, 해양탐험가인 마틴 프로비셔 경이 해상 탐험길에 나서도록 지원했다. 1582년 영국 탐험가들의 모험기를 펴낸 리처드 해클루트는 자신의 책 〈아메리카 발견에 이른 여러 해양탐험 Divers voyages, touching the discoverie of America〉을 그에게 헌정했다.

그뒤에는 월터 롤리 경이 제안한 버지니아 식민지 건설안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과 함께 스페인 군대와 맞서 싸울 원정군으로 떠날 계획까지 세웠다. 학문과 예술에 폭넓은 관심을 갖고 있어서 화가 니콜라스 힐리아드와 예술을, 과학자 존 디와 화학을 논했으며 학자와 문인들을 많이 후원했다. 40편이 넘는 영국과 유럽 작가들이 신학, 고대사와 근대사, 지리학, 군사, 법률, 논리학, 의학, 시 분야의 작품들을 그에게 헌정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폭넓은 분야에 관심을 가졌는지를 말해준다.

그에게 후원을 부탁한 시인과 산문작가로는 에드먼드 스펜서, 토머스 윗슨, 에이브러햄 프론스, 토머스 로지 등이 있다.

시드니는 승마에도 뛰어나서, 절반은 체육경기이고 절반은 상징적인 쇼로 많은 준비가 필요한 궁정의 주요오락인 마상시합에 참가해 이름을 날렸다. 그는 영웅답게 살아가기를 무척이나 원했으나 실제로 맡은 공식 활동은 궁정에서 여왕 시중을 든다거나 여왕이 지방에 행차할 때 수행하는 의례적인 일이 대부분이었다.

1585년 1월 기사작위를 받았는데, 이는 무슨 뛰어난 업적 때문이 아니라 가터 훈장을 받기로 된 그의 친구 카시미르 제후가 훈장 수여식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시드니가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자격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해 9월 엘리자베스 여왕 당시의 국무장관 프랜시스 윌리엄 경의 딸 프랜시스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슬하에 딸 엘리자베스를 두었다.

여왕이 그에게 중요한 직책을 맡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활동력을 쏟아놓을 배출구로 문학을 택하게 되었다.

1578년 여왕에게 바치는 목가적 촌극 〈5월의 여왕 The Lady of May〉을 썼다. 1580년 무렵에는 영웅시풍의 산문 로맨스 〈아케이디아 Arcadia〉를 완성했다. 초연한 체하는 자신의 신사다움을 과시하기 위해 스스로 이 작품에 대해 "시시한 작품이라서 아무렇게나 굴려도 괜찮다"고 했지만, 실제로 이 작품은 복잡한 구성의 이야기체로 어휘만도 18만 단어에 이른다.

1581년초 숙모 헌팅턴 백작부인이 피후견인 퍼넬러피 데버루와 함께 궁정에 왔는데, 그녀는 그해말 젊은 리치 경과 결혼했다. 얼마 뒤 시드니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으며, 1582년 여름 〈아스트로펠과 스텔라〉라는 소네트 연작을 써서 처음으로 느껴본 격정, 그것을 눌러보려는 자신과의 싸움, 마침내 구애를 포기하고 그대신 공직이라는 '대의'에 몸바치기로 한 결심 등을 설명했다.

재치가 넘치면서도 담담한 이 소네트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시를 다시 꽃피웠다. 거의 같은 무렵에 쓴 〈시의 변호〉는 상상으로 지어낸 허구가 가진 사회적 가치를 세련된 웅변조로 변호한 글로서, 엘리자베스 시대 최고의 문학비평서이다.

1584년 〈아케이디아〉를 완전히 개작하여 직선적인 극적 구성을 복잡한 구성요소, 서로 얽혀 있는 서술로 바꿔놓았다. 이 개작은 절반밖에 완성하지 못했지만 16세기에 영어로 씌어진 가장 중요한 산문 창작물로 꼽힌다. 그밖에 다른 시들도 썼으며, 나중에는 시편을 알기 쉽게 고쳐 쓰는 작업도 시작했다. 그는 그 자신이나 가까운 친구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작품을 썼으며, 상업주의를 멀리한다는 신사의 규범에 어긋나지 않게 생전에는 작품의 출판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케이디아〉의 미완성 개작은 1590년에 인쇄본으로 나왔다.

또 1593년에는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3권 짜리에 원래의 작품을 집어넣어 완결한 다른 판이 나왔다. 〈아스트로펠과 스텔라〉는 1591년 오류투성이인 채 출판되었으며, 〈시의 변호〉는 1595년, 작품 전집은 1598년에 출판되었는데 전집은 1599년 재판을 찍은 이후 17세기에 9번이나 판을 거듭했다.

1585년 7월 그토록 원하던 공직에 임명되었으나, 뒷날까지 남은 업적은 공직활동이 아니라 작품이었다.

그는 숙부인 워릭 백작과 함께 영국 군수품 조달을 책임지는 병참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해 11월 여왕은 주위의 설득에 넘어가, 스페인 통치에 저항해 싸우는 네덜란드를 돕기 위해 레스터 백작이 이끄는 군대를 보냈다(스페인령 네덜란드). 시드니는 플러싱이라는 지방의 통치권과 기병대 지휘권을 얻었다. 그러나 그뒤 11개월 동안 스페인 군대와의 싸움은 별 전과를 올리지 못했고, 시드니는 형편없는 처우를 받고 있는 부대원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도록 갖은 애를 썼다.

그는 장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왕이 병사들에게 급료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수비대를 잃게 될 것이라고 썼다. 그러나 그는 현명하고 줏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할 일을 하지 않을 때도 불평 없이 자신의 본분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심이 흔들리는 법이 결코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1586년 9월 22일 그는 스페인 군대가 쥐트페 시내로 군수물자를 들여보내지 못하도록 막아내는 작전에 자원해서 참가했다. 보급열차는 경비가 철통 같았고, 영국군은 수적으로 열세였다. 그러나 시드니는 적의 방어선을 뚫고 3번이나 돌격했으며, 허벅지가 총에 맞아 갈기갈기 찢겼는데도 말을 타고 전장에서 나왔다.

아른헴으로 후송되었으나 상처가 악화되자 경건하게 죽음을 맞을 준비를 했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그 속에서 기쁨을 맛보며 헤어나지 못한 덧없는 사랑이 기억 속에 떠올랐다. 그 사랑은 리치 부인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거기에서 벗어나 진정한 기쁨과 안식을 되찾았다."

1587년 2월 16일 전통적으로 훌륭한 귀족을 위해 마련되는 성대한 장례식이 거행된 뒤 런던의 세인트폴 대성당에 묻혔다.

옥스퍼드·케임브리지 대학교와 유럽 전역의 학자들은 그를 기리는 추모집을 펴냈고, 영국의 시인은 거의 모두 그를 칭송하는 시를 썼다. 엘리자베스 시대 정치·군사 관계 역사에서 그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는데도 이러한 찬사를 받았다. 그가 이렇게 두루 존경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업적보다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이상적인 신사상을 보여준 사람됨됨이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