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소

타소

다른 표기 언어 Torquato Ta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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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544. 3. 11, 이탈리아 나폴리 소렌토
사망 1595. 4. 25, 로마
국적 이탈리아

요약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의 예루살렘 점령과정을 다룬 영웅 서사시 〈해방된 예루살렘 〉(1581)으로 유명하다.
타소는 시인이자 궁정신하인 베르나르도 타소와 포르치아데 로시의 아들로 태어났다. 우르비노 공작의 궁정에 들어가 공작의 아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 이곳에서 들은 십자군 이야기는 나중에 그의 걸작을 탄생시키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1560년 그는 파도바로 가 법률을 공부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인문주의자이며 비평가인 스페로네 스페로니를 만나 그의 지도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을 공부했다. 이후 시작 활동에 전념했다. 1575년 타소는 파도바에 머물 때부터 쓰기 시작한 대표작 〈해방된 예루살렘〉을 완성했다. 이 서사시에서 그는 제1차 십자군 의 마지막 몇 개월 동안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이끄는 그리스도교 군대의 활약상을 서술하고 있으며 예루살렘 정복과 아스칼로나 전투가 작품의 정점을 이룬다. 타소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주요 시작활동 이외에, 서정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수많은 가공의 삽화를 시에 추가했다. 〈해방된 예루살렘〉은 오래지 않아 유럽의 많은 언어로 번역되고 많은 작가들이 이 작품을 모방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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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생애와 작품
  3. 〈해방된 예루살렘〉의 창작
  4. 명성과 영향

개요

제1차 십자군 원정 당시의 예루살렘 점령과정을 다룬 영웅 서사시 〈해방된 예루살렘 Gerusalemme liberata〉(1581)으로 유명하다.

초기생애와 작품

타소는 시인이자 궁정신하인 베르나르도 타소와 포르치아데 로시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족의 불운은 그의 어린시절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다. 아버지는 1552년 살레르노 공작과 함께 추방되었고 가족의 영지는 몰수당했으며, 어머니는 1556년에 죽었다. 그후 어머니의 지참금을 둘러싸고 소송이 벌어졌다. 타소는 1554년 로마에서 아버지를 만났고, 2년 뒤에는 우르비노 공작의 궁정에 들어가 공작의 아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 이곳에서 들은 십자군 이야기는 나중에 그의 걸작을 탄생시키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1558년 소렌토가 투르크군의 침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소렌토에 살고 있던 누이 코르넬리아는 투르크군의 공격에 따른 대량 학살을 간신히 모면했다. 이듬해 베네치아에서 제1차 십자군 원정(1099년 투르크인들로부터 예루살렘을 되찾은 원정)에 대해 서사시 〈예루살렘 Gerusalemme〉을 8행시체(1연이 8행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행은 11음절로 이루어지는 이탈리아 서사시 형식)인 오타바리마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역사적 사실을 다룬 서사시를 쓰기에는 너무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작업을 중단한 뒤, 기사도를 주제로 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결과 나온 〈리날도 Rinaldo〉는 그가 지닌 기교적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시적 천재성은 미처 보여주지 못했다.

1560년 그는 파도바로 가 법률을 공부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인문주의자이며 비평가인 스페로네 스페로니를 만나 그의 지도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Poetics〉을 공부했다.

〈시 예술론 Discorsi dell'arte poetica〉을 쓰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로 여겨지는데 이 책에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BC 4세기에 그리스에서 규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규칙을 제한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설명했다(예를 들면 타소는 행위의 통일이 삽화의 다양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음). 1565년 데스테 추기경 루이지를 섬기게 되었고, 페라라에 있는 알폰소 2세 에스테 공작의 궁정에 드나들면서 공작의 누이인 루크레치아와 레오노라의 후원을 받았다.

그는 공작의 누이들을 위해 그의 가장 뛰어난 서정시를 썼다. 1569년 아버지가 죽었고, 이듬해에는 루크레치아가 페라라를 떠났다. 타소는 추기경을 따라 프랑스 파리로 가서, 프랑스의 시인인 피에르 롱사르를 만났다. 1571년 페라라로 돌아와 공작의 궁정신하가 되어 창작활동에 몰두했다. 1573년에는 부자연스러운 소박함을 중시하는 틀에 박힌 전원시의 관례에서 벗어나 아르카디아 지방을 감각적이고도 서정적으로 묘사한 전원극 〈아민타 Aminta〉를 썼다(목가문학). 〈아민타〉의 어조는 극적이라기보다 서정적이며 목동 아민타가 오랫동안 사모하던 실비아를 얻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르는 일련의 광경을 매우 섬세한 감정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궁정생활을 이상화했다는 점에서 타소가 페라라에서 누린 행복했던 시절을 반영하고 있다.

〈해방된 예루살렘〉의 창작

1575년 타소는 파도바에 머물 때부터 쓰기 시작한 대표작 〈해방된 예루살렘〉을 완성했다.

이 서사시에서 그는 제1차 십자군 의 마지막 몇 개월 동안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이끄는 그리스도교 군대의 활약상을 서술하고 있으며 예루살렘 정복과 아스칼로나 전투가 작품의 정점을 이룬다. 타소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주요 시작활동 이외에, 서정적이고 쾌락주의적인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수많은 가공의 삽화를 시에 추가했다. 그의 상상력에서 나온 이런 삽화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탈리아의 영웅 리날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타소는 리날도의 반역, 사라센 처녀 아르미다에 대한 그의 사랑, 그의 뉘우침, 그리고 마지막 전투에 결정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이탈리아의 영웅 탕크레드가 자신이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라센 처녀 클로린다를 전투중에 무심코 죽이는 이야기, 안티오크의 공주 에르미니아가 탕크레드에게 품은 은밀한 사랑, 초자연적인 힘이 개입하여 예루살렘 왕 알라디노를 돕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해방된 예루살렘〉을 쓰면서 타소는 당시의 도덕적 열망과 자신의 감각적 영감, 그리고 르네상스 학자들이 서사시에 대해 설정한 형식적 규칙과 자신의 서정적 환상을 마음껏 펼쳐보고 싶은 충동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썼다. 그는 주요한 역사적 사실로 이루어진 확고한 토대에 낭만적이고 전원적인 삽화들을 덧붙임으로써 자신의 창작과 역사적 사실을 조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런 삽화들은 이 시가 갖고 있는 서정적 매력을 매우 풍부하게 해준다.

자신의 서사시가 시적으로 참신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는 평론가들에게 수정을 부탁하러 로마로 갔다.

1576년 페라라로 돌아와 모순된 기분으로 이 작품을 수정하기 시작했는데, 자신이 부탁한 비판을 받아들이고 싶은 충동과, 이런 종류의 권위에 반항하고 싶은 충동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는 피해망상증에 걸려 자신의 종교적 정통성에 대해 부당한 의념(疑念)을 느꼈고, 그후 몇 년 동안은 갑자기 페라라를 떠나거나 심한 위기에 빠지곤 했다. 결국 그는 페라라 공작의 명령으로 산타안나 병원에 감금되기에 이르렀다(1579~86). 병원에 갇혀 있는 동안 수많은 철학적·도덕적 대화를 썼는데, 이 대화체 작품은 그의 수많은 서신과 더불어 16세기 이탈리아 산문의 본보기를 보여준다.

1581년 〈해방된 예루살렘〉 초판과 〈운문과 산문 Rime e prose〉의 일부가 출판되었다. 그의 서사시와, 그 직전에 나온 루도비코 아리오스토의 기사적(騎士的)인 시 〈성난 오를란도 Orlando furioso〉가 제각기 지닌 장점에 대해 이탈리아 비평가들 사이에서 오랜 논쟁이 시작되었다. 타소 자신도 〈변명 Apologia〉을 통해 이 논쟁에 참여했다.

1586년 7월 타소는 만토바 공작 빈첸초 곤차가가 개입한 덕분에 산타안나 병원에서 풀려나, 만토바 공작의 궁정에 들어갔다.

만토바에서 그는 되살아난 창조적 영감 덕분에 비극 〈갈레알토 Galealto〉(나중에 〈토리스몬도 왕 Re Torrismondo〉으로 제목이 바뀜)를 완성했으나, 불안증세가 재발하여 만토바를 탈출, 주로 로마와 나폴리 사이를 방황했다. 나폴리에서는 종교시 〈올리베토 산 Monte Oliveto〉·〈7일간의 천지창조 Le sette giornate del mondo creato〉를 썼다. 1592년 5월 교황 클레멘스 8세의 조카인 친치오 알도브란디니 추기경이 로마에서 그를 따뜻이 맞아주었다.

그는 이 후원자에게 새로 고쳐 쓴 서사시 〈정복된 예루살렘 Gerusalemme conquistata〉(1593)을 바쳤지만, 이 시는 타소가 결국 당시의 도덕적·문학적 편견에 어떻게 굴복했는가를 보여주는 실패작이다. 2편의 종교시 〈성모 마리아의 눈물 Lagrime di Maria Vergine〉·〈예수 그리스도의 눈물 Lagrime di Gesù Cristo〉을 쓴 뒤, 1594년 6월 다시 나폴리로 가서 〈영웅시론 Discorsi del poema eroico〉을 발표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수정한 시 예술론에 따라 새로 고쳐 쓴 서사시를 정당화하려고 애썼다.

1594년 11월 타소가 로마로 돌아오자, 교황은 그에게 연금을 주고 계관시인으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듬해 3월 병에 걸려 산오노프리오 수도원으로 옮겨졌고, 몇 주 뒤에 죽었다.

명성과 영향

〈해방된 예루살렘〉은 오래지 않아 유럽의 많은 언어로 번역되고 많은 작가들이 이 작품을 모방했지만, 작품이 발표된 뒤에 나온 엇갈린 평가는 타소의 우울증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우울증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반종교 개혁(개신교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앙부흥운동)의 엄격한 도덕률에 따르고자 하는 종교적 열망과 쾌락주의적 이상(전원극 〈아민타〉에 나타나 있음) 간의 대립이었다. 타소의 불안한 생활, 정신질환, 낭만적인 사랑들, 자신이 주장했던 박해 등은 모두 그에 대한 전설을 낳았다. 그리하여 타소는 17세기에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문학의 주제가 되었고, 18, 19세기에는 유럽 전역에서 문학의 주제가 되었으며, 마침내 오해와 박해를 받은 천재의 대명사가 되었다.

근대비평은 그의 생활과 성격이 갖고 있는 특성을 당시의 도덕적 불안정 탓으로 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