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노파

메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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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6세기 종교개혁의 급진적 개혁운동인 재세례파에서 발생한 프로테스탄트 교회.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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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종교개혁의 기원
  3. 17~19세기의 발전
  4. 신조와 의식

개요

메노파라는 이름은 온건한 재세례파 지도자들이 시작한 일을 강화하고 조직화한 네덜란드 사제 메노 시몬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메노 시몬스). 오늘날 메노파는 세계 여러 나라에 퍼져 있으며, 대부분 미국과 캐나다에 집중되어 있다.

메노 시몬스(Menno Simonszoon)
메노 시몬스(Menno Simonszoon)

종교개혁의 기원

메노파의 기원은 여러 재세례파 집단 가운데 특히 스위스 형제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형제단은 종교개혁 신학자 울리히 츠빙글리가 이끄는 국가 교회의 요구에 따르지 않아 곧 박해를 받을 상황이었던 1525년 1월 21일 최초로 교회를 구성했다. 츠빙글리가 제시한 요구사항은 재세례파 지도자 콘라트 그레벨, 펠릭스 만츠 등이 성서 연구를 바탕으로 의문을 제기한 유아세례문제였지만 실제 쟁점은 교회 성격에 관한 것이었다. 재세례파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主)이며, 그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참된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은 국가 행정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서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가 직접 인도한다고 했다. 스위스 형제단은 곧 박해를 받고 유럽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이들의 교리적 입장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즉각적인 호응을 얻었고, 이 운동은 한동안 커갔다.

메노파는 16세기 재세례파에서 나온 것이지만 이 두 운동은 서로 다르다.

1536년 재세례파 운동에 가담한 네덜란드 사제 메노 시몬스는 북유럽에 흩어져 있는 재세례파교도들을 모아 생동감 넘치는 교회를 구성했으며, 이 집단은 그의 이름(메노)을 따서 불렸다. 메노 시몬스가 이끈 모임은 1530년 멜키오르 호프만이 스트라스부르에서 조직한 재세례파와 관련된 또 하나의 집단과 비슷했다. 처음에 그는 스위스 형제단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농민전쟁(1525) 때 토마스 뮌처(1490경~1525) 같은 급진 재세례파적이고 혁명적인 지도자들이 이끈 농민군이 패배하고, 스위스 및 독일 남부의 재세례파 초기 지도자들이 죽자 시몬스는 유럽의 온건 재세례파 지도자들이 시작해놓은 일을 강화하고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로운 전통으로 기본적인 신앙과 교리를 확정한 2세대 지도자들을 대표한다.

또 하나의 재세례파 운동이 독일 중부에서 한스 후트(1527 죽음), 한스 뎅크(1500경~27), 초기 평신도 신학자 필그람 마르페크(1492경~1556)의 인도로 발전했다. 그밖에 야콥 후터(1536 죽음)의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후터파 형제단으로 알려진 또다른 재세례파 운동도 있었다.

후터파는 공동생활과 선교열정으로 곧 유명해졌는데, 이것은 다른 모든 재세례파 집단이 지리적·사회적으로 유럽인들의 삶의 본류에서 물러나 상대적으로 신체적인 안전을 누리게 된 후에도 17세기까지 계속되었다.

17~19세기의 발전

1574년 네덜란드에서 마지막 순교자가 있은 뒤 메노파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정치적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폴란드 북부에 해당하는 비수아 강 유역으로 이주해 큰 공동체를 이루고 발전했다. 1700년 네덜란드에 있는 메노파 교회의 세례교인 수는 16만 명이었다. 메노파교도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법률상 극히 제한되어 있었으므로 이들은 상업에 눈을 돌려 부유해졌고 도시화되었다. 신앙문제에서는 인간 향상의 희망이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데 달렸다고 본 17~18세기 지식운동인 계몽주의를 따랐고, 예술가·저술가·사회사업 후원자들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교인 수는 점차 줄어 1837년에는 약 1만 5,300명이었다.

스위스에서 메노파교도들은 18세기까지 계속된 박해를 피해 독일 남부, 알자스, 네덜란드,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스위스의 메노파 주교가 교도의 성서적 생활방식을 보존하기 위해 메노파를 떠나 암만파 교회를 세움으로써 큰 분열이 일어났다(1693~97). 17~20세기 스위스, 독일 남부, 알자스의 메노파교도들 대부분은 거의 폐쇄적인 농업공동체를 이루고 단순한 농경생활을 하면서 살았다. 이들은 종교적으로 개인적인 신앙체험과 변화를 강조했으며, 루터교에 바탕을 둔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788년 메노파교도의 긴 행렬이 폴란드 북부 비수아 삼각주(프로이센)를 떠나 우크라이나에 정착했는데, 이들은 이곳에서 농토를 받았고 군대징집을 면제받았다.

1835년에는 72개 마을에 약 1,600가구가 20만㏊가량 되는 토지를 받고 정착했다. 1860년 러시아에서는 소규모 메노파 집단이 신앙각성 체험을 한 뒤 교도들에게 더욱 엄격한 훈련을 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메노파 형제교회(Mennonite Brethren Church)를 세웠고, 그 일부는 1870년대에 병역면제권을 박탈당하자 러시아로부터 탈출한 메노파교도 대열에 합세했다.

이 이민들 가운데 다수가 미국 북부 중서부에 정착했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에는 12만 명이 넘는 메노파 러시아 정착민들이 종교·교육·사회·경제·정치를 자율적으로 통제하는 자치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러시아에 있던 모든 메노파 공동체들은 제2차 세계대전중에 파괴되었거나, 1945년 직후 소련 정부가 해체했다. 오늘날 메노파교도들은 러시아인들 사이에 흩어져 살고 있다.

1663년부터 메노파교도들은 선조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경제적인 기회와 모험을 찾아서, 특히 유럽의 군국주의를 피해 북아메리카로 이주했다.

19세기말까지 북아메리카에 정착한 대부분의 메노파교도들은 농촌에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농사를 지었다. 언어는 독일어를 썼는데, 독일어는 종교적인 상징이기도 했고, 자기들끼리만 독일어를 사용함으로써 외부 세계와 접촉하지 않으려 했다. 이들의 주요관심은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양심과 전통에 따라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이었다. 1775년 이들은 펜실베이니아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낭독했다.

"우리의 원칙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든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다해왔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을 파괴하고 해를 입히는 일에 도움을 주거나 가담할 자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1783년 영국 랭커스터 주의 메노파교도들은 굶주린 영국 군인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는 이유로 반역죄로 고소당하기도 했다. 남북전쟁 동안 메노파교도들은 다른 사람을 대리입대시키거나 북부의 경우 300달러, 남부의 경우 500달러를 내고 병역을 면제받았다. 그러나 입대해 전쟁에 가담한 교도들은 대개 출교당했다.

1850년 이후 메노파는 언어를 독일어에서 영어로 바꾸고, 주일학교와 복음주의 예배 같은 새로운 제도와 의식을 채택했는데, 이와 같은 외부 문화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분열이 일어났다. 여기에는 유럽에서 건너온 몇몇 분파들도 있었다. 이 여러 분 파 가운데 가장 큰 집단은 '옛 메노파 교회'(Old Mennonite Church)이며, 그 다음이 '메노파 교회 총회'(General Conference Mennonite Church), '메노파 형제단'(Mennonite Brethren), '옛 암만파'(Old Order Amish)이다.

가장 철저한 집단은 '후터파 형제암만'(Hutterian Brethren)으로서 이들은 아직도 공동체를 이루고 재산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비교적 작은 이 집단은 북아메리카 대평원 북부에 집중해 있다.

신조와 의식

재세례파와 메노파의 사상은 종교와 세상을 분리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16세기에 심한 박해를 받은 충격 때문에 재세례파는 살아 남기 위해서 사회로부터 멀어지는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메노파 신학의 중심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메노파는 외적으로는 은둔을 통해, 내적으로는 엄격한 집단규율을 통해 강한 문화적 응집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처럼 세상과의 격리로 인해 검소·근면·경건·상호부조 등과 같은 소종파적인 미덕을 가지게 되었지만 분열도 자주 일어났다. 그러나 20세기 중반에는 주변의 사회·교육·경제 문제에 깊이 개입해 이 종파의 삶과 사상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자기 교단 역사에 대한 연구와 사회학적 분석, 다른 집단과의 신학적 교류 등을 통해 새로운 자기정체성을 추구했다.

메노파는 삼위일체론자들(성부·성자·성령의 교리를 믿는 사람들)이고, 성서(특히 신약과 예수의 가르침)를 삶과 신앙의 최종권위로 인정하며, 초대 교회의 형태를 모범으로 삼는다. 신앙고백과 관련해 세례를 중요시하며, 성찬에 대한 상징적 이해를 강조한다.

일부 메노파는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것에 근거해 세족식(洗足式)을 행한다. 세상에 순응하지 않고 맹세하지 않으며, 군 입대를 거부하며, 교회훈련을 대체로 인정하지만 이를 보편적으로 시행하지는 않는다(평화주의).

메노파의 예배는 설교 중심이다.

복음선포를 중심으로 간략하고 매우 엄숙한 의식이 거행된다. 그러나 20세기말에는 다른 교단들에서처럼 실험적인 예배를 드리는 경우도 많아졌다. 대부분의 메노파 교회들은 여러 협의회로 조직되어 있으며, 그중 7개가 북아메리카에 있다. 암만파, 후터파 형제단, 그밖의 몇몇 보수적인 메노파 교회들은 협의회를 구성하지 않았다. 1925년 이래 5년마다 친교와 연구, 감화를 위해 메노파 세계대회가 열렸지만 각 교회에 대해 구속력이 있는 결정은 내리지 않았다.

메노파는 사랑과 무저항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나타내려 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사회의 깊은 관심을 끌었다.

1725년 네덜란드 메노파가 세운 '국내 및 국제 긴급구제위원회'(An emergency relief committee for national and international aid)는 오늘날까지도 활동하고 있다. 1920년 북아메리카 메노파도 같은 목적으로, 러시아의 기근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메노파 중앙위원회'(MCC)를 설립했다. 20세기에는 메노파 이민이 끊이지 않았는데, 주로 러시아에서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볼리비아, 멕시코, 영국령, 온두라스)로 이주했다.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이민들과 선교사들은 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오세아니아·인도 그리고 아시아 여러 지역에 수많은 교회를 세웠다.

20세기에 북아메리카 메노파는 고등교육을 새롭게 강조해 메노파 교단의 대학교들과 신학교들을 지원했고, 중학교와 성서학교들도 계속 운영했다. 메노파 및 비메노파 역사가들의 연구로 초기 재세례파의 신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났다. 이를 통해 교회생활을 쇄신하기 위한 새로운 통찰이 생겼으나, 현대 메노파의 신조나 의식이 16세기 재세례파의 이상과는 크게 다르다는 점도 부각되었다.

또한 자신들의 역사를 재발견함으로써 도시에서 사회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 증언, 예배, 제자 훈련, 복음 전도가 일상용어가 되었으며, 메노파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이들은 세상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증언과 예배를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암만파, 후터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