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노 시몬스

메노 시몬스

다른 표기 언어 Menno Simonsz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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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496, 프리슬란트 비트마르숨
사망 1561. 1. 31, 홀슈타인 올데슬루 근처
국적 네덜란드

요약 네덜란드의 사제, 네덜란드 재세례파의 온건파 초기지도자.
Menno Simons 라고도 씀.

메노 시몬스의 추종자들이 메노파 교회(Mennonite Church)를 세웠다.

초기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네덜란드 농부 가정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의 이름은 시몬이었다. 어릴 적에 볼스워드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원학교에 들어가 사제 예비교육을 받았다. 1524년 3월 28세의 나이로 위트레흐트에서 사제임명을 받은 뒤 고향 근처 핑윰 본당(parish)에 부임했다. 7년 뒤 1531년에는 고향 비트마르숨 본당에서 마을 사제가 되었다. 나중에 윤리적 그리스도교의 주요대변자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교리에 관심이 많았다. 사제가 된 뒤 처음 몇 년 동안은 '그리스도가 성만찬(주의 만찬)의 빵과 포도주에 실제로 임재(臨在)하는지'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이것은 주로 당시 네덜란드에 퍼져 있던 반성례전적(反聖禮典的) 경향 때문으로 보이는데, 그런 경향은 에라스무스의 인본주의와 훗날 코르넬리우스 호엔의 〈Epistola Christiana〉로 이어지는 공동생활 형제회의 윤리적인 관심들 속에서 생겨났다. 이런 의심을 품게 되면서 메노는 성서와 마르틴 루터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루터와 스위스 종교개혁자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가 성서를 읽음에 따라 로마 교회에서 이탈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매우 두려운 심정으로 성서를 읽었다.

그러나 곧 그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신자의 삶과 교회에서 성서를 주된 권위로 삼아야 한다고 실토했다. 1528년에는 본당 사제로 계속 활동하면서도 이미 복음주의 설교자로 알려져 있었다.

성찬에 대한 의심에서 점차 유아세례와 교회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는데 〈신약성서〉를 읽음에 따라 교회가 거룩함과 순결의 사명을 받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신념을 확고히 하기에 이르렀다.

메노의 해석에 따르면 이것은 신앙이 성숙한 사람들, 즉 예수를 주(主)로 시인하고 그를 따르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를 아는 사람들만 교회 성원이 될 수 있음을 뜻했고, 따라서 그런 사람들만 계약의 인(印 : 보증표)이자 온 세상에 대한 증인으로서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유아들도 전인류와 마찬가지로 어김없이 죄인들이지만, 그들이 스스로를 책임질 나이가 되어서 믿는 편에 서든 배척하는 편에 서든 의식적인 선택을 할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충분한 은총을 내려준다고 주장했다. 회심의 경험은 메노의 전생애와 신학의 중심이 되었다.

한편 네덜란드의 초기 혁명주의적 재세례파는 선동을 계속해갔다.

그들이 뮌스터를 지원하기 위한 발판으로 점령했던 볼스워드 근처 올데클로스터는 1535년 4월 7일 정부군의 맹공으로 함락되었다. 이때 메노 집단 사람들 중 일부와 그의 형제로 추측되는 피터 시몬스가 죽었다. 메노는 이 사건에 자극을 받아 혁명주의자들의 오류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 그러는 가운데 순수한 교리, 성서에 따른 성례집행, 윤리적 순종, 이웃 사랑, 분명하고도 공개적인 신앙고백, 고난을 감수하는 자세 등 참된 신자들의 교회에 대한 메노 자신의 견해를 보다 뚜렷하게 밝혔다.

1535년 7월 25일 뮌스터가 함락되자 잘못 인도받은 영혼들을 도와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대담하고 기탄없는 행동으로 곧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1536년 1월 11년 동안의 영적 갈등을 뒤로 하고 은거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이때 내린 결정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일들을 생각하면 양심에 고통을 느껴 더이상 견딜 수 없다…… 육체적인 두려움 때문에 진리의 기본을 밝히지 않는다면, 또 진리를 알면 기꺼이 자기들의 의무를 다할 저 방황하는 무리들을 내 모든 힘을 다해 참된 그리스도의 목장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범죄하는 가운데 흘린 저들의 피가 전능자(全能者)의 심판 때 나를 고소하고 불쌍한 내 영혼이 유죄판결을 받지 않겠는가!"

메노는 한해 동안 조용히 잠적해 살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잡았다.

이 기간 동안 〈영적 부활 The Spiritual Resurrection〉·〈거듭남 The New Birth〉·〈시편 23편 묵상 Meditation on the Twenty-third Psalm〉 등을 썼다. 1536년말 또는 1537년초에 성인세례를 받고, 오베 필립스가 1534년에 세운 온건 재세례파 집단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오베에게 안수를 받았다. 또한 결혼도 했고, 이때부터 이단자(異端者)로 낙인찍혀 항상 위험에 처했다. 1542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1500~58)는 직접 메노를 반대하는 칙령을 내리고, 100길더의 현상금을 걸어 체포령을 내렸다.

1539년 메노를 숨겨주었다는 죄목으로 레와르덴의 티야르드 레닉스가 재세례파교도로서는 처음으로 처형을 당했다.

1543~44년 동(東)프리슬란트에서 활동하던 중 폴란드 종교개혁자 요한네스 아 라스코(1499~1560)와 1544년 1월 중요한 면담 내지 토론을 했다. 그뒤 2년 동안, 즉 1544~46년에는 라인란트에서 지냈고, 그뒤부터 1561년 죽을 때까지는 함부르크 북동쪽 올데슬루 근처 홀슈타인의 새 근거지에 머물면서 여행을 하곤 했다.

이곳에서 많은 책을 썼고, 재세례파 저작들을 보급하기 위해 출판사를 세웠다. 그러는 가운데 네덜란드뿐 아니라 단치히까지도 여행을 했다.

영향

메노는 메노파 교회 설립자도 아니고, 초기 재세례파 신학의 대변자도 아니었다. 그의 위대함은 오히려 초기 형성 과정의 북유럽 재세례파를 탁월하게 지도한 데 있었다. 그것은 침착하고 성서지향적인 그의 접근방식과 저술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그의 저술들은 운동방향을 확고히 잡아주었다.

그의 책들은 장황하고 지나치게 논쟁적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가톨릭교와 개신교의 공격에 맞서는 한편 재세례파 과격주의자들의 곡해에 맞서 재세례파 신앙의 윤곽을 그려준다.

생애 말년에는 파문(교회로부터 추방함)을 비롯한 교회의 조치들을 아주 엄격하게 적용하라고 압력을 가하는 자기 교파 일부 사람들에게 시달렸다. 40권이 넘는 그의 현존 저서들에는 모두 바울로가 고린토 교인들에게 보낸 첫번째 편지 3장 11절이 서문으로 적혀 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가 놓여 있으니 아무도 다른 기초는 놓을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