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슈몽

리슈몽

다른 표기 언어 Arthur, connétable de Richemont
요약 테이블
출생 1393, 브르타뉴
사망 1458. 12. 26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컨스터블.
(영). Arthur, constable de Richemont. Comte de Richemont 또는 Arthur Ⅲ, duc de Bretagne(1457~58)라고도 함.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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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요
  2. 초기활동
  3. 프랑스 컨스터블
  4. 백년전쟁의 종결

개요

잔 다르크의 휘하에서 샤를 7세를 위해 싸웠으며 이후 백년전쟁 말기에도 계속해서 잉글랜드인들과 싸웠다(1436~53). 1399년 6세 때 잉글랜드의 리치먼드 백작위를 받았으며(프랑스 식으로는 리슈몽 백작), 1457년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초기활동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399년 형인 장 5세 공작에게서 잉글랜드의 리치먼드 백작 칭호를 받았다.

그들의 어머니인 잔은 남편이 죽은 뒤 잉글랜드 왕 헨리 4세와 재혼해 잉글랜드 왕가와 브르타뉴 사이의 인척관계를 다시 맺었다. 그러나 리슈몽의 관심은 주로 프랑스 문제에 쏠려 있었다. 발루아 왕조의 양대(兩大) 갈래인 오를레앙 가문(곧 아르마냐크라고 개칭함)과 부르고뉴 가문 사이에 격렬한 분쟁이 일어났을 때 리슈몽은 전자의 편에서 싸웠다.

같은 시기에 리슈몽은 프랑스 왕 샤를 6세의 아들인 루이 왕세자의 친한 친구이자 열성적인 지지자가 되었다.

1415년 아쟁쿠르에서 전투중에 부상을 입은 리슈몽은 부르고뉴 가문과 연합하여 잉글랜드(→ 색인:영국사)와 프랑스를 잉글랜드 왕의 지배하에 통합시키고자 했던 잉글랜드 승전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1420년까지 잉글랜드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충성서약을 하고 석방되어 잉글랜드 편으로 돌아섰다.

이제 그는 자기 형 장을 설득해 잉글랜드 왕 헨리 5세를 프랑스 왕위 계승자로 규정한 트루아 조약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데 힘을 쏟았다. 헨리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프랑스의 이브리 백작령을 리슈몽에게 주었다. 잉글랜드·부르고뉴 연합세력과 리슈몽의 관계는 젊어서 죽은 루이 왕세자의 미망인인 부르고뉴의 마르그리트와 그가 1423년 결혼함으로써 더욱 긴밀해졌다.

이 결혼으로 리슈몽은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와 잉글랜드 출신의 프랑스 섭정인 베드퍼드 공작 존의 인척이 되었다. 이처럼 리슈몽은 베드퍼드 가문과 부르고뉴 가문을 중심으로 한 지배집단 속에서 높은 지위를 향해 나아가다가 돌연 베드퍼드 공작과 까닭 모를 분쟁을 일으켰고 결국은 잉글랜드 편을 떠나 프랑스에 충성하는 애초의 입장으로 돌아섰다.

1425년 3월 샤를 7세에 의해 프랑스의 컨스터블에 임명된 그는 패퇴해 무기력해진 프랑스의 군사력을 정비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이제 그는 완전히 프랑스 편에 서서 자기 형을 설득해 1425년 10월 프랑스와 소뮈르 조약을 체결하도록 만들었다(아쟁쿠르 전투).

프랑스 컨스터블

리슈몽은 태도가 거친데다가 전쟁 속행을 완강하게 고집했으므로 이내 인기없는 인물이 되었다.

또 그의 정치적 능력은 샤를 7세가 총애하는 조르주 드 라 트레무아유 같은 무능한 신하들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궁정에서 리슈몽이 갖는 영향력은 브르타뉴가 다시 잉글랜드 편으로 돌아섬으로써 더욱 약해졌다. 1427년 9월 장 5세와 섭정 베드퍼드가 조약을 맺자 리슈몽은 결국 프랑스 궁정에서 쫓겨났다. 리슈몽은 1429년 오를레앙에서 잔 다르크와 합세해 잉글랜드에 맞서 싸우면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으나 라 트레무아유의 사주 때문에 군대에서도 쫓겨났다.

그러나 리슈몽은 브르타뉴와 샤를 7세가 렌 조약을 맺어 다시 한번 손잡도록 만들었으며, 1432년 라 트레무아유가 마침내 축출된 뒤 컨스터블로서 궁정에 복귀했다.

자신이 부르고뉴 가문과 맺고 있는 인척관계를 이용해 리슈몽은 1435년 9월 21일 아라스 조약을 주선했으며, 이로 인해 결국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와 프랑스 국왕 사이의 오랜 분쟁이 끝났다.

아라스 조약은 백년전쟁의 정치적·외교적 전환점이었고 아울러 리슈몽의 생애에서도 중요한 획기적 업적이었다.

백년전쟁의 종결

그러나 전쟁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1436년 4월 파리에서 잉글랜드 주둔군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났을 때 리슈몽은 파리로 진군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엉성한 조직력 때문에 이후 수년 간 더이상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리슈몽은 프랑스 군대의 전면개혁을 결심했으며, 군대 유지에 필요한 세입을 조달하기 위해 국가재정도 재편하기로 했다. 샤를 7세의 강력한 지지를 얻고 나아가 노세(爐稅)와 소금에 대한 과세로 고정적인 수입원까지 확보한 리슈몽은 프랑스 기병대를 개편해 정규적이고 고도의 전문성을 띤 부대(gens d'armes d'ordonnance)를 창설했다.

이러한 정규병력 덕택에 리슈몽은 1444년 짧은 휴전이 끝난 뒤 압도적인 성과를 거두어 전세를 뒤바꿔놓을 수 있었다. 백년전쟁의 최종국면에 접어들어 리슈몽은 1449년 9월과 10월 코탕탱 반도에서 잉글랜드인들을 몰아내고 1450년 4월 포르미니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큰 공을 세우는 등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그뒤 곧 노르망디를, 2년 안에는 기옌을 정복했다.

프랑스는 마침내 백년전쟁에서 승리했고 이에 따라 리슈몽도 일선에서 물러날 때가 되었다.

그는 1457년 9월 조카 피에르 2세를 계승해 브르타뉴 공작이 된 지 1년 만에 죽었으며 슬하에 적자(嫡子)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