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퍼드

베드퍼드

다른 표기 언어 John Plantagenet, duke of Bedford
요약 테이블
출생 1389. 6. 20
사망 1435. 9. 14, 프랑스 루앙
국적 잉글랜드, 영국

요약 잉글랜드의 장군·정치가.

프랑스와 벌인 백년전쟁(1337~1453)의 위급한 고비에 잉글랜드군을 지휘했다. 군사·행정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나 그가 죽을 무렵 프랑스 내에서 잉글랜드의 세력은 매우 약해져 있었다.

잉글랜드 왕 헨리 4세(1399~1413 재위)의 셋째 아들로 1414년 국왕인 형 헨리 5세에게서 베드퍼드 공작작위를 받았다. 1415~22년 왕이 프랑스에서 전투를 벌이는 동안 3차례 국왕 대리 역할을 했다. 1416년 포위된 아르플뢰르 시(市)를 구원할 증원군을 이끌고 프랑스에 갔으며 1422년 헨리가 죽을 당시 그와 함께 프랑스에 있었다. 이어서 헨리의 아들인 어린 왕 헨리 6세의 섭정이 되었고 그가 자리를 비울 때는 동생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가 그 직책을 맡기로 합의했다.

그뒤 베드퍼드는 또다시 전쟁에 관심을 기울였다. 1423년 부르고뉴의 선량공(善良公) 필리프와 동맹을 맺고 프랑스 북서부를 장악한 뒤 프랑스 왕 샤를 7세에 대한 공격을 시작해 1424년 8월 17일 베르뇌유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동안도 계속 그는 글로스터와 필리프 사이의 적개심 때문에 위태로웠던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사이의 동맹을 유지하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했다. 게다가 1426년에는 글로스터와 대법관 헨리 보퍼트 사이의 내분을 중재하러 잉글랜드로 돌아가야 했다.

1427년 프랑스로 돌아와 계속 승리를 거두었으나 잔 다르크가 이끄는 프랑스 군대의 압력 때문에 1429년 4월 오를레앙 포위를 풀 수밖에 없었고 이 후퇴는 전세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로는 베드퍼드가 온 정력과 판단력을 쏟아부어도 잉글랜드의 주도권은 약해지기만 해 도저히 만회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1433년 무렵 잉글랜드 국고가 급속히 비어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부르고뉴가 잉글랜드 지지를 포기하고 프랑스와 독자적으로 평화협정을 추진하는 와중에 베드퍼드는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