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중심설

지구중심설

[ Geocentric theory ]

지구중심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우주관이다. 천동설이라고도 한다. 기원전 4세기경 플라톤(Plato)이 하늘의 천구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모형을 제시했고, 기원후 2세기경 클라우디스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y)가 관련 내용을 집대성했다. 태양중심설이 널리 알려지면서 이 지구중심설은 폐기되었다.

목차

초기 지구중심설

아낙시만드로스와 피타고라스 학파

지구중심설의 시작을 살펴보면 기원전 6세기에 활동했던 아낙시만드로스까지 거슬러 갈 수 있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놓여 있고, 어떤 지지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또한 원통형의 지구 주위를 해, , 별이 돈다고 생각하였다.

이보다 조금 늦은 비슷한 시기의 기원전 6세기에, 피타고라스 정리로 잘 알려진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를 중심으로 한 학파에서 과학적인 우주 모형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그들은 지구와 천체를 포함해 우주 전체를 구형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구가 기하학적으로 가장 완전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고, 그 우주는 지구의 축을 중심으로 매일 한번씩 자전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모형은 후세의 플라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

플라톤의 우주 모형

기원전 4세기경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던 플라톤이 생각한 우주는 기하학적으로 가장 완벽한 구로 이루어진 세계였다. 따라서, 밤하늘의 별은 천구에 고정되어 있으면서, 그 천구지구 주위를 일정한 속력으로 회전하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등속 원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별이 아닌 행성조차 본래는 천구 안쪽에서 각각의 원운동을 하고 있지만, 겉보기에 하늘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단순한 모형은 사람들의 직관과 꽤 잘 일치하여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다.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이 우주 모형을 좀 더 발전시켜, 천구의 안쪽 구는 네 가지 기본 원소(흙, 물, 공기, 불)로 이루어져 있고, 천구와 천체들은 제 5원소인 에테르(ether)로 이루어져 있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에 따라 우주를 크게 두 영역으로 구분하였고(즉, 일반적인 4원소로 이루어져 있어 다양한 변화가 존재하는 지상계와 에테르로 이루어져 있어 변하지 않는 천상계), 이것은 우주를 바라보는 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당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모형과는 다르게,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는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하였지만(태양중심설 참조), 이 주장은 큰 힘을 얻지 못했다.

그림 1. 지구중심설을 따른 우주 모형. 안쪽 원은 지상계에 해당하고, 바깥쪽 원들은 에테르로 구성된 천상계에 해당한다. (출처: )

그러다 밤하늘에서 상대적 위치가 변하지 않는 붙박이별(즉, 항성)과 달리, 다른 별들에 대한 상대적 위치가 시간에 따라 변하는 행성의 움직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배경 별들에 대해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이다가 일정 기간 동안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즉, 역행), 다시 원래 방향으로 돌아오는 행성의 복잡한 운동이 알려지면서 이것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 플라톤의 제자면서 뛰어난 수학자였던 에우독소스(Eudoxus)가 행성들은 각각의 구를 갖고 있으면서 그 구는 다른 각도의 축에 연결된 채 서로 다른 속력으로 운동하고 있다는 모형을 제시했다. 이 모형은 행성역행을 꽤 잘 설명했지만, 점점 관측 자료가 쌓이면서 모형과 관측의 차이가 커지기 시작했다.

히파르코스의 주전원

행성역행을 좀 더 제대로 설명한 수 있게 된 것은 기원전 2세기경 히파르코스(Hipparcos)가 행성 궤도에 주전원(epicycle)을 도입하면서부터이다. 히파르코스는 별의 목록과 밝기 체계(즉, 등급) 구축에 큰 기여를 한 천문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행성 궤도에 지구를 도는 가상의 큰 원에다 주전원이라는 작은 원을 추가했는데, 이 두 원운동의 조합으로 행성역행을 설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밝기 변화가 지구와 행성의 거리 변하로 나타나는 것임을 보일 수 있었다. 이 모형은 200년이 넘도록 잘 유지 되었지만 점점 더 정밀한 관측 자료가 나옴에 따라 개선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림 2. 지구를 도는 행성 궤도의 큰 가상의 원과 작은 원(작은 원을 주전원이라 함). 검은색 점은 지구와 행성의 상응점(equant)을 나타낸다. (출처: )

프톨레마이오스의 집대성

마침내 기원후 2세기 경 클라우디스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전원에 상응점(equant)을 추가하여 그 모형을 개선했다. 즉, 행성이 일정한 각속도로 도는 중심(상응점)을 원 궤도의 중심에서 살짝 어긋나게 했고, 지구 또한 원 궤도의 중심이 아니라 상응점의 반대편에 위치시켰다. 이 결과, 행성의 관측 자료를 매우 잘 설명할 수 있었다. 물론 플라톤의 철학적 교리인 일정한 속력의 원운동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 동안의 내용들을 잘 포괄하는 모형이라 할 수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런 내용을 포함해 2세기 경 마테마티케 신탁시스(Μαθηματικὴ Σύνταξις, 수학 집대성)라는 제목의 논문을 출판했다. 8세기경 이 논문이 위대한 논문이라는 뜻을 가진 아랍어, 알마게스트(Almagest)로 번역 되면서 큰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12세기에 이 논문의 아랍어판이 라틴어판으로 번역되면서 유럽에서도 널리 알려졌고, 17세기에 태양중심설이 확립될 때까지 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보통 천동설 또는 지구중심설을 언급할 때는 이 프톨레마이오스의 버전을 가리킨다. 지구중심설과 관련된 학자들의 활동 연대와 업적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그림 3.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로 행성의 운동을 설명할 때 얼마나 복잡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그림. (출처: )

이름 활동 연대 업적
아낙시만드로스 기원전 610년-546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제시
피타고라스 기원전 570년-495년 우주 전체가 구로 이루어졌다는 과학적 우주 모형을 처음으로 제시
플라톤 기원전 428년-348년 천구가 지구 주위를 일정한 속력으로 회전하는 등속 원운동 제시
아리스토텔레스 기원전 384년-322년 일반적인 4원소로 이루어진 지상계와 제 5원소인 에테르로 이루어진 천상계 구분
에우독소스 기원전 408년-355년 행성들이 서로 다른 속력으로 운동하고 있다는 모형 제시
히파르코스 기원전 190년-120년 행성 궤도에 주전원을 도입해서 역행 설명
프톨레마이오스 서기 100년-170년 지구를 행성 운동의 중심에 놓지 않는 모형과 함께 지구 중심설 집대성

지구중심설에서 태양중심설로 변화

16세기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중심설을 주장할 때만 해도 철학적인 측면에서나 관측 결과를 설명하는 측면에서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이 정설로 여겨졌다. 한편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기존의 이론인 지구중심설이 꽤 쓸만했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행성 운동의 중심에 지구 대신 태양을 놓았지만, 행성들이 여전히 등속 원운동을 한다고 가정했기 때문에 관측 결과를 잘 맞추기 위해서 여전히 많은 주전원이 필요했다. 즉 이론적인 측면에서도 태양중심설이 특별히 매력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태양중심설에 따르면 지구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가까운 별들이 먼 배경 별들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연주시차가 관측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 당시 관측 기술의 한계로 인해 연주시차가 0보다 크게 측정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유명한 관측 천문학자였던 타이코 브라헤도 태양중심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지구중심설을 바탕으로 한 자신만의 수정된 우주 모형을 제시하기도 했다.

17세기에 갈릴레이가 금성의 위상 변화 등 망원경을 이용한 관측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모형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하면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케플러가 행성들이 태양을 촛점으로 하면서 원 궤도가 아닌 타원 궤도를 따라 운동한다는 타원 궤도의 법칙을 포함한 행성 운동에 관한 세 가지 케플러법칙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게 되면서 지구중심설은 폐기되고, 태양중심설이 받아들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