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중심설

태양중심설

[ heliocentric theory ]

태양중심설은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우주관이다. 지동설이라고도 한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가 체계적인 수학적 모델을 제시하였고 케플러(Johannes Kepler), 갈릴레오(Galileo Galilei) 등이 이론을 공고히 했다.

목차

초기 태양중심설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us of Samos)는 기원전 3세기에 처음으로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주장하였다(그림 1 참조). 그는 '태양 및 달의 크기와 거리에 대해서'라는 저서에서 태양의 크기와 태양까지의 거리 측정을 시도하였다. 그는 지구와 태양의 상대적인 크기를 계산하는 것으로 거대한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도는 것보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생각했다. 태양의 연주운동은 지구의 공전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별의 일주운동은 지구의 자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중심설이 주류였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힘을 얻지 못했고 오히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로 지구중심설은 중세까지 널리 인정되는 우주관이 되었다.

그림 1.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

셀레우치아의 셀레우쿠스

기원전 190년에 태어난 셀레우치아의 셀레우쿠스(Seleucus of Seleucia)는 태양중심설의 기하학적 모형을 만들어 행성의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을 개발하였다고 한다. 그는 또한 조수 현상을 지구의 자전과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달의 인력에 의한 것이라는 이론을 만들기도 했다.

마르티아누스 카펠라

5세기 철학자인 마르티아누스 카펠라(Martianus Capella)는 금성과 수성이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주장은 9세기 저술가들도 인용하였으며 코페르니쿠스조차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중세 이슬람 세계

11세기 들어 이슬람 세계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에 대한 의심이 퍼지고 있었다(그림 2 참조). 특히, 우리가 관측하는 것은 하늘이 움직이기 때문이 아니고 지구가 움직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퍼져 나갔다.

그림 2.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 복잡한 주전원이 필요하고 금성과 수성의 원운동 중심이 태양과 일직선상에 놓여야 한다는 가정도 필요하다.(출처: 장헌영/이상성/한국천문학회)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

16세기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태양중심설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태양계의 구조와는 다르고 오히려 프톨레마이오스의 구조와 비슷하다(그림 3 참조). 단지 우주의 중심에 있던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바꾸어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오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에 대해 장점이 있다.

첫 번째, 프톨레마이오스는 회전주기에 따라 행성을 배치했기 때문에 달의 궤도가 맨 안쪽에 위치했다. 하지만, 이 구조에 의하면 태양, 수성, 금성은 모두 회전주기가 약 1년으로 비슷했다. 태양주위에 수성부터 토성을 순서대로 배열한 코페르니쿠스의 우주관에서는 이런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 두 번째, 행성의 역행을 설명하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 구조에서는 복잡한 주전원을 사용해서 설명했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서는 주전원을 사용하지 않고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세 번째, 코페르니쿠스 이론에서는 자연스럽게 수성과 금성의 최대 이각이 존재하게 된다. 이 문제 역시 별도의 가정없이도 설명이 가능하다.

그림 3.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

타이코 브라헤의 절충안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가 태양중심설을 제안했을 때부터 문제가 되었던 연주시차 문제는 코페르니쿠스의 제안도 넘어갈 수 없었다. 실제로 그 크기가 매우 작아서 관측되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타이코 브라헤는 자신의 관측 결과에 근거해서 태양과 달은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고 나머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절충안을 제시하게 된다(그림 4 참조).

그림 4. 타이코 브라헤의 절충안 우주 모형.()

태양중심설의 확립

1609년 케플러는 타이코 브라헤의 정확한 관측 자료에 근거해서 행성에 관한 법칙 2개를 신천문학(Astronomia Nova)에 발표했다. 10년 후 그는 행성의 운동에 관한 마지막 법칙을 세계의 조화(Harmonice Mundi)에 발표하였다. 그는 행성들을 태양을 촛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도는 것으로 거의 완전히 설명하였다.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이용한 관측으로부터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뒷받침할만한 증거들을 발표하였다. 특히 금성의 위상변화 관측은 지구중심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그림 5 참조).

그림 5. 관측된 금성의 위상을 설명할 수 있는 태양중심설. 지구중심설로는 보름달 모양의 금성의 위상을 설명할 수 없다.(출처: 장헌영/이상성/한국천문학회)

우리나라의 태양중심설

성리학자인 김석문(1658∼1735)은 중국의 학문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1638년 중국에서 발행된 우위력지라는 책으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과 타이코 브라헤의 절충설을 알게 되었다. 김석문은 성리학적인 관점으로 타이코 브라헤의 생각이 옳다고 여겨 역학도해라는 저술으로 여러 행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궤도를 따라 돌 뿐 아니라 지구도 남북극을 축으로 1년에 360번 자전한다고 주장했다(그림 6 참조).

73년 뒤에 태어난 홍대용(1731∼1783)은 실학자이자 과학사상가였다. 1765년 청나라로 떠나는 동지사의 사신 일행으로 북경에 도착한 그는 중국학자들과 서양 과학에 대해 소개받는다. 그는 서양 선교사들이 주장하는 지구중심설 대신 지구자전설이 합리적이라고 여긴다. 그는 지구는 둥글고 자전한다고 믿었는데 당시 땅은 네모지고 하늘은 둥근다(천원지방)는 동양 세계관과 다른 것이었다. 홍대용은 더 나아가 독차적인 지구자전설과 우주무한론, 만인만국평등설을 주장했다.

그림 6. 김석문의 역학이십사도총해(역학도해)(출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