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의 역사

거문고의 역사

요약 거문고(현금玄琴)는 유라시아대륙 북방에서 삼국시대 초 고구려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거문고는 신라의 통일 이후 한민족 음악을 대표하는 악기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 거문고는 궁중 외에 민간 풍류(風流) 음악의 핵심 악기였고, 20세기 들어 거문고산조와 창작곡 등으로 쓰임을 넓혀 왔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거문고(중국 지린성 지안 오회분 5호묘, ‘용을 탄 선인’, 모사도)

고구려 고분벽화의 거문고(중국 지린성 지안 오회분 5호묘, ‘용을 탄 선인’, 모사도)

1. 거문고의 기원

1) 북방기원설과 해전설

거문고의 정확한 기원과 한반도 유입 경로는 밝혀지지 않았다. 거문고의 기원에 대한 견해는 북방 즉 대륙기원설이 통설이며, 소수설로 남방 즉 해전(海傳)설이 있다.

북방기원설은, 고구려를 포함한 삼국의 음악은 중국 서역(西域) 즉 중앙아시아 음악과 친연관계에 있으므로, 거문고도 가야금, 대금, 향비파 등의 향악기와 함께 중국을 거치지 않고 유라시아대륙 북부 내륙에서 북방 루트를 통해 중국 북동부를 차지한 고구려에 들어왔을 것으로 본다. 북한의 연구자들은 고구려의 악기 및 예술 활동 등의 연원을 고조선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는데, 이 역시 북방기원설에 속한다. 그렇게 거문고는 한반도에 정착했으나, 거문고의 원형이라 할 만한 악기는 오늘날 대륙에서 사라져 찾아볼 수 없다.

해전설은 해양문명권에 속하는 인도의 비나(Veena)나 타이의 자케(Jakhe) 같은 악기를 거문고의 기원이라고 본다. 거문고 해전설은 불교 및 가야금 해전설과도 맥을 같이한다. 해전설은 거문고와 이들 남방 악기 사이에 상당한 친연성이 발견되는 것을 근거로 삼지만, 심증 외에 실증적 연관성은 확인된 바 없다.

종합하면, 거문고는 유라시아대륙의 금쟁(琴箏, 치터)류 현악기 중 괘(frets)가 있고 술대 같은 소도구로 타는 형태의 고대 악기가 고구려에 유입해 다른 지역에서는 사라지고 한반도에만 남았거나, 보통의 금쟁류 고악기가 고구려에서 일차 변형된 것이 한국인의 의식과 미감에 잘 맞았기에 성공적으로 한반도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명칭과 표기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거문고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악기의 이름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중국 『통전』(通典, 8세기) 등 문헌의 고구려 음악에 관한 기록 중 ‘추쟁’(搊箏, 또는 국쟁掬箏)과, 일본 『일본후기』(日本後紀, 9세기)의 고구려와 백제 음악 관련 기록의 ‘군후’(군篌)이다.

추쟁(국쟁)의 ‘쟁’(箏)은 거문고나 가야금 같은 넓적판 악기의 일반명칭이다. ‘탈 추(搊)’나 ‘움킬 국(掬)’은 맨손이 아니라 술대 같은 도구로 악기를 타는 특수한 동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군후의 ‘후(篌)’도 공후(箜篌)라는 악기명에서 보듯 현악기와 관련 있다. 고대 일본은 백제 문화를 폭넓게 수용했고 백제 왕실은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왔으므로, 추쟁(국쟁)과 군후는 모두 고구려와 연계되는 악기이다.

2) 왕산악 제작설의 비판적 검토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의 음악백과인 「악지」(樂志)의 ‘현금’(玄琴) 항에서는, 신라 옛 기록의 인용이라며 거문고의 기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옛날에 진나라 사람이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냈다. 고구려 사람이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알아도 그 소리와 연주법을 알지 못해, 나라 사람 중 능히 그 소리를 아는 사람을 후히 상주겠다고 하였다. 그때 제2상 왕산악이 그 모양은 그대로 두고 제원을 많이 뜯어고쳐 (새 악기를) 만들고, 겸하여 100여 곡을 지어 연주했다. 그러자 검은 두루미가 날아와 춤추었으므로 현학금(玄學琴)이라 하고, 뒤에 줄여 현금(검은고)이라 했다.1)

「악지」(樂志) ‘현금’(玄琴)

기록의 칠현금이란 중국금(琴, 친Qin)의 딴이름이다. 그러나 중국의 금과 한국의 거문고는 넓적한 판 위에 줄을 얹었고, 왼손으로 줄을 짚어 음높이를 조절한다는 것 외에 구조적 공통점이 적어, 중국금을 개량해 거문고를 만들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악기의 일반적인 발달과정상 거문고의 높은 괘가 금의 휘(徽)보다 고형(古形)이므로 칠현금을 고쳐서 거문고를 만들었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왕산악(王山岳)이라는 이름, 제2상(第二相)이라는 관직명도 『삼국사기』의 이 기록 외에 다른 곳에 나타나지 않는다. 악기를 연주하는데 새가 날아와서 춤추었다는 것도 문자 그대로 믿기 힘들다.

그럼에도, 이 기록이 사실이라는 전제에서 위 인용문의 진(晉)이 서진(西晉, 265~316)인지 동진(東晉, 317~419)인지가 한때 연구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한국 고유의 것보다 중국에서 온 것이라야 대접받는다고 여기던 시대의 사고방식이 지어낸 것으로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특히 검은 두루미 대목의 경우, 기원전 3세기 중국 책인 『한비자』(韓非子)의 「십과」(十過)편에 “옛날 춘추시대 진(晉)나라―또 ‘진’이다―의 사광(師曠)이라는 음악가가 임금 앞에서 금을 연주하자 검은 두루미 열여섯 마리가 날아와 줄 지어 춤추며 울었다”는 기록을 의식하여, 한국의 거문고도 그에 못지않은 신비한 힘이 있음을 과시한 것으로 읽힌다. 그렇다면 진나라도 서진이나 동진 같은 특정 왕조가 아니라 그저 중국이라는 뜻으로 새겨 읽으면 된다.

2. 거문고의 발전

1) 고구려의 거문고

한반도 북부와 중국에 걸쳐 위치했던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에 비해 중국과 서역 문화의 수입 및 교류에 유리한 환경에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 음악, 특히 거문고에 관해 고구려인이 남긴 기록은 전하는 것이 없고, 중국의 역사책 등을 통해 악기와 악사의 복장 등 단편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중국 수(隋, 581~618), 당(唐, 618~907) 왕조는 주변국에서 파견된 음악을 궁중음악에 포함시켰는데, 수의 ‘칠부기’(七部伎), 당의 ‘구부기’(九部伎, 나중에 십부기十部伎로 확대) 등이 그것이다. 칠부기, 구부기, 십부기 모두 고구려 음악이 ‘고려기’(高麗伎)라는 이름으로 단독으로 포함되었다(이 점에서 신라와 백제 음악이 ‘잡기’(雜伎)에 뭉뚱그려진 것과 다르다). 그중 『신당서』(新唐書)의 구부기와 『통전』(通典)의 십부기 중 고려기에 공통적으로 ‘추쟁’(搊箏)이라는 악기가 등장하는데, 이것을 거문고의 원형으로 본다(『수서隋書』의 칠부기 중 고려기에는 추쟁이 없다).

고구려 거문고의 실물 유물은 없으나, 고분벽화에는 흔히 거문고나 그 원형악기가 등장한다. 고구려 고분은 북한지역은 물론 고구려 옛 땅인 중국 북동부에까지 걸쳐 널리 분포하고 있다. 일부 그림은 학자들 간에 거문고인지 이견이 있긴 하나, 지금까지 조사된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 그려진 악기 중 거문고와 관련된 악기가 그려진 주요 고분과 악기 특징은 다음과 같다.

지역 고분명 악기 특징
북한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태성리

태성리 1호분

6현금(독주)

황해도 안악군

안악 3호분

6현금(춤 반주)

중국

지린성 지안시

퉁거우 12호분

4현금(춤 반주)

무용총

4현금 2종

오회분 5호묘

4현금

장천 1호분

치터류(춤 반주)

주요 고구려 고분벽화의 거문고

태성리 1호분과 안악 3호분에 나타나는 6현금은 무릎 위에 악기를 올려놓고 연주하는 것이 오늘날 거문고의 연주 자세와 같다. 태성리 1호분의 6현금은 줄을 3현씩 한 조를 이루어 하나의 구멍 또는 조이개 같은 것에 묶여 있는 형태이다.

지안(集安) 무용총(舞踊塚) 벽화에는 거문고로 보이는 악기가 2개 나오는데, 그중 오른쪽 것이 오늘날의 거문고와 많이 비슷하다. 직사각형 몸통에 4개의 줄을 걸었고, 적어도 14개의 괘가 확인된다. 악기를 무릎 위에 비스듬히 놓고 왼손으로 줄을 누르고 있는 연주 모습은 오늘날 거문고 연주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악기를 타는 오른손 부분이 훼손되어 맨손인지 술대를 쥐고 있는지 맨눈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팔꿈치를 꺾은 모습과 역동적으로 묘사한 옷자락 등으로 보아 맨손보다 술대로 타는 모습에 더 가까워 보인다. 무용총 벽화의 왼쪽, 오른쪽 거문고가 다르게 생긴 것은 벽화의 디테일 묘사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당시 실제 악기의 제원이 다양함을 반영한 듯하다.

무용총 벽화의 거문고 2종(좌 · 우)

무용총 벽화의 거문고 2종(좌 · 우)

한편 장천 1호분에는 두 종류의 치터류 현악기가 등장한다. 그림 위쪽 세 사람 중 맨 오른쪽 사람은 선 자세로 현악기를 세로로 세워 들고 있고, 아래쪽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은 거문고 같은 현악기를 무릎에 뉘어 놓고 춤 반주를 하는 모습이다.

장천 1호분의 악기 연주와 춤 그림

장천 1호분의 악기 연주와 춤 그림

이상의 고분벽화 속 악기들이 줄 수, 괘 수 등 디테일에서 오늘날의 거문고와 다르다고 하여 거문고가 아닌 제3의 악기라고 보는 것은 지나치다. 고구려 벽화의 다양한 거문고 추정 현악기는, 오늘날 거문고의 전신으로 ‘괘가 있고 술대로 타는 치터류 현악기’라는 본질 범위 내에서 다양한 변형들이 있었다는 증거로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2) 통일신라의 거문고

고구려의 거문고는 신라의 삼국통일과 함께 신라에 수용되고 한반도 전역에 퍼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악지」는 ‘신라 옛 기록’을 인용하여, 거문고의 신라 수용과 정착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음악인으로 옥보고(玉寶高)와 신라인 귀금(貴金)을 언급한다.

신라 사람 사찬 공영의 아들 옥보고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금을 배운 지 50년에 손수 새 곡조 30곡을 지어 이를 속명득에게 전하고, 속명득은 이를 귀금선생에게 전했다. (귀금)선생 또한 지리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신라 왕이 거문고의 도가 단절될까 두려워하여 이찬 윤흥더러 그 음악을 전할 수 있도록 하라 이르고 (윤흥에게) 남원의 공사를 맡겼다. 윤흥이 부임하여 총명한 소년 안장, 청장 2명을 골라 산중에 배알하고 배움을 전하게 하였다. (귀금)선생이 이들을 가르쳤으나, 그 은밀한 것은 전하지 않았다.

윤흥이 아내와 함께 (귀금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우리 임금께서 나를 남원에 보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선생의 기예를 전하고자 함인데, 어언 3년에 선생께서 감추시고 전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내가 (돌아가) 복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고는, 윤흥은 술(병)을 받들고 아내는 잔을 잡아 무릎걸음으로 나아가 예와 정성을 다한 뒤에야 (귀금선생이) 감추었던 <표풍> 등 세 곡을 전하였다. 안장은 그 아들 극상과 극종에게 전하고, 극종은 일곱 곡을 지었다. 극종 이후 거문고로써 업을 삼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2)

「악지」(樂志) ‘현금’(玄琴)

기록에 등장하는 ‘이찬(伊湌) 윤흥(尹興)’은 경문왕(景文王) 6년(866)의 모반 사건으로 처형된 인물이므로, 윤흥이 남원에서 귀금의 거문고 음악을 전수하게 주선한 것은 그가 처형되기 전인 9세기 중엽쯤의 일로 볼 수 있다. 귀금의 스승이 속명득이고 속명득의 스승은 옥보고이므로, 사제간의 나이 차를 30년씩이라 하면 옥보고가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는 8세기 후반쯤 된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 1281경)에는 이보다 150년쯤 전 신문왕(神文王) 때인 693년 기록에 거문고가 등장한다. 경주 내 월성(月城)의 국가보물창고인 천존고(天尊庫)에 만파식적(萬波息笛)과 함께 거문고를 국보로 보관하고 있었는데, 당시 국선(國仙) 즉 화랑의 우두머리인 부례랑(夫禮郞, 또는 실례랑失禮郞)이 실종되고 천존고의 국보도 함께 사라지는 변고를 당했다가 부처의 도움으로 모두 되찾았다는 기록(「탑상」(塔像) ‘백률사’(栢栗寺))이 있다.

이로 보아, 8~9세기 사람들인 옥보고나 귀금이 신라에 거문고를 처음 전한 사람들은 아니고, 거문고가 늦어도 삼국통일 직후인 7세기부터 이미 신라에 있었으나 나중에 옥보고와 귀금의 악파(樂派)가 거문고 음악의 주류로 부상하게 되면서 설화로 신비화된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거문고는 통일신라 음악과 악기를 대표하는 삼현삼죽(三絃三竹: 거문고, 가야금, 향비파의 ‘삼현’과 대금, 중금, 소금의 ‘삼죽’)의 하나로 정착했다. 다만, 거문고를 국보로 간수했다는 점이나, 일본 역사서들 속 삼국의 음악과 악기에 관한 기록에 신라 음악을 대표하는 악기가 줄곧 가야금인 것 등으로 보아, 거문고는 가야금보다는 덜 일반적이고 어느 정도는 신비한 악기로 대접받은 듯하다.

3) 고려의 거문고

고려의 속악(俗樂: 향악鄕樂)은 삼국의 음악과 악기를 물려받았으므로 거문고도 비파(琵琶: 향비파), 가야금, 대금 · 중금 · 소금, 장구, 해금, 피리, 박 등과 함께 『고려사』(高麗史) 「악지」에 속악기로 소개되었다.

고려 고종(高宗, 1213~1259) 때 여러 문신들이 놀이 삼아 지었다는 「한림별곡」(翰林別曲) 중 한 절에는 거문고를 포함한 여러 악기를 벌여 놓고 밤이 새도록 노는 장면이 나온다.

阿陽琴아양금 文卓笛문탁덕 宗武中琴종무듕금
帶御香imagefont어향 玉肌香옥긔향 雙伽倻솽개야ㅅ고
金善琵琶금션비파 宗智稽琴종지imagefont금 薛原杖鼓셜원장고
위 過夜과야ㅅ景경 긔 엇더imagefont니잇고
(葉엽) 一枝紅일지홍의 빗근 笛吹뎍취 一枝紅일지홍의 빗근 笛吹뎍취
위 듣고아 imagefont드러지라

아양의 거문고, 문탁의 젓대, 종무의 중금
대어향과 옥기향의 쌍가야금
김선의 비파, 종지의 해금, 설원의 장구
아, 밤새우는 모습 어떠합니까!
매화 가지에 비낀 젓대 소리, 매화 가지에 비낀 젓대 소리
아, 듣고서 잠들고 싶습니다!

제6장, 『악장가사』(樂章歌詞)본

노랫말 맨 앞의 ‘금’(琴)이 거문고임은 문맥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언급되는 나머지 악기는 차례로 젓대(대금), 중금, 가야금 2(쌍가야금), 비파(향비파), 해금, 장구이다. 통일신라 이래의 삼현삼죽과 비교하면, 삼현 중 가야금이 2대로 늘었고, 삼죽 중 소금이 빠졌으며, 반주용으로 장구가 하나 더해진 정도이다.

고려 후기의 대표적 시인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시와 술과 거문고를 즐겨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세 가지를 몹시 좋아하는 선생)이라고도 불렸는데, 그의 문집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금’(琴)을 노래한 시문이 여럿 있다(이규보는 가야금에 관한 시도 많이 남겼으므로 그의 금이 거문고를 가리키는지 가야금을 가리키는지는 앞뒤 맥락을 보고 따져 봐야 한다). 거문고에 관한 것 둘만 보기로 들어 본다.

첫째는 거문고 뒤판에 새기거나 쓴 ‘금명’(琴銘)이다.

「琴銘」
我琴無調, 孰商孰宮?
琴是何物, 聲從何沖?
其泠泠溜溜者, 傳聲於石瀨乎?
其瑟瑟飀飀者, 借韻於松風乎?
若以泠泠者付乎瀨, 瑟瑟者還于松.
則其復寥乎寂乎, 反於大空者乎!

「거문고에 새김」
내 거문고는 곡조가 없나니, 무엇이 상이고 무엇이 궁인고?
거문고란 무엇이며, 소리는 어디서 나오는가?
둥기덩 당당, 여울이 돌에 부딪는가?
스렁 슬기둥, 솔바람 소리를 가져왔나?
둥기덩을 도로 여울로, 슬기둥을 도로 소나무로 돌린다면
다시 쓸쓸하고 적막하여 태허(太虛)로 돌아가리!

“내 거문고에 곡조가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거문고는 실제로는 줄이 없는 무현금(無絃琴)인 듯하다.

둘째는 초당에서 지었다는 시 3수 중 첫 번째, 「장식 없는 거문고」이다.

「草堂三詠: 素琴」
天籟初無聲, 散作萬竅鳴.
孤桐本自靜, 假物成摐琤.
我愛素琴上, 一曲流水淸.
不要知音聞, 不忌俗耳聽.
只爲寫我情, 聊弄一再行.
曲終又靜默, 夐與古意冥.

「초당에서 세 수: 장식 없는 거문고」
천뢰(하늘의 소리)는 처음에 소리가 없건만
(바람으로) 퍼지면 만 가지 구멍 다 울린다
한 그루 오동나무, 본디 고요했건만
사물(거문고)에 의탁하면 쟁쟁 울린다
내 소박한 거문고로
흐르는 물처럼 맑은 곡조 타기 좋아하나니
소리 아는 이 있어야만 하리?
속된 귀가 들으면 또 어떠리?
그저 내 감회를 담아
한 곡 두 곡 희롱할 따름
곡조 끝나면 다시 고요해
옛 사람 뜻같이 아득하기만.

한편, 충남 예산에 수덕사에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재위 1330~1374)이 사용했다는 내용의 금명이 새겨진 거문고 유물이 전해진다. 금명은 19세기 초의 것이고, 왕실의 보물로 전해 내려오던 것을 고종(高宗)의 아들 이강(李堈, 의친왕)이 이 절 만공(滿空)스님에게 주었다는 내용인데, 고려 말의 것이라는 확증은 없다.

4) 조선의 거문고

조선시대의 거문고 관련 자료는 조선 초기에는 궁중의 문헌이 주를 이루다가, 조선 중기 이후부터 민간의 문헌, 악보, 그림의 비중이 점차 높아진다. 특히 조선 전기부터는 소장자의 이름이 있는 악기 실물도 더러 전하기 시작한다.

『세종실록』 권132 「오례」(五禮)에 따르면, 궁중 혼인의례인 가례(嘉禮)와 사신 접대 의식인 빈례(賓禮)의 음악에 거문고를 편성했다. 함께 수록한 거문고 그림은 거문고의 여섯 줄, 열여섯 괘, 술대 등을 뚜렷이 알아볼 수 있게 표현되었다.

『세종실록』 권132 「오례」 중 ‘가례서례’(嘉禮序例)의 거문고

『세종실록』 권132 「오례」 중 ‘가례서례’(嘉禮序例)의 거문고

조선 성종 때 편찬한 『악학궤범』(樂學軌範, 1493)은 향악기 중 거문고를 맨 먼저 수록하면서 그림과 제원, 유래 등은 물론 여러 가지 조현(조율)과 주법까지 상세히 소개했다.

『악학궤범』 영조판 권7 에 실린 거문고 산형

『악학궤범』 영조판 권7 에 실린 거문고 산형

조선시대 거문고의 음악과 이론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거문고 악보집들이다. 약칭 ‘금보’(琴譜)라고 하는 이 악보집들에는 거문고곡의 악보뿐 아니라 거문고의 제원과 주법, 거문고 관련 글들을 종합적으로 엮는 것이 상례였다. 16세기 중반부터 단편적인 악보들이 나온 흔적이 있지만, 온전한 형태로 전하는 것으로는 1572년 안상(安瑺, 생몰년 미상)이 엮은 『금합자보』(琴合字譜, 일명 『안상금보』, 보물 제283호)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거문고보들의 주된 수록곡은 오늘날 (歌曲)의 원형인 노래와 함께 거문고를 타는 금가(琴歌)이고, 차츰 궁중에서 흘러나온 ‘’(與民樂), ‘’(步虛子), 영산회상>(靈山會相) 등의 음악이 더해진다. 16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분포하는 이들 거문고보는 조선시대 음악의 변천 과정을 알려주는 귀한 자료들이다.

거문고보들은 손에서 손으로 필사되거나 일부는 목판본으로 유포되어 민간의 풍류방음악이 전국적으로 균형 잡힌 레퍼토리를 유지하며 발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풍류방음악의 주된 담당층은 중인들이었지만 거문고보는 으레 중국 금의 고사부터 들먹이며 일종의 허위의식으로 선비정신을 강조했으므로 자연스럽게 ‘거문고는 선비의 음악’, ‘거문고는 백악지장’이라는 관념이 정착되었다.

안상(安瑺), 『금합자보』(1572) 중 <평조만대엽> 시작 부분

안상(安瑺), 『금합자보』(1572) 중 <평조만대엽> 시작 부분 악보는 오른쪽부터 세로로 읽으며, 여덟 줄이 한 행을 이루는 총보(score) 형태이다. 제1행 각 줄 첫머리에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쓴 것은 도막(section)과 파트 표시로, 오른쪽부터 1장(一旨), 거문고 합자보(合字), 거문고 구음(肉譜), 노랫말(歌詞), 젓대(대금, 笛), 젓대 구음(肉譜), 장구(杖鼓), 북(鼓)이다. 제1~2행 노랫말은 “오imagefont리 오imagefont리나”이며, 그중 제1행 “오imagefont리” 부분의 거문고 구음(한자)은 “동 스렝, 당, imagefont랭 징 당, 둥 흥, 스렝 둥”으로 읽힌다.

음악 실기를 천시한 조선 사회에서 상식적으로 거문고는 신분이 낮은 궁중과 민간의 전문 악사와 여기(女妓)들이 주로 연주했을 것이나, 양반 선비 가운데도 거문고를 수준급으로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어 거문고가 등장하는 문학작품과 거문고에 관한 사색이 담긴 글을 남겼다. 이러한 거문고 관련 글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중국금과 같이 “금자, 금야(琴者, 禁也)” 계열의 것이다.

한편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의 다음 시조들을 보면, ‘대현’ ‘괘’ ‘자현’(子絃: 유현) 같은 구조명칭이나 ‘우조’(높은 조), ‘막막조’(아주 높은 조) 등의 음악용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것으로 보아 정철이 거문고의 음악적 특징에도 식견이 깊었음은 물론 손수 거문고를 연주하기도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거믄고 大絃(대현) 올나 한 棵(괘) 밧글 디퍼시니
imagefont의 마킨 믈 여imagefontimagefont셔 우니imagefontimage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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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믄고 大絃(대현)을 티니 imagefontimagefont이 다 눅디니
子絃(자현)의 羽調(우조) 올라 낙막됴 쇠온말이
셟기imagefont 젼혀 아니호되 離別(이별) 엇디imagefont

(거문고 대현 올라 한 괘 밖을 짚으니(음을 한 음 높이니) /
어름(합류 지점)에 막힌 물 여울에서 우니는 듯 /
어디서 연잎에 지는 빗소리는 이를 좇아 맞추나니.)

(거문고 대현을 치니 마음이 다 누그러지니 /
자현(유현)의 우조 올라 낙막조(‘막막조’의 잘못) 쇠었더니(높이 탔더니) /
서럽지는 전혀 아니하되 이별 어찌하리?)

이상, 『송강가사』(松江歌辭)

거문고가 선비의 악기인 만큼 선비라면 으레 중국 금이든 거문고든 금을 한 대쯤 장만해 가지고 있어야 할 텐데, 연주도 못 하면서 가지고 있다가 손님이 한 곡 청하기라도 하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마침 중국 옛 시인 도잠(陶潛, 호 연명(淵明), 365~427)이 술을 마시면 줄 없는 금(중국금)을 타악기 삼아 두들기며 노래했다는 고사가 있어, 조선 문인들도 이를 흉내내어 거문고 줄을 끊어 놓고는 거문고 뒤판에 ‘무현금명’(無絃琴銘)이라는 글을 새기거나 써 넣는 재치를 발휘하곤 했다. 기생 황진이(黃眞伊)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 광해군(光海君)의 세자 시절 스승으로 주역(周易) 전문가인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 1553~1630) 등이 묵직한 무현금명을 남겼다.

거문고에 줄이 없음은 본체를 놔두고 쓰임을 없앤 것이라
정말로 쓰임을 없앰이 아니니,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을 머금었어라
소리로 들음은 소리 없이 들음만 못하고, 모양으로 즐김은 모양 없이 즐김만 못하리.
(琴而無絃, 存體去用. 非誠去用, 靜其含動. 聽之聲上不若聽之於無聲, 樂之形上不若樂之於無形.)

서경덕, 「무현금명」(부분)

주역은 소리 없는 거문고요, 거문고는 소리나는 주역이다
(易是無聲之琴, 琴乃有聲之易)

이득윤, 「무현금명」(부분)

다음 그림은 사대부 화가 이경윤(李慶胤, 1545~1611)의 것이라 전하는 <월하탄금>(月下彈琴) 즉 ‘달 아래 거문고 타기’이다. 선비와 동자는 중국 복식을 했고, 선비 무릎 위 악기의 실루엣과 연주 자세는 중국금인데 악기 사이즈와 괘처럼 생긴 부속들은 거문고를 닮았다. 결정적으로, 악기에 줄이 없다! 그렇다면 그림 속 악기가 바로 ‘줄 없는 거문고’ 무현금이고, 그림 제목은 <월하탄금>이나 <탄금대월>(彈琴對月, ‘거문고 타며 달 마중’)보다 그냥 <관월도>(觀月圖, ‘달 구경’) 또는 <무금대월>(撫琴對月, ‘거문고 안고 달 마중’)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이경윤, <월하탄금도>(일명 <관월도> 또는 <탄금대월도>)

이경윤, <월하탄금도>(일명 <관월도> 또는 <탄금대월도>)

실물로 전하는 조선시대 거문고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15세기 문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탁영금’(濯纓琴)이다. 김일손 만년인 1490년경 제작한 것으로 확인된 탁영금은 길이 160cm, 너비 19cm, 폭 10cm로 오늘날의 거문고와 대동소이하다.

탁영금(보물 제957호)

탁영금(보물 제957호)

조선 후기 서예가인 옥동(玉洞) 이서(李漵, 1662~1723,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셋째형)의 유품 가운데도 거문고와 첩(帖, 앨범) 형태의 악보가 전한다. 거문고는 이서의 호를 따서 ‘옥동금’(玉洞琴), 금강산 벼락 맞은 나무로 만들었대서 ‘봉래금’(蓬萊琴), 군자의 악기라서 ‘군자금’(君子琴) 등 이름이 붙었다. 그 유래가 나중 고종 때 문신 이남규(李南珪, 1855~1907)의 문집 『수당집』(修堂集)에 전하는데, 이에 따르면 이서가 금강산에서 벼락 맞은 나무를 얻어 이것으로 거문고를 만들고 뒤판에 금명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옥동금 뒤판에는 이서의 금명은 없고, 후대의 소장자가 이서의 글씨 중에서 집자(集字)한 ‘玉洞’이라는 글자와 윤덕희(尹德熙, 1685~1776, 화가 윤두서(尹斗緖)의 아들)가 쓴 한시가 새겨져 있다.

옥동금 앞면(안산시 성호기념관 소장, 국가민속문화재 제283호)

옥동금 앞면(안산시 성호기념관 소장, 국가민속문화재 제283호)

옥동금 뒷면(안산시 성호기념관 소장, 국가민속문화재 제283호)

옥동금 뒷면(안산시 성호기념관 소장, 국가민속문화재 제283호)

3. 현대의 거문고

조선 후기 들어 궁중 의식음악이 차츰 관악기 위주로 재편되면서 거문고는 궁중에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현재 연주되는 거문고 전통음악은 민간정악과 민속악뿐이고, 20세기 후반부터 다양한 창작음악이 만들어지고 있다.

거문고를 현대식으로 개량하려는 시도는 남북한 모두에서 간헐적으로 있었으나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1) 거문고 정악

거문고가 편성되는 대표적인 민간정악 합주는 풍류(줄풍류)와 가곡반주이다.

줄풍류는 거문고를 중심으로 하는, 규모와 음량이 비교적 작은 순기악합주이다. 줄풍류에 편성되는 악기는 거문고 외에 가야금, 대금, 피리(세피리), 해금, 단소, 양금, 장구 등의 (細樂) 편성이다. 줄풍류 편성의 정악곡으로는 궁중 기원 악곡인 ‘여민락’과 ‘보허사’(步虛詞)(일명 황하청黃河淸), 궁중 기원에 민간 악곡이 첨가된 거대 모음곡인 <영산회상>(靈山會上)(현악영산회상, 일명 중광지곡重光之曲)과 그 일부인 <천년만세>(千年萬歲), 그리고 <영산회상>의 지방 버전인 ‘향제(鄕制) 줄풍류’ 등이 있다. ‘여민락’은 유교, ‘보허자’는 도교(道敎), <영산회상>은 불교와 관계있으므로 19세기 이래 줄풍류를 ‘유불선(儒佛仙) 3가(家)의 음악’이라 불렀다.

전문 성악곡인 가곡의 반주도 마찬가지의 세악 즉 줄풍류 편성이다. 가곡보다 더 대중화된 노래인 시조(時調)는 반주가 없어도 무방하나, 굳이 호사스럽게 반주할 경우 거문고를 포함한 축소된 줄풍류 반주를 대동할 수도 있다.

이상의 정악곡은 합주가 원칙이지만, 줄풍류에 들어가는 악기 중 장구를 제외한 어떤 악기라도 독주나 축소편성으로 자기 파트를 연주할 수 있다. 그래도 음악이 부족하거나 어색하지 않고 나름의 멋을 유지하는 것이 정악의 특징 중 하나이다.

2) 거문고산조와 민속악

거문고는 오랫동안 선비 의식에 물들어 있어 민요, 판소리, 산조(散調) 같은 속곡(俗曲)에 쓰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19세기 말 가야금에서 처음 완성된 산조가 다른 악기들로 확대되면서, 20세기 초 (白樂俊, 1884~1933)이 거문고산조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백낙준에게 거문고산조를 배운 이로는 김종기 · 박석기 · 신쾌동 · 안기옥이 있다. 현재 연주되고 있는 거문고산조로 대표적인 것은 신쾌동류 거문고산조와 한갑득류 거문고산조이다. 한갑득(1919-1987)은 박석기에게 거문고를 배웠다.

신쾌동류(申快童流) 거문고산조는 진양 · 중모리 · 중중모리 · 엇모리 · 자진모리 · 휘모리로 구성되며, 5선보에 채보된 신쾌동류 거문고산조의 악보는 신쾌동의 『현금곡전집』(玄琴曲全集)에 전한다. 한갑득류(韓甲得流) 거문고산조는 진양조 · 중모리 · 늦은중모리 · 중중모리 · 자진모리로 구성되는데, 신쾌동류 거문고산조에 비해 백낙준의 가락을 적게 가지고 있다.

거문고는 굿판에서 유래한 기악합주인 시나위에도 편성된다. 그 밖에 판소리 대목이나 단가(短歌) 등을 한 사람이 부르며 동시에 거문고로 반주하는 거문고병창(竝唱)이 있다.

3) 거문고 창작음악

한국의 전통음악문화에서는 여타 동양의 음악전통이 그러하듯 하나의 악곡이 서양음악 개념에서의 작곡자를 거치지 않고 만들어지기 때문에 작곡자가 명시되어 있는 경우가 드물고, 실제 음악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러운 변천과정을 거친다. 정악에서 특히 그런 경향이 나타나 궁중의 음악이든 민간의 정악이든 간에 작곡자가 누구라는 말은 없다. 산조에 있어서는 유파를 표시함으로써 산조를 ‘엮은’ 사람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산조를 엮은 사람의 연주를 그대로 연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서양음악의 영향으로 이런 전통에도 변화가 생겨 국악에도 작곡의 개념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국악관현악이나 실내악, 중주 및 독주 등 다양한 편성으로 창작음악이 작곡되고 있다. 서양식 작곡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거문고 창작곡은 1967년 이 작곡한 거문고독주곡 <인상>(印象)이다.

4) 거문고의 개량

19세기 성리학자 유중교(柳重敎, 1832∼1893)가 전통적인 거문고를 7현 14괘짜리로 고쳐 만들었다는 기록과 함께 유물이 전하나, 개인 용도에 그쳤다.

20세기 들어 최초의 본격적인 거문고 개량은 1943년경 줄타기 명인 김영철(金永哲)에 의해 이루어졌다. 김영철은 기타(Guitar)와 거문고의 원리를 결합하여 8현 24괘의 철현금을 제작하여 산조 연주와 민요 반주에 활용하였다. 철현금은 거문고와 같이 오른손에 술대를 쥐고 연주하는데, 왼손에는 유리구슬로 현을 짚고 움직여 줄비빔(찰현)악기와 같은 효과를 냈다. 철현금은 지금도 유경화 등 일부 연주자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일찍부터 전통악기의 대대적인 개량사업을 한 북한에서도 거문고 개량을 시도하였다. 북한의 거문고 개량은 평균율 조율을 가능하도록 고쳐 서양악기와 혼합편성할 수 있게 하고, 음역을 확대하고 음색을 부드럽고 풍부하게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여느 관현악기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이 개량은 거문고에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거문고 괘의 수를 늘리고 간격을 좁혀 평균율화하는 것은 가능하다 해도, 거문고 고유의 탁하고 거친 음색, 술대로 내려치거나 왼손으로 농현할 때의 소음 등이 북한이 지향하는 악기 개량 방향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1966년까지도 술대를 비닐 재질로 개조하고 대모 자리에 해면을 먼저 댄 뒤 가죽을 덧대는 등의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나, 결국 거문고 개량은 사실상 포기한 것으로 알려진다. 현재 북한의 민족관현악이나 배합관현악(전통악기와 서양악기의 혼합편성)에는 거문고가 편성되지 않고, 산조나 창작곡에서 제한적으로 쓰인다. 지리적으로 거문고의 발상지인 북한 지역에서 아이러니하게 거문고가 퇴출된 것이다.

남한에서도 거문고 음량과 음역의 확대, 연주형태의 다양화, 전자음향 효과를 목적으로 한 거문고 개량이 산발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1990년경 거문고 연주자 이재화가 아홉 줄짜리 ‘화현금’(和絃琴)을, 나중에는 열 줄의 ‘회현금’(回絃琴)을 선보인 바 있다. 1990년대 후반 한국음악발전연구원은 거문고 뒤판에 음향반사판을 덧붙여 음량을 늘리는 개량을 시도했다. 2003년 악기장 고흥곤은 악기의 뒤판 울림구멍을 넓게 하고 괘의 아랫부분에 구멍을 뚫고 괘를 17로 하나 늘린 ‘다류금’을 제작했다. 일부 국악관현악단들은 9현금, 11현금, 14현금 등을 개발해, 현대음악 연주 중에 개방현의 조현을 바꾸는 수고를 덜도록 했다.

최근 들어 국악 앙상블 그룹의 활동이 늘어나면서 거문고의 연주형태도 다양화되고 있다. 그룹 거문고팩토리는 어깨에 줄로 매달고 서거나 이동하면서 연주할 수 있는 미니거문고인 ‘담현금’(擔絃琴), 세워서 첼로처럼 활로 그어 연주하는 ‘첼로거문고’, 술대를 양손에 들고 거문고 현을 두드려 연주하는 ‘실로폰거문고’를 시도했다.

미국에서 실험적인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거문고 연주자 김진희는 1989년경 대니 페링턴(Danny Ferrington)과 함께 전자 칩(chip)을 달고 줄의 재질을 나일론, 철사줄, 첼로줄 등으로 다양화한 전자거문고를 처음으로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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