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리스트

프란츠 리스트

[ Franz(Ferenc) Liszt ]

프란츠 리스트

프란츠 리스트

출생 - 사망 1811년 ~ 1886년
국적 헝가리
주요작품 단테 교향곡
파우스트 교향곡
교향시 전주곡
교향시 타소 비탄과 승리
교향시 마제파
피아노 협주곡 제1번 E플랫장조(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제2번 A장조(협주곡)
죽음의 무도
헝가리 환상곡
초절 기교 연습곡
파가니니 대연습곡
피아노 소나타 b단조(독주곡)
헝가리 랩소디
사랑의 꿈

오스트리아의 외딴 시골 라이딩(Raiding)에서 10월 22일 태어났다. 아버지는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집사로서 대단한 음악 애호가였으며, 아이는 프란츠 하나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프란츠도 일찍부터 음악과 친해지고 9세 때 피아노 연주회를 열었다. 그 성공에 의해 고장의 귀족으로부터 6년간의 학자금을 보증받고, 빈에서 체르니(Carl Czerny, 1791~1857)에게 피아노를, 또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배우게 된다. 1823년(12세) 빈에서의 제2회 연주회는 베토벤(독일)이 참석해 축복을 받았고, 또 같은 무렵 슈베르트(오스트리아)에게도 소개된 적이 있다.

연주 여행의 시작

1823년 아버지와 함께 파리에 가서 음악원 입학을 지망했으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되고, 결국 작곡만을 개인 교수에 의해 배우게 되었다. 한편, 이듬해의 런던 여행을 시발로 해서, 이후 파리를 거점으로 하는 연주 여행이 정기적으로 행해지게 된다. 이 동안 작곡가로서도 데뷔했지만, 이 면에서의 평판은 연주가로서의 명성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다. 1827년(16세) 아버지의 죽음으로 연주 여행을 중단, 이후 수년간은 파리에 정주하여 음악 교사의 생활을 계속한다.

파리에서의 교우

1830년경부터는 파리의 살롱에 드나들면서 많은 예술가들을 알게 되고 친교를 맺었다. 당시 귀족들이 파리에 갖고 있던 살롱은 예술가나 지식인들의 사교장이며, 프랑스의 예술 활동의 중심이기도 했다. 리스트(헝가리)가 살롱에서 알게 되어 교제한 사람들은 쇼팽(폴란드), 베를리오즈(프랑스) 등의 음악가를 비롯해서 위고, 샤토브리앙, 라마르틴, 조르주 상드 등의 문학가와 사회 사상가인 생시몽 등이었다. 미모의 백작 부인 마리 다구와 알게 된 것도 그녀의 살롱에서였다. 두 사람은 이윽고 연애 관계에 들어가고, 후에 바그너(독일) 부인이 된 코지마(Cosima)를 둔다. 1839년(28세)부터는 다시 연주 여행이 활발해졌으며, 유럽 각지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거장의 이름을 한껏 누렸다. 이 무렵이 되면 「초절 기교 연습곡」(독주곡)이나 「파가니니 연습곡」과 같은 기교적 작품을 쓰기 시작한다.

바이마르의 지도자

1842년(31세)에 바이마르 궁정의 음악 감독 · 지휘자로 취임, 매년 3개월간 이곳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이 직무는 연주 여행의 중요한 일정이 되고 있었는데, 1848년부터는 바이마르에 이주하고, 다시 이듬해에는 그를 쫓아온 비트겐슈타인 백작 부인 카롤리네(Carolyne)와의 사랑의 보금자리를 여기서 꾸미게 된다. 이리하여 바이마르는 리스트(헝가리)의 왕성한 활동의 새로운 거점이 되고 바그너(독일), 베를리오즈(프랑스), 슈만(독일) 등의 작품이 적극적으로 상연되어 갔다.

한편 창작 활동은 절정기를 맞아 2개의 「피아노 협주곡」(1849), 「전주곡」(관현악곡)(1848)을 비롯한 일련의 교향시 「파우스트 교향곡」(교향곡)(1854) 등의 중요 작품이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교사로서의 활동은 여전히 활발해서 뷜로, 타우지히(Karol Tausig, 1841~1871) 등의 영재가 배출했다. 이와 같은 리스트(헝가리)의 다면적인 활동에 의해 바이마르는 어느 사이엔가 독일 예술의 중심지로서 괴테, 실러에 의한 이전의 전성기를 상기시켰다고 한다.

명상의 시대

1858년(47세) 바이마르의 공직을 물러나고, 1861년에는 카롤리네와의 정식 결혼 허가를 교황에게 청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다. 그러나 생각지 않던 파국이 두 사람을 덮쳐, 낙담한 리스트(헝가리)는 그대로 로마에 머무르고 종교 음악에의 정진을 결심한다. 세속을 피해 종교 생활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성직에도 취임했으나, 그 자신이 ‘명상의 시대'라고 부르는 이 시기도 교황 피오 9세의 죽음에 의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바이마르로부터는 복귀 요구가 재삼 있어서 1869년 또다시 이 고장을 방문했는데, 이 해에 사제직을 얻은 뒤로는 언제나 제의를 입었다고 한다. 1871년 고국 헝가리 왕으로부터 국립 음악 학교의 개혁을 의뢰받고 부다페스트 음악 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고국에서의 연주, 교육 활동도 왕성하게 펼쳐져 간다.

바그너(독일)와의 친교

딸 코지마의 남편이었던 바그너(독일)는 리스트(헝가리)의 사위가 되지만, 또 훌륭한 친구이기도 했다. 이 두 음악가의 성격은 많은 점에서 공통되어 있었던 것이다. 만년의 리스트(헝가리)는 그 정력의 대부분을 ‘종합 예술’이라는 바그너(독일)의 커다란 이상의 실현을 위해 소비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런만큼 1883년(72세)에 바그너(독일)를 잃은 슬픔은 컸다. 1886년에는 바그너(독일) 탄생 75주년을 축하하는 음악제가 각지에서 열려 리스트(헝가리)는 런던, 파리를 거쳐 바이로이트로 향했는데, 그 도중에 폐렴에 걸려 7월 31일 바이로이트에서 타계했다.

행동적인 낭만주의자

리스트(헝가리)가 음악사에 남긴 최대의 공적은 바그너(독일)와 함께 낭만주의 음악을 크게 빌고 나아간 점에 있다. 이 두 사람의 적극적인 행동성에 비하면, 같은 낭만파인 슈만(독일)이나 브람스(독일)의 활동은 오히려 보수적이었다고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인생을 다채롭게 채색하는 이 행동성은, 다소 화려하고 외면적이면서도 왕성한 설득력을 가진 교향시적인 작풍에 가장 잘 반영되어 있다.

리스트(헝가리)가 교향시의 완성자라고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또 쇼팽(폴란드)과는 다른 화려하고 거장적인 피아노 연주법의 개척도 이 성격에 유래하고 있다. 이러한 행동성은 원래 낭만주의 음악에 내재하는 요소의 하나로서, 그런 만큼 승적에 들어간 만년의 변모는 바그너(독일)의 카톨리시즘으로의 전향과 함께 낭만주의 음악의 쇠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또한 창작 · 연주면에서의 공적과 함께 바그너(독일)를 비롯한 그리그(노르웨이)나 스메타나(체코) 등 동시대의 음악가들에게 적극적인 원조와 격려의 손길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공적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