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브람스

요하네스 브람스

[ Johannes Brahms ]

요하네스 브람스

요하네스 브람스

출생 - 사망 1833년 ~ 1897년
국적 독일
주요작품 교향곡 제1번 c단조
교향곡 제2번 D장조 Op.73
교향곡 제3번 F장조 Op.90
교향곡 제4번 e단조 Op.98
하이든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56a
대학 축전 서곡
비극적 서곡 Op.81
헝가리 무곡 제5번
피아노 협주곡 제1번 d단조 Op.15
피아노 협주곡 제2번 B플랫장조 Op.83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 협주곡 a단조 Op.102
현악 6중주곡 제2번 G장조 Op.63
피아노 5중주곡 f단조(실내악곡)
클라리넷 5중주곡 b단조(실내악곡)
현악 5중주곡 F장조 Op.88
현악 4중주곡 제1번 c단조 Op.51의 1
현악 4중주곡 제2번 a단조 Op.51의 2
현악 4중주곡 제3번 B플랫장조 Op.67
피아노 4중주곡 제1번 g단조(실내악곡) Op.25
피아노 4중주곡 제3번 c단조 Op.60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G장조 Op.78
바이올린 소나타 제2번(실내악곡) A장조 Op.100
바이올린 소나타 제3번 d단조 Op.108
첼로 소나타 제2번 F장조 Op.99
피아노 소나타 제3번 f단조 Op.5
헨델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Op.24
왈츠 Op.39
헝가리 무곡집
파가니니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35
피아노 소품(독주곡)
독일 레퀴엠

엘베(Elbe) 강구에 면한 독일 최대의 항만 도시 함부르크에서 5월 7일 극장 관현악단의 콘트라베이스 주자인 요한 야코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는 4남매로 누나 하나와 동생 둘이 있었으며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음악의 기초를 배우고 음악의 재능을 일찍 나타내고 있었다. 7세부터 도시의 교사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10세부터는 당시 함부르크 제일의 음악가였던 마르크스젠(Eduard Marxsen, 1806~1887)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다. 얼마 후 가난한 살림을 돕기 위해 편곡이나 술집의 피아니스트로서 일하는 한편 작곡도 조금씩 하기 시작한다.

최초의 연주 여행

1850년(17세) 다섯 살 연상의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이(Ede Reményi, 1828~1898)와 알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생애에서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1853년부터는 둘이서 최초의 연주 여행을 떠나, 그 도중 하노버에서 레메니이의 친구 요제프 요아힘과 알고 친교를 맺었다. 대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Josef Joachim, 1831~1907)은 그 후에도 브람스(독일)의 창작의 좋은 조언자로서 평생 변치 않는 우정의 고리를 엮는다.

두 사람은 다시 바이마르(Weimar)로 리스트(헝가리)를 방문했지만, 리스트(헝가리)와 브람스(독일)의 음악은 서로 이질적이기 때문에 다같이 비판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의 리스트(헝가리) · 바그너(독일)파와 브람스(독일)파의 대립의 한 원인은 이미 이때에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일이 있어서 연주 여행도 또 중단되고 말았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는 또다시 요아힘을 의지하고 그 소개를 얻어 뒤셀도르프로 슈만(독일) 부처를 찾아가게 되었다.

슈만(독일)과의 만남

부처는 이 미지의 청년 음악가를 따뜻이 맞이했다. 그 비범한 재능을 인정한 슈만(독일)은 오래간만에 평론 ‘새로운 길’을 『음악신보』에 발표하고 브람스(독일)를 세상에 소개한 것 외에 작품의 출판도 적극적으로 도와 주었다. 이리하여 드디어 성공의 길을 걷기 시작한 브람스(독일)는 그 이듬해 슈만(독일)의 라인 강 투신 비보에 놀라 곧 뒤셀도르프를 방문 비탄에 잠긴 클라라와 아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클라라와의 친교도 평생 계속하게 되었다.

1857년(24세)부터는 데트몰트(Detmold)의 궁정 음악가로서 근무하고, 「피아노 협주곡 제1번」(1858)을 비롯한 여러 작품이 완성되었지만 이 협주곡의 초연은 평이 나빴다. 게다가 이 곳에서 서로 알게 되어 장래를 맹세한 아가테(Agathe)와의 약혼도 깨져서 실의 속에 1859년 함부르크로 돌아가게 된다. 그 후 잠시 동안은 합창지휘나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가 1862년(29세) 9월, 마침내 빈 이주를 결심하고 떠났다.

어머니의 죽음과 레퀴엠

빈에 옮긴 뒤로는 창작도 진척되고 연주 활동도 활발해져서 착실하게 지위를 확립하고, 밝고 쾌적한 나날이 계속되어 갔다. 1865년(32세) 2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고 함부르크로 급히 갔으나 임종은 못했다. 이 슬픈 경험이 현안이던 「독일 레퀴엠」(성악곡)은 완성의 결의를 새롭게 하였다. 1868년(35세), 「독일 레퀴엠」(성악곡)은 그 제5악장을 제외한 전곡이 그 자신의 지휘로 브레멘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이름은 일약 유명해졌으며, 한편으로는 「헝가리 무곡」(독주곡)의 출판(1869)도 호평을 받았다.

「교향곡 제1번」에의 도정

1872년(39세)의 아버지의 죽음은 슬펐으나 고향 함부르크와의 유대를 끊고 빈의 음악생활에 몰두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 뒤 ‘빈 악우 협회’의 예술 감독으로 취임하여 매우 바쁜 생활을 하였지만, 보람이 있는 이 일은 창작에도 큰 자극이 되어 「하이든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1873)을 비롯한 명작이 완성되어 갔다. 교우 범위도 넓어져 브람스(독일)의 존재는 빈의 음악 활동에 있어 불가결한 것이 되었지만, 베토벤(독일)의 뒤를 잇는 교향곡 완성의 소망이 또다시 그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1875년(42세)에 공직을 사임하고 「교향곡 제1번」에 몰두, 약 21년의 세월에 걸쳐 구상한 대교향곡은 마침내 완성을 보았다.

수확이 많은 장년기

충실한 창작 생활은 그 후에도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교향곡 제2번」(1877), 「바이올린 협주곡」(1878), 「대학 축전 서곡」(1880), 「피아노 협주곡 제2번」(1881), 「교향곡 제3번」(1883) 등의 대표적 걸작은 잇따라 완성되어 간다. 그러나 이 화려한 장년기도 「교향곡 제4번(교향곡)」(1885)과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 협주곡」(1887)으로 전환기를 맞이한다. 창작력의 쇠퇴를 의식한 브람스(독일)는 대작에서 실내악이나 구작의 개편에 주안을 두기 시작하였으며, 1891년(58세)에는 약식의 유서도 작성했다. 그러나 우연히 알게 된 클라리넷의 명수 뭘펠트(Mühlfeld)는 그의 창작에 마지막 등불을 밝혀 명작 「클라리넷 5중주곡」(1891)을 완성시키게 된다.

빛나는 해와 고독의 만년

1895년(62세)은 빛나는 해였다. 5월에 황제로부터 ‘예술과 과학에 대한 대훈장’을 받았다. 9월에는 마이닝겐의 신(新)연주회장에서 바흐(독일), 베토벤(독일), 브람스(독일)만의 작품에 의한 기념 연주회가 열렸다. 한스 폰 뷜로가 남긴 ‘3대 B’라는 말이 여기서도 지켜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896년 사랑하는 클라라의 부보(訃報)를 접한 브람스(독일)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는데, 가정을 갖지 않은 거장의 만년은 너무도 고독했다. 체력의 쇠퇴는 뚜렸했으며, 그 원인이 간암이라고 밝혀졌을 때는 이미 절망적이었다. 1897년 4월 3일, 브람스(독일)는 두세 명의 친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일생을 마감했다.

브람스(독일)는 보수적이고 내성적인 로맨티시스트였다. 그 음악은 행동적인 바그너(독일)나 리스트(헝가리)처럼 화려하고 위압적인 울림은 모자라지만, 차분하고 보석처럼 빛나는 매력을 간직하고 있다. 음악사상 특히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것도 아닌 브람스(독일)가 바흐(독일)나 베토벤(독일)과 나란히 칭송되는 일이 있음은 독일 음악의 정신적인 전통을 더없이 풍부하게, 또 엄숙하게 이어받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