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 Johann Sebastian Bach ]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출생 - 사망 1685년 ~ 1750년
국적 독일
주요작품 (관현악곡)
(관현악곡)
(협주곡)
(협주곡)
(협주곡)
(협주곡)
(실내악곡)
(실내악곡)
(독주곡)
(독주곡)
(독주곡)
(독주곡)
(독주곡)
이탈리아 협주곡
(독주곡) BWV.578
(독주곡)
전주곡(환상곡)과 (독주곡) g단조 BWV.542
(독주곡)
(독주곡)
(독주곡)
(독주곡)
(독주곡)
(성악곡)
(성악곡) BWV.245
(성악곡)
(성악곡)
(성악곡) 그리스도는 죽음의 포로가 되어도 BWV.4
(성악곡) 저녁이 되니 나와 함께 있으라
(성악곡) 나 기꺼이 십자가를 지겠노라
(성악곡) 우리의 하느님은 견고한 성이시도다
(성악곡) 눈 뜨라고 부르는 소리 있도다
(성악곡) 가만히 잠자코 말하지 말아요
(성악곡) 우리들은 새 영주님을 모셨다

같은 해의 태생으로는 (독일)이 있다. 아이제나흐는 튀링겐의 숲 서북단에 위치하는 자그마한 문화적인 도시로서 J. 암브로지우스의 막내 아들로 3월 21일 태어났다.

음악의 명문 바흐(독일) 가(家)

바흐(독일) 가는 200년에 걸쳐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해 온 유럽 최대의 음악가계이며, 또 대대로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집안이기도 하였다. 9세 때 어머니, 10세 때 아버지를 잃은 뒤, 오르드루프(Ohrdrf)의 오르간 주자였던 맏형 요한 크리스토프(Johann Christoph, 1645~1693)에게 맡겨져, 여기서 학교 교육과 음악 교육을 받았다. 다시 1700년(15세)부터는 뤼네부르크(Lüneburg)로 옮겨 학업과 음악 공부를 계속했다.

1703년에 바이마르 공(公)의 조카 요한 에른스트의 궁정 바이올리니스트로 취직, 이어 아른슈타트(Arnstadt)의 신교회 오르가니스트 겸 합창 지휘자로 취임하여 음악 활동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이 무렵 대(大)오르가니스트 북스테후데의 연주를 듣기 위해 휴가를 얻어, 뤼베크(Lübeck)로의 유명한 도보 여행을 했다. 그런데 그의 연주에 감격한 나머지 귀임이 늦어지고, 이것이 큰 원인이 되어 아른슈타트를 떠나게 된다. 1707년(22세) 뭘하우젠(Mühlhausen)의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취임, 서로 사랑하던 마리아 바르바라(Maria Barbara)와 결혼하고 교회 음악의 개혁을 적극적으로 주도했으나, 교회측과 음악관이 대립되어 물러나게 되었다.

바이마르의 궁정 음악사

1708년 또다시 바이마르(Weimar)의 궁정 음악사로 취직했는데, 프로테스탄트인 영주 빌헬름 에른스트(요한의 숙부)는 열렬한 문화 보호자로서, 특히 교회 음악을 중시하고 바흐(독일)에게 많은 지원을 충분히 해줌으로써, 이후 1717년까지의 10년간 바흐(독일)의 타고난 재능은 혜택받은 환경 속에서 풍부한 열매를 거두게 된다.

이 시대의 활동의 중심은 오르간 연주와 그를 위한 작곡으로, 전주곡 · (독주곡) · 토카타 · 코랄 전주곡의 다수가 여기서 작곡되었다. 또 당시 궁정에 도입된 신선한 이탈리아 음악, 특히 협주곡 양식을 배운 것은 커다란 수확이었다. 가정 생활에 있어서도 W. 프리데만과 C. P. 엠마뉴엘을 비롯한 5명의 아이를 두고 키운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과의 사이에 불화가 생겨, 새롭게 활동할 고장을 찾아 쾨텐(Cöthen)으로 향하게 된다.

그 생애의 최고의 시대

1717년(32세) 쾨텐 공 레오폴트는 바흐(독일)를 궁정 악장에 임명하고 후하게 대우했다. 젊은 쾨텐 공은 비록 교회 음악은 중시하지 않았지만, 폭 넓고 깊이 있는 음악적인 교양이 있었으며, 그 궁정 악단도 뛰어났다. 악단의 지휘와 실내악의 연주를 위임받은 바흐(독일)는 종교 음악을 잊기라도 한 것처럼 명랑하고 활달한 기악곡의 창작에 몰두하여 「(협주곡)」과 「(독주곡)」을 비롯한 기악곡의 대부분을 여기서 완성했다.

1720년(35세)에 사랑하던 아내를 갑자기 잃고 비탄에 잠겼으나, 이듬해에는 안나 막달레나(Anna Magdalena)와 재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후 J. 크리스티안을 포함한 13명의 아이가 태어난다. 같은 해에 레오폴트도 또한 아내를 맞이했는데, 그녀의 음악에 대한 몰이해로 공의 음악열은 식어갔다. 한편 바흐(독일)도 성장한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대학이 있는 도시로 이주를 열망하고, 행운이 많았던 쾨텐을 떠나 라이프치히의 교회에 취직하게 된다.

자유 도시 라이프치히

활기에 넘친 라이프치히(Leipzig)의 문화의 중심은 대학과 교회였으며, 특히 성 토마스 교회는 음악 교육에 열심이어서 부속 고등 학교를 갖고 있었다. 1723년(38세) 바흐(독일)는 드디어 이 학교의 칸토르(합창장)에 임명되고, 학교와 교회 음악의 모든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의 적극적인 활동은 학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시와 교회와 대학이라는 세 체재간의 반목에 화를 입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이윽고 그토록 왕성했던 의욕도 줄어들고, 다른 도시로의 이직까지 생각하게 된다. 특히 1733년에는 드레스덴(Dresden)의 궁정 음악가가 되려고 「미사 b단조」의 일부를 가톨릭 신자인 작센 선거후(選擧候)에게 헌정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베를린 여행

라이프치히에 있어서 교회 음악의 창작은 명작 「(성악곡)」을 완성한 1729년(44세)경을 정점으로 해서 쇠퇴해 간다. 그리고 계몽사조가 지배하기 시작했던 당시 그의 음악은 너무 기교적이어서 자연스러움이 결여되었다고 비난받기도 했다. 1736년(51세)경부터는 방대한 자신의 작품을 정리, 개정, 출판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그리고 음악가로서 대성한 아들들의 활약은 고독한 그에게 있어 커다란 위로였다.

1747년(62세), 프리드리히 대왕을 섬기는 엠마뉴엘을 베를린으로 찾아간 늙은 바흐(독일)는 왕의 접대에 의해 장수시(Sans Souci)의 궁전에서 어전 연주를 했다. 이 마지막 영광이 인연이 되어 「(실내악곡)」을 완성한 그는 오로지 「(실내악곡)」에 심혈을 쏟아 대위법 음악의 정수를 나타내려 힘썼다. 그러나 시력의 급격한 쇠약 때문에 이 대작은 미완으로 끝났으며, 1750년(65세), 한때는 시력을 회복했으나 졸중(卒中)의 발작에 쓰러져 3월 28일 타계하였다.

완성과 개척

J. S. 바흐(독일)는 「(실내악곡)」에서 볼 수 있듯이 전통적인 음악의 완성자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평균율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독일)으로 하여금 ‘화성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했던 새로운 음악의 개척자이기도 했다. 그가 전통성과 미래성을 종합한 음악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도, 열렬한 프로테스탄트로서의 깊은 신앙과 동시에 근대적인 시민정신에 입각한 대담하고 호탕한 그 인간성에 의한다고 하겠다. 바흐(독일)의 음악이 종교라는 테두리를 넘어 오늘날도 아직 커다란 인간적 감동을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며, 음악 그 자체로서도 높은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