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 Whilhelm Richard Wagner ]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

출생 - 사망 1813년 ~ 1883년
국적 독일
주요작품 지크프리트 목가
베젠돈크 가곡집
방랑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로엔그린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악극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4부작 니밸룽겐의 가락지
전야제 라인의 황금
제1일 발퀴레
제2일 지크프리트
제3일 신들의 황혼
무대 신성 제전극 파르지팔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5월 22일 태어났다. 베르디(이탈리아)가 태어나고 멘델스존(독일)이 네 살, 슈만(독일)이 세 살, 리스트(헝가리)가 두 살이 되는 해이다. 라이프치히는 작센의 대도시로서 상업 도시임과 동시에 문화 도시로서도 유명하고, 바그너(독일) 탄생 후 5개월 만에 라이프치히 전쟁의 싸움터가 된다. 아버지는 연극을 좋아하는 경찰 서기였으며, 아홉번째 자녀인 리하르트가 태어난 지 얼마 후 티푸스로 별세했다. 어머니는 그 후 9개월 만에 궁정 극장의 배우 가이어(Geyer)와 재혼하여, 반년이 지나 열번째 자녀를 낳았으므로 리하르트의 진짜 아버지는 가이어가 아니겠느냐는 견해도 있다.

어렸을 때의 리하르트는 가이어의 지도 밑에 연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지만, 그림을 장기로 했던 계부는 리하르트를 화가로 만들 작정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가이어도 또한 1821년(8세)에 타계하여 숙부에게 맡겨져 초등 교육을 받는 동시에 음악 공부도 시작했다. 처음에 베버(독일)의 「마탄의 사수」(오페라)에 매료된 소년 바그너(독일)는 이윽고 베토벤(독일)의 음악을 접하여 감격해서 「교향곡 제9번」의 사보와 피아노 편곡에 열중했다.

방랑의 청년 시대

1831년(18세)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 혁명 후의 자유주의적인 풍조 속에서 학교생활을 보냈으나 자기 혐오에 빠졌다. 그는 이윽고 본격적인 음악 수행에 열중하여 토마스 칸토르였던 바인리히(Christian Theodor Weinlig, 1780~1842)에게, 음악을 배우면서부터 커다란 진보를 나타냈다. 1832년(19세) 오페라 처녀작 「혼례」를 작곡했으나 후에 파기해 버렸다. 이듬해 뷔르츠부르크(Würzburg)에서 합창 지휘자로 취임한 뒤부터 음악의 편력 시대에 들어간다. 1834년(21세) 베트만(Bethmann) 오페라단의 지휘자로 취임했으며 최초의 아내가 되는 여우 미나(Minna)와 알게 되었다.

또한 「연애 금제」에 착수했는데 이 오페라는 당시 문학 혁명 운동이었던 ‘젊은 독일’의 사상을 담은 것이었다. 미나가 베트만 오페라단의 해산으로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오페라단에 소속되자 바그너(독일)는 그녀를 따라 1836년 11월 24일 쾨니히스베르크 근교에서 결혼했다. 1837년(24세)에는 리가(Riga)에서 극장 지휘자가 되었으나 2년 후에는 이 극장도 해산한다. 빚에 고민한 바그너(독일)는 마침내 국경을 몰래 넘어 지독한 폭풍우 속에서 런던으로 향했으며, 다시 1839년(26세)에는 파리를 갔다. 마이어베어를 의지했지만 적당한 일거리가 없어서 음악 잡지에의 투고나 사보, 교정의 삯일을 해서 입에 풀칠하는 수년간이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이 고난의 수년간에는 최초의 본격적 오페라 「리엔치」와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오페라)이 작곡되어 갔다.

왕립 작센 궁정 지휘자

1841년(28세) 고국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의 궁정 극장으로부터 그 전 해에 완성한 「리엔치」를 채용했다는 쾌보가 전해졌으며,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오페라)의 베를린 극장 채용 통지도 왔다. 하늘에라도 오를 듯한 기쁨으로 파리를 떠난 바그너(독일)는 귀국 길에 처음으로 라인 강을 보고 감격한 나머지 ‘조국 독일에 영원한 성실을 맹세하리라’고 적었다. 또한 1843년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오페라)도 드레스덴에서 초연되고 이 해에 그는 마침내 왕실 지휘자로 임명된다. 바쁜 연주 활동 사이에도 왕성한 창작 활동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1845년 「탄호이저」(오페라), 1847년 「로엔그린」(오페라)의 문제작이 완성, 논의를 빚으면서도 상연되어 갔다.

망명의 시대

1848년(35세) 파리에서 일어난 2월 혁명의 여파는 전유럽에 퍼지고, 얼마 후 드레스덴까지 도달했다. 궁정 생활에 실망하고 있던 바그너(독일)는 자진해서 드레스덴의 혁명 운동에 몸을 던졌으나 운동은 효과를 보지 못하고, 결국 정부군의 승리에 의해 경찰 당국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한때 바이마르의 리스트(헝가리) 집에 몸을 숨겼으나 끝내 독일에서는 숨을 곳이 없어졌음을 깨닫자 스위스 망명을 결심하고 취리히로 향했다. 이후 9년간을 흔히 ‘취리히 시대’라고 부른다. 『혁명과 예술』을 비롯한 이론적인 저술은 이 시기에 이루어졌는데, 여기에는 철학자 포이어바흐(Feuerbach)의 영향이 보이며, 『미래의 예술 작품』(1849)이나 『오페라와 드라마』(1851)에 실린 종합 예술의 이론은 훗날의 대작 「니벨룽겐의 가락지」에 의해 구체적으로 결실하는 것이다.

베젠돈크 부인과의 연애

뉴욕의 견직물 거래소 유럽 대표자 베젠돈크(Wesendonk)는 취리히 시대의 바그너(독일)의 유력한 후원자였다. 그의 젊은 아내 마틸데(Mathilde)는 바그너(독일)의 제자였으나 사제 관계는 이윽고 열렬한 연애 관계로 발전해 갔다. 마틸데의 시에 작곡한 「온실에서」를 비롯하여, 그에게는 귀한 5곡의 가곡은 이 시기의 산물이었는데 결국 두 사람은 냉정을 되찾고 파국을 면한다. 이 연애 체험은 작곡중이던 「트리스탄과 이졸데」(오페라)에 농후하게 반영되었으며 쇼펜하우어의 염세 철학에 경도,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

1859년 「트리스탄과 이졸데」(오페라)의 완성은 망명 시대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1862년(49세) 추방을 완전히 해제받고 또다시 자유로운 활동에 들어가는 기회가 왔는데, 이 해에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오페라)의 대본도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또 비평가 한슬릭과 적대하기 시작한 것도 같은 해였으며, 소수의 지지파와 다수의 반대파의 싸움 속에서 바그너(독일)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친 것은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였다. 뮌헨 왕궁의 궁정 지휘자가 된 그는, 젊은 국왕의 따뜻한 대우 아래 또다시 예술 혁신 운동에 힘을 기울여 갔는데, 필세의 대작 「니벨룽겐의 가락지」의 완성을 재촉한 것도 다름 아닌 국왕이었다.

1871년(58세) 바그너(독일)는 자작 상연을 위한 이상적인 극장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미 명성이 확고해진 대가 바그너(독일)의 이 계획은 국왕을 비롯해서 많은 지지자를 얻고 자금도 순조로이 모여서 1876년(63세)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이 완성, 「니벨룽겐의 가락지」의 초연으로 역사적인 낙성식이 거행되었다. 그 자신도 자택을 바이로이트(Bayreuth)에 두고, 이후 이 고장은 명실 공히 바그너(독일) 음악의 성지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니체와의 결별

추방 해제 후의 동분 서주 시대부터 그의 신변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미 미나와 별거중이던 바그너(독일)는 리스트(헝가리)의 딸 코지마를 알게 되고 두 사람의 사이는 급속히 진척되어 간다. 당시 코지마(Cosima)는 제자 한스 폰 뷜로의 아내로서 세 아이가 있었다. 이 동안 그와 코지마 사이에는 두 딸과 장남 지크프리트가 태어나고, 미나의 급서도 있어서 1870년(57세) 8월에 두 사람은 결혼하고 뒤엉켰던 문제도 해결되었다. 1868년 24세의 소장 철학자 니체(F. W. Nietzsche, 1844~1900)와 서로 알게 된 것도 잊어서는 안 되는 사건이었다.

니체는 이전부터 그의 음악에 경도하고, 바그너(독일)파의 이를테면 기수와 같은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쇼펜하우어의 영향하에 있었던 음악가와, 독자적인 사고의 길을 걷기 시작한 천재 철학자의 사상은 언젠가는 떨어져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바그너(독일)의 타고 난 공격 버릇이 이것에 얽히고, 다시 「파르지팔」(오페라)의 구제 사상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니체도 한슬릭과 마찬가지로 통렬한 바그너(독일) 공격자가 되는 것이다.

종막의 코러스

염원이던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 설립과 「니벨룽겐의 가락지」의 초연(1876년) 이후의 바그너(독일)의 왕성한 활동은 그치지 않았다. 축전극 「파르지팔」(오페라)의 완성이 당면 목표였지만, 문필 활동도 이것과 병행하여 활발했다. 반(反)바그너(독일)파에 대한 대항책으로 『바이로이트 시보』를 창간하고, 변함 없는 투지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리스도교적 구제 사상을 강조한 『종교와 예술』(1880)을 비롯한 수편의 논문도 발표되었다. 1882년(69세) 드디어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오페라)이 완성, 축제 극장에서 초연되었는데 지휘자가 건강이 나빠서 제3막 도중부터는 스스로 지휘봉을 들게 되었다. 이것이 자작 오페라의 마지막 지휘로서, 이 해의 12월 베네치아에서 19세 때의 작품 「교향곡 제1번」을 지휘한 것이 인생 최후의 지휘였다.

이듬해 1883년(70세) 2월 11일 최종 논문 『인간성에 있어서의 여성적인 것에 대하여』를 베네치아 숙소에서 기초했다. 12일 밤은 가족과 함께 단란하게 지낸 뒤 혼자 피아노 앞에 앉아 「라인강의 황금」의 종막 코러스를 연주했다. 논문을 집필중이던 바그너(독일)는 1883년 2월 13일 오후 3시 심장 발작으로 급서했다.

종합 예술의 이상

바그너(독일)의 이상은 시와 음악과 무대를 완전히 종합한 이른바 악극의 창조였다. 따라서 그 영향은 예술의 각 분야에 걸쳐 볼 수 있는데, 특히 무한 선율과 지도 동기의 구사, 화성의 표현 능력의 철저한 추구 · 확대 및 반음계적 화성의 편애, 그리고 대규모의 관현악법 등, 동시대와 후세의 음악에 준 영향은 압도적이었다. 바그너(독일)는 같은 낭만파인 슈만(독일)이나 브람스(독일)와는 달리 외향적 · 행동적인 천재로서 열렬한 숭배자를 거느리고 있었지만, 동시에 너무도 공격적인 성격 때문에 결국에는 한슬릭과 니체까지도 적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리하여 바그너(독일)파와 반 바그너(독일)파의 대립은 그 후의 음악사의 흐름을 양분할 만큼 치열한 것이 되었으며, 최근에 이르기까지 찬반은 어찌되었든 그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던 음악가는 전혀 없다고 할 수 있는 상태였다. 만약 음악면에서만 본다면 바그너(독일)의 종합 예술의 이상은 음악의 고전적인 체계를 완전히 파괴하고, 시와 무대를 굴종시킴으로써만 실현 가능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