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리아 폰 베버

카를 마리아 폰 베버

[ Carl Maria Friedrich Ernst von Weber ]

출생 - 사망 1786년 ~ 1826년
국적 독일
주요작품 피아노곡 (독주곡)
오페라 마탄의 사수

아버지 프란츠 안톤(Franz Anton)은 여러 가지 직업을 편력하여 오이틴(Eutin) 시 관현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 극장 감독, 지휘자를 지낸 적이 있다. 그 때 카를이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극단과 함께 각지를 다녔다. 10세 무렵부터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우고, 다시 잘츠부르크에서 요제프 (오스트리아)의 동생 미하엘에게 대위법을 배우고 작곡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뮌헨, 프라이부르크, 빈, 카를스루에, 슈투트가르트 등지를 전전하면서 자작의 오페라 발표를 중심으로 창작 · 지휘 활동에 종사했는데, 큰 성공도 거두지 못한 채 생활하고 있었다.1811년(25세) 뮌헨에서 클라리넷 주자 바에르만(Heinrich Baermann, 1784~1847)과 알게 되어 2곡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비롯, 많은 기악 작품을 발표하고 호평을 받는다.

이 무렵 아펠(J. A. Apel)의 『요괴담』에 흥미를 느끼고, 명작 (오페라)에 대한 힌트를 갖기 시작했다. 1813년 프라하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초빙되고부터는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독일 오페라의 상연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나폴레옹 침략의 기운에 애국적인 곡을 많이 쓰고, 국민의 사기를 고무해서 커다란 성공을 거둠과 동시에 독일 국민 오페라 확립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영상의 문제로 극장측과 충돌하여 1816년 이 지위를 그만두었다. 이듬해, 이전부터 사모하고 있었던 가수 카롤리네 브란트(Caroline Brant)와 결혼 후는 방랑벽도 자취를 감추고 창작에 몰두하는데, 피아노곡 「(독주곡)」(1819)는 그의 아내를 위해 쓴 것이다.

1820년(34세) 이전부터 구상하고 있었던 오페라 (오페라)를 완성, 이듬해의 초연은 때마침 고조되던 독일 국민 의식에 영합되어 크게 명성을 높였다. 이해에는 표제 음악적인 「피아노 소협주곡」도 완성했다. 빈의 케른트너토어(Kärntnertor) 극장으로부터 의뢰된 오페라 「오이뤼안테 Euryanthe」(1823)의 초연은 실패하고 더욱이 이 무렵부터 지병인 결핵도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어 런던의 코벤트 가든 극장으로부터 좋은 조건으로 의뢰받은 오페라 「오베론 Oberon」을 완성, 1826년 쇠약한 몸으로 런던에 가서 4월 12일의 초연을 지휘한 뒤 병이 악화하여 6월에 그곳에서 40세의 생애를 마쳤다. 베버(독일)는 (오스트리아)와 함께 독일 낭만파 음악의 초기를 대표하는 음악가의 한 사람으로, (오페라)를 비롯한 독일 국민 오페라의 확립은 그 최대의 공적이었다. 이것은 독일의 국가적 통일을 바라는 애국심의 고양이라는 당시의 사회 조건에도 바탕을 둔 것으로서, 베버(독일)는 이와 같은 넓은 사회적 시야를 가진 선구적인 음악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아내 콘스탄체는 베버(독일)의 숙부의 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