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

[ Frédéric François Chopin ]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

출생 - 사망 1810년 ~ 1849년
국적 폴란드
주요작품 레 실피드
피아노 협주곡 제1번 e단조(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제2번 f단조 Op.21
첼로 소나타 g단조 Op.65
피아노 소나타 제2번 b플랫단조(독주곡) 장송
피아노 소나타 제3번 b단조 Op.58
발라드 제1번 g단조(독주곡)
스케르초 제2번 b플랫단조(독주곡)
발라드 제3번 A플랫장조 Op.47
24개의 전주곡 Op.28
제15번 D플랫장조 빗방울
녹턴(관현악곡) 제2번 E플랫장조 Op.9의 2
제5번 F샵장조 Op.15의 2
연습곡
마주르카(독주곡)
왈츠
폴로네즈 제3번 A장조 군대(독주곡) Op.40의 1
제6번 A플랫장조 영웅 Op.53
즉흥곡

바르샤바 근교의 젤라조바 볼라(Zelazowa Wola)에서 3월 1일에 태어났으며, R. 슈만(독일)도 같은 해에 출생했다. 아버지 니콜라스(Nacolas)는 폴란드에 귀화한 프랑스인이며 어머니는 폴란드 귀족 출신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장남 프레데리크와 누나 루드비카(Ludwika) 그리고 누이 동생 둘이 있다. 모친의 기초 교육 뒤, 지브니(Wojciech Zywny, 1756~1842)로부터 정식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프레데리크는 일찍부터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고 1818년(8세) 바르샤바에서 최초의 공개 연주회를 열었다.

바르샤바 음악원 시대

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음악가로서 입신할 것을 결심해 1826년(16세)에 바르샤바(Warsaw) 음악원에 입학, 본격적인 음악 수업에 들어갔다. 중학 시대부터의 작곡 스승 엘스너(Józef Elsner, 1769~1854)는 쇼팽(폴란드)의 장점을 잘 간파하여, 그 독창성을 키우도록 지도하는 좋은 스승이었다. 같은 해에 베를린을 여행하고, 1829년(19세)에는 동경하던 빈 여행을 떠나 유럽 음악계를 견문함과 동시에 자작의 연주회를 열어 인정받았다. 음악원 시대에 소프라노 가수 콘스탄치아 글라드코프스카(Konstancia Gladkowska)에게 연정을 품었는데, 이 분홍빛 가슴은 이윽고 「피아노 협주곡 f단조」와 「왈츠」 Op.70의 3에 물들여졌다. 또한 국제 도시로의 여행이 폴란드인으로서의 자각을 높인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빈에서 파리로

1830년(20세) 바르샤바에서 2회의 연주회를 열고 성공을 거둔 쇼팽(폴란드)은 또다시 빈으로 연주 여행을 떠났는데, 이 여행은 조국 폴란드와 영원한 결별이 되었다. 그러나 빈에서 연 2회의 연주회는 성과가 오르지 않았고, 이에 더해 폴란드 혁명이 일어나 오스트리아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반 폴란드 감정도 높아지고 있었다. 동행하던 친구는 혁명 참가를 위해 귀국하고, 초조한 마음과 실의에 찬 쇼팽(폴란드)은 빈을 떠나 파리로 향하게 되었다. 그 도중 조국의 패배 소식을 듣고 연습곡 Op.10의 12 「혁명」을 썼다고 한다.

1830년 7월 혁명을 경험한 파리는 자유롭고 혁명적인 낭만주의 예술과 문학의 중심지였다. 또한 정치적인 이유로도 폴란드에 우호적이어서 쇼팽(폴란드)은 따뜻이 맞아들여졌다. 그는 리스트(헝가리), 멘델스존(독일), 로시니(이탈리아), 케루비니, 베를리오즈(프랑스), 벨리니, 마이어베어 등의 음악가와 시인 하이네, 들라크루아 등과도 교제했다.

또 1835년에는 여행 도중 라이프치히에 들러 이전부터 열렬한 쇼팽(폴란드)의 예찬자였던 R. 슈만(독일)과 클라라 비크(후의 슈만(독일) 부인)를 만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그의 창작 의욕은 크게 자극을 받고 「발라드 제1번(독주곡)」과 Op.25의 「연습곡」을 비롯하여 몇 개의 녹턴(관현악곡), 마주르카(독주곡), 왈츠 등을 써 내려갔다.

조르주 상드

파리의 낭만주의 운동의 중심은 살롱이었다. 쇼팽(폴란드)도 살롱에 출입함으로써 많은 친구를 얻게 된다. 상류 사회와의 접촉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그의 귀족적인 취미를 만족시켰으며, 유명한 부인들과의 교우는 확실히 정열적인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였다. 파리 도착 후 쇼팽(폴란드)은 이미 두 번의 연애를 경험했는데 어느 것이나 열매를 맺지 못했다. 1836년(26세) 그는 리스트(헝가리)로부터 고명한 여류 작가 조르주 상드(George Sand)를 소개받았다. 그녀는 연애 편력이 풍부한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이미 남편도 아이들도 있는 몸이면서도 가냘프고 여성적인 쇼팽(폴란드)에게 강하게 끌려, 두 사람은 이윽고 연애 관계에 들어갔다.

쇼팽(폴란드)은 1837년의 방영 이래 심한 결핵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그를 간호하는 상드의 애정은 그때까지의 그녀와는 다른 모성적인 것이었다. 1838년(28세) 두 사람은 남구의 마요르카(Majorca) 섬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 상드의 간호 속에서 씩씩하고 강한 인격의 영향을 받은 쇼팽(폴란드)의 창작은 이 무렵이 절정이었다. 「24개의 전주곡집」과 마지막 2개의 「소나타」를 비롯하여 그의 대표적 걸작이 잇따라 작곡되어 갔지만, 건강 상태가 좋아지는 징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최후의 연소

1846년(36세) 상드의 전 남편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의 문제가 원인이 되어 두 사람의 9년간의 사랑은 깨졌다. 상드의 곁을 떠난 실의와 고독에 찬 쇼팽(폴란드)은 건강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서 작곡도 불가능한 상태였다. 1848년(38세) 파리에서의 마지막 연주회를 마친 쇼팽(폴란드)은 제자였던 스코틀랜드의 부자집 딸의 의뢰로 영국 여행을 떠났다. 빅토리아여왕 어전 연주를 포함한 7개월 남짓의 여정을 마치고 파리에 돌아온 쇼팽(폴란드)의 병상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작곡 활동은 거의 중단 상태였으며, 이듬해 1849년(39세)에는 그리운 누나 루드비카가 간호하러 달려왔으나 재기는 이미 불가능했다. 이 해 10월 17일 쇼팽(폴란드)은 세상을 떠나고 유해는 파리에 묻혔으며, 20년 전 폴란드를 떠날 때 선사받은 고국의 흙이 그 위에 뿌려졌다고 한다.

꽃밭 속에 숨겨진 대포

쇼팽(폴란드)은 여성적이라고 할 만큼 섬세한 감각과 고귀한 서정을 갖춘 선천적인 낭만주의자였다.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그의 천분은 모두 피아노에 기울여지고, 주옥과 같은 결정을 낳아 갔다. 그러나 이들 작품의 화려한 울림의 밑바닥에는 일종의 처절한 기백이 흐르고 있었다. 슈만(독일)은 이것을 평하여 ‘꽃밭 속에 숨겨진 대포’라고 말했지만, 이 기백은 러시아의 탄압에 대항하려 하는 조국 폴란드에 대한 애국심에 뿌리가 박혀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폴란드의 민속 무곡 마주르카(독주곡)를 유례 없는 예술 음악으로 빚어 내었던 그의 열정과 투혼도, 더운 가슴에 들끓는 조국에의 향수어린 애정 때문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