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

[ Louis-Hector Berlioz ]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

출생 - 사망 1803년 ~ 1869년
국적 프랑스
주요작품 (교향곡)
렐리오 혹은 생활에의 복귀 Op.14 bis
이탈리아의 해럴드 Op.16
로메오와 줄리에트 Op.17
서곡 리어왕 Op.4
서곡 로마의 사육제
서곡 벤베누토 첼리니 Op.23
파우스트의 겁벌 Op.24
헝가리 행진곡
사자를 위한 대 미사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어릴 때 Op.25

몽블랑을 바라보는 작은 도시 라 코트 상 탕드레(La côte-St-André) 12월 11일에 태어났다. 전 해에는 문호 뒤마(Dumas)와 위고(Hugo)가 태어났으며, 예술사는 고전파에서 낭만파로 크게 전환하고 있었다. 또한 나폴레옹의 제1제정(帝政)의 막이 오르려는 격동의 시기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이 지방 명문의 의사로 예술을 이해하지 못해 베를리오즈(프랑스)는 독학으로 음악에의 눈을 떠 갔다. 이 무렵 아버지의 서재에서 발견한 (독일)의 오페라 (오페라)의 단편에 열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평생 변하지 않는 (독일)를 숭배하게 되는 복선이 되었다고도 한다.

의학에서 음악으로

1821년(18세) 아버지의 뜻에 따라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하게 되었지만 공부에는 흥미가 없어 오페라 극장을 다니거나, 파리 음악원의 도서관에서 (독일)를 연구하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리하여 음악에의 열은 더없이 높아지고 마침내 파리 음악원에 입학해서 작곡과 대위법을 배우게 되었는데, 양친의 맹렬한 반대로 학자금의 길은 끊기게 되었다. 빈곤에 허덕이면서 학업을 계속하고 로마상 수상의 기회를 보았으나 재삼 실패하였다. 1830년(27세) 8월, 7월 혁명이 한창일 때 완성한 칸타타 「사르다나팔의 최후의 밤」으로 드디어 로마상을 수상했다.

「환상 교향곡(교향곡)」의 탄생

그러나 이 무렵에는 명작 「(교향곡)」의 작곡도 상당히 진척되어 있었다. 영국 셰익스피어 극단의 주연 여우 해리에트 스미스슨(Harriet smithson)에 대한 연정은 이미 3년이나 계속되었으나 당시 제일의 인기 여우에 대한 사랑이 이루어질 리도 없어 번민과 고뇌가 공연히 환상만 일으킬 뿐이었다. 이러한 체험은 마침내 「(교향곡)」(1830)으로 결정(結晶)되는 것이다. 「(교향곡)」의 초연은 로마상 수상의 관심도 작용해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염원이던 로마 유학을 장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출발 전에 장래를 맹세했던 여류 피아니스트 마리 모크(Marie Moke)의 약혼 파기는, 유학중인 베를리오즈(프랑스)에게 절망적인 타격을 주었다. 결국 이 유학에서 음악적인 수확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이탈리아의 자연을 접한 것과 (독일)과의 친교만이 실적이었다. 그러나 실의의 밑바닥에서 오르기 위해서는 창작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으며, 「(교향곡)」의 속편 「렐리오」의 완성이 그것을 위한 좋은 목표가 되었다.

불행한 결혼, 오페라의 실패

파리에 돌아온 베를리오즈(프랑스)의 마음에는 또다시 스미스슨에의 사모가 타오르기 시작해 마침내 1833년(30세) 결혼하였다. 젊은 (헝가리)는 그 입회인으로 두 사람의 장래를 축복했는데, 이 결혼은 행복하지 않았고 헤리에트는 베를리오즈(프랑스)의 정신적 부담을 늘리게 할 뿐이었다. 이 무렵부터 생계를 위해 신문 평론에도 손을 대고, 작곡 활동과 병행하여 새로운 음악 운동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작곡가로서의 명성은 차츰 높아지고 (교향곡)(1834), 「사자를 위한 대미사」(1837)의 대작도 완성되어 만사는 순조로이 전개되는 듯 싶었다.

그러나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최초의 오페라 (관현악곡)(1838)의 실패는 그를 파산 직전의 상태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다행히 파가니니의 호의에 의해 얼마만큼 재기할 수 있었으며, 셰익스피어 원작에 의한 이색적인 교향곡 「로메오와 줄리에트」는 파가니니에 대한 답례로 쓴 것이다.

「파우스트의 겁벌」(오페라)

아내와의 불화와 창작 의욕의 감퇴는 자연히 국외로의 연주 여행을 촉구하게 되었다. 우연히 1846년(43세) 오스트리아, 헝가리 여행중 「파우스트의 8개의 장면」의 개작을 착안하고, 불후의 명작 (오페라)을 완성하게 되었지만 그 초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한편 이 여행을 전후해서 몇 가지 저술도 행해졌는데, 특히 『근대 악기법과 관현악법』은 그 후에 쓴 『회상록』과 함께 명저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런던의 필하모닉 협회를 모방하여 1850년 파리에서 필하모니 협회를 설립했으나 회원 부족 등 시기 상조 때문에 1년 후 해산되었다.

실패의 연속과 만년의 고립

연주 여행은 그래도 활발하게 계속되었다. 1855년(52세) 런던 연주 여행중 (독일)와 재회하여 옛정을 새로이 했으나, (독일)의 가식 없는 비평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게 되고 말았다. 이듬해에 겨우 프랑스 학사원 회원에 당선되었지만, 그 후는 고립의 길이 계속된다. 파리의 극장은 (관현악곡) 실패 이래 베를리오즈(프랑스)의 작품에 대해 굳게 문을 닫고, 신작인 2부작 오페라 「트로이인 Les Troyens」(1858)도 상연되지 않았다.

그래도 오페라에의 꿈은 사라지지 않아 마지막 오페라 「베아트리체와 베네딕트 Béatriceet Bénédict」의 작곡을 계속했으나 1854년의 해리에트의 죽음, 1862년의 두번째 아내의 죽음에 더해 1867년(64세) 아들 루이(Louis)의 죽음은 그를 점점 더 고독에 몰아넣었다. 1863년에 겨우 초연된 「트로이인」도 작품으로서는 어떻든 경제적인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867년의 러시아 연주 여행의 대환영만이 마음의 조그만 위안이었지만, 건강 상태도 악화하여 1869년(66세) 3월 8일 모스크바에서의 「트로이인」 성공 소식을 들으면서 고뇌에 찬 생애를 마쳤다.

서사시적인 그 작풍

베를리오즈(프랑스)의 시대는 예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낭만적 정신이 비약하는 격동기인 만큼 그는 이 시대의 반항과 예술적 열정을 한 몸에 모두 불사른 음악가였다. 작풍은 극히 서사시적인 경향이 강해서 같은 낭만파 작곡가라도 (헝가리)나 (독일)보다는 (독일)에 가깝지만, 프랑스적인 에스프리로 일관한 점에서 (독일)와는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또한 규모가 크고 다채로운 관현악법도 독자적인 것으로서 관현악이 지닌 가능성은 그에 의해 추구되었다도 할 수 있다. 후세에의 영향은 매우 커서 프랑스 근대 음악의 원조라고 할 만한 대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