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아키노 로시니

조아키노 로시니

[ Gioacchino Antonio Rossini ]

출생 - 사망 1792년 ~ 1868년
국적 이탈리아
주요작품 서곡 비단 사다리
오페라 세빌랴의 이발사

트럼펫, 호른 주자인 아버지와 가수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로시니(이탈리아)는 어렸을 때부터 음악 재능을 나타내고 있었다. 볼로냐(Bologna)의 시립 음악 학교에서 본격적인 음악교육을 받은 뒤, 오페라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12년 「시금석」으로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 데뷔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이듬해에는 오페라 세리아 「탄크레디 Tancredi」로 베네치아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이 두 도시에서의 성공으로 젊어서 유명해진 로시니(이탈리아)는 1815년(23세)에는 나폴리에서 성공한 뒤, 1816년 로마에 가서 걸작 (오페라)를 완성하고 초연했으나, 파이젤로(Giovanni Paisiello, 1740~1816) 일파의 반격을 당해 실패했다.

그러나 이윽고 그 진가가 인정됨과 동시에 그의 이름은 온 유럽에 널리 알려졌다. 1815년부터 1823년 사이에 각 극장을 위해 연간 2편의 오페라를 쓰는 계약을 맺고 「오텔로 Otello」(1816), 「신데렐라 La Cenerentola」(1817), 「도둑까치 La gazza ladra」(1817) 등 약 20곡이 완성되어 갔다. 1822년(30세) 빈에 가서 성공했으나, 이듬해 베네치아에서의 「세미라미데 Semiramide」 초연은 실패하고 고국의 냉대를 원망했다고 한다. 1824년에는 런던을 방문하여 호평을 받은 뒤 파리의 이탈리아 극장 음악 감독으로 취임, 이후 이곳을 활동의 본거로 삼았다.

파리에서의 자작 상연도 호평을 받았는데, 특히 1828년(36세)의 「윌리엄 텔 Guillawne Tell」의 초연에 의해 결정적인 대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7월 혁명에 의한 정부와의 분규가 화가 되고, 다시 1834년(42세) 무렵부터는 건강이 나빠져 창작력도 떨어져 갔다. 특히 1836년에는 라이벌이었던 마이어베어의 오페라 「위그노 교도」의 대성공으로, 이후 오페라의 붓을 꺾을 결심을 하고 말았다.

오페라계에서 은퇴한 로시니(이탈리아)는 1839년(47세) 이후는 모교 볼로냐 음악학교 명예 교장으로 취임한다. 1841년에는 미완성인 채로 있었던 「스타바트 마테르 Stabat Mater」를 완성했다. 1855년 이후는 다시 파리에 살면서, 명성을 따르는 예술가들에게 둘러싸여 「작은 장엄 미사 Petite messe solennelle」 외에 몇 개의 작품을 썼다. 1868년 지병인 요도 결석의 병상이 몹시 나빠져 76세로 영면했다.

로시니(이탈리아)는 종종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라고 불리는데, 우미하고 경쾌하며 넘칠 듯이 풍부한 악상에는 확실히 그러한 일면이 있다. 그는 선배나 동시대의 음악가들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그것을 완전히 소화해서 독자의 스타일을 정립하는 재능을 타고난 음악가였다. 오페라 작가로서 대성공한 것은 이 뛰어난 재능의 선물이었지만 젊어서 갑자기 은퇴한 점이나, (오스트리아)에게 보이는 내성적인 깊이가 결여되기 일쑤인 것도, 이 너무도 훌륭한 재능이 화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