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전지, 우주로 날아간 까닭

태양전지, 우주로 날아간 까닭

주제 우주/항공/천문/해양
칼럼 분류 일반기사
칼럼 작성일 2013-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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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정말로 올라갔습니다!”

냉전이 한창이던 1957년 10월 4일 금요일 밤, 미국 워싱턴에 있는 소련 대사관에 여러 나라의 과학자들이 모여 화기애애하게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국제지구관측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개최된 ‘로켓과 인공위성’이라는 학술세미나의 뒤풀이격 행사였던 터라 모처럼 동서 양 진영의 과학자들이 마음껏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한편 파티장 한쪽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뉴욕타임스의 월터 설리번 기자는 회사로부터 “러시아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했다고 한다. 소련 타스 통신으로부터 타전된 소식이니 빨리 확인해보라”는 긴급한 전화를 받았다. 설리번은 파티장으로 뛰어 들어가 소련의 인공위성이 우주로 올라갔다고 알렸고 미국 과학자들은 아연실색했다. 파티를 즐기는 동안 스푸트니크는 그들의 머리 위를 벌써 두 번이나 지나치고 있었다. 미국에게는 모처럼 겪은 대굴욕, 소련에게는 기가 막힌 한 방이었다. 그리고 우주시대가 시작됐다.

당시 미국은 해군이 독자 개발하던 뱅가드 로켓에 뱅가드 1호 위성을 실어 1958년까지 쏘아 올린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스푸트니크로 체면을 구긴 미국은 계획을 일 년 앞당기려 했다. 결과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두 번의 실패 이후 로켓 개발의 중심은 육군의 베르너 폰 브라운 팀으로 넘어갔다. 브라운은 1958년 1월 31일, 익스플로러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하면서 기대에 부응했다.

최초로 태양전지가 탑재된 인공위성 뱅가드 1호

최초로 태양전지가 탑재된 인공위성 뱅가드 1호

뱅가드 1호는 미국 최초, 어쩌면 인류 최초가 될 수도 있었지만 결국 두 번째 미국의 인공위성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태양전지 분야에서는 선봉이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했다. 바로 최초로 태양전지를 실용화한 사례였던 것이다.

20세기 초반, 태양광 발전은 SF 분야에서는 유행과도 같았다. 아서 클라크는 1945년 발표한 작품에서 이미 태양광으로 전기를 얻는 우주정거장을 묘사했다. 1954년, 미국 벨연구소에서 실리콘 기판을 기반으로 한 태양전지 시제품을 발표하면서 클라크의 꿈은 현실화됐다.

태양광발전의 엄청난 가능성은 곧 미 육국 통신대 사령관인 제임스 오코넬의 관심을 끌었다. 미 육군의 통신대는 부대간 통신 뿐 아니라 전 육군의 운영에 필요한 전력을 공급하는 막중한 책임도 떠안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극비리에 추진되던 우주개발계획은 통신대의 커다란 고민거리였다. 우주로 쏘아 올릴 첨단 기계장치에 어떻게 전기를 공급할 것인가라는 난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코넬은 통신대에서 전력공급장치에 대한 연구를 이끌고 있던 한스 지글러 박사에게 태양전지에 대해 알려주고 실용화가 가능하겠는지 알아보도록 요청했다.

지글러 박사는 벨연구소를 방문해 태양전지를 직접 보자마자 이 새로운 기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태양전지는 태양빛이 비출 때만 작동했기 때문에 밤에는 무용지물이었다. 게다가 전력 효율도 형편없었다. 벨연구소가 개발한 초기 태양전지는 에너지 효율이 4%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주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대기에 의한 에너지 손실도 없을 뿐 아니라 지구 뒤편의 그늘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태양전지판의 방향과 위치를 조절하는 것만으로 하루 종일 최대 효율로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무엇보다 큰 매력은 발사중량을 크게 줄이면서도 오랜 기간의 작동을 보장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지글러 박사는 당장 통신대의 일상 업무에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인공위성용 에너지원으로는 태양전지가 가장 훌륭한 해결방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보고를 받은 오코넬은 이를 곧 육군의 로켓개발계획, ‘런치박스 계획’에 적용시키기로 했지만 중요한 변수가 생겼다. 육군이 아닌 해군이 미국 최초의 로켓을 발사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당시 미국의 로켓 개발 계획은 육해공군이 서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추진하느라 자원이나 인력 낭비가 심한 편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교통정리하기로 결심한다. 그 결과 선정된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의 주역이 해군의 뱅가드 프로젝트였다. 육군과 달리 해군은 태양전지에 별 관심이 없었다. 지글러는 당장 해군으로 쫓아가서 태양전지를 인공위성에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직 미완성이고 안정성도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의견을 일축했다.

지글러는 포기하지 않고 저명한 과학자들을 설득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육군 소속인 지글러의 발언과 민간 과학자들의 발언은 파괴력이 달랐다. 과학자들은 곧 여론을 움직였으며 여론은 다시 육군 통신대가 인공위성에 부착할 태양전지 시스템 개발을 담당하게 하도록 해군에 압력을 넣었다. 결국 해군은 여론에 밀려 뱅가드 위성의 전원을 태양전지로 결정하고 이를 육군 통신대에 맡겼다.

육군 통신대는 곧 벨연구소에서 라이센스를 얻어 태양전지를 생산하던 호프만 전자회사와 접촉했다. 육군 통신대가 세부 사양을 정하면 이에 따라 호프만 전자회가가 제작하는 방식이었다. 길이가 고작 1cm도 되지 않는 태양전지판이었지만 여러 장 모으자 위성을 움직일 정도의 전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들을 한데 모아 충격이나 대기와의 마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강화유리로 보호한 케이스에 넣어 실제 위성에 부착할 태양전지 모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문제는 신뢰성이었다. 우주 환경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 보장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발사시의 충격이나 고온에 견딜 수 있는지도 문제였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두 대의 미사일 탄두부분에 태양전지 모듈을 부착하고 발사하는 실험을 진행해 성공 했지만 해군은 여전히 미심쩍다는 입장이었다.

도움의 손길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스푸트니크 쇼크 이후 미국은 더 이상 늑장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제대로 체면을 구긴 미국으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위성을 발사해서 ‘우리가 소련과 그렇게 많이 차이나는 것도 아니거든?’이라는 메시지를 전할 필요가 있었다. 자연히 뱅가드 프로젝트에도 비상이 걸렸다. 최초 계획됐던 기능들이 대거 빠졌으며 그저 위성이 제대로 살아있음을 알리는 송신장치만 부착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이는 육군 통신대에게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됐다. 당초 싣기로 했던 장치들이 대거 취소되자 로켓의 중량에 제법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인공위성에 슬쩍 태양전지 모듈 몇 개를 끼워 넣는다 해도 해군의 양보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차례의 난항 끝에 1958년 3월 17일, 마침내 뱅가드 1호가 발사됐다. 해군은 결국 태양전지 모듈에 자리 한 켠을 내주었다. 태양전지를 신뢰해서는 아니었지만, 발사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해군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발사 19일 후 뉴욕타임스의 헤드라인은 “화학전지는 지금쯤 고갈됐겠지만 태양전지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였다.

뱅가드 1호의 태양전지는 당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성과였다. 화학전지를 탑재했었다면 고작 몇 주 만에 작동을 멈췄을 인공위성이 몇 달, 몇 년 씩이나 쌩쌩하게 작동했던 것이다. 현재까지도 태양전지만큼 우주공간에서 오랜 시간 전력을 공급하는 전원장치는 없다. 태양전지가 없었다면 거대한 국제우주정거장을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고, GPS장치나 위성통신도 이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찌어찌 이용한다 하더라도 몇 달마다 한 번씩 위성을 쏘아 올리거나 수시로 우주왕복선을 올려 보내 전원을 교체하는 등 꽤나 번거로워졌을 것이다.

클라크와 지글러는 태양전지가 집과 건물을 뒤덮어 생활에 필요한 전원을 공급하는 상상을 했지만, 이제는 그 수준을 넘어 옷에 태양전지를 부착해 이동하면서도 언제든 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실용화를 앞두고 있다. 하늘에서 우주시대를 연 태양전지는 이제 땅에서 모바일시대를 열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지글러의 확고한 믿음과 스푸트니크의 예상치 못한 도움이 아니었다면, 아마 모바일 태양전지도 몇 년은 늦어졌을지 모른다. 태양전지는 의도치 않은 계기로 우주에서 자신을 증명하고 땅으로 내려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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