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
[ 金命煥 ]
김명환(金命煥, 1913-1989)은 전남 곡성군 옥과면에서 태어나 20세기에 활동한 판소리 명고이다. 호는 일산(一山)이다.
17-18세(1929-1930) 무렵 장판개(張判盖, 1885-1937) 문하에서 판소리와 북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20세에 본격적으로 박판석(朴判錫)을 스승으로 모시고 북을 익혔다. 비슷한 시기 주봉현(朱鳳鉉)에게 북 치는 자세 등을 배웠으며, 공창식(孔昌植, 1887-1936), 김정문(金正文, 1887-1935), 김봉학(金鳳鶴, 1883-1943), 박중근(朴重根) 등에게도 학습했다. 24세에 장판개에게 다시 북을 배웠으며, 41세부터 보성의 정응민(鄭應珉, 1896-1963) 문하에서 학습했다. 오용록(吳龍祿, 1955-2011), 정회천(鄭會泉, 1957- ), 김정수(金晶洙), 장종민 등이 그의 제자이며, 1981년에 김명환의 문하생들을 중심으로 '일산회'가 결성되었다.
22세 때 임방울(林芳蔚, 1904-1961)의 〈수궁가〉 공연 무대에서 처음으로 북을 잡았다. 25세에 상경해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송만갑(宋萬甲, 1865-1939), 이동백(李東伯, 1866-1949), 김창룡(金昌龍, 1872-1943), 정정렬(丁貞烈, 1876-1938), 김정문 등의 고수를 역임했다. 44세에 광주에 고법연구소를 차리고 정광수(丁珖秀, 1909-2003), 공대일(孔大一, 1911-1990), 안채봉(安彩鳳, 1924-1999), 한애순(韓愛順, 1924- ) 등의 명창과 교류하며 고법의 폭을 넓혔다. 56세에 광주를 떠나 서울에 고법연구소를 열었으며, 61세부터 뿌리깊은나무 판소리 감상회에 고수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74세부터 1년간 국립창극단 지도위원을 맡았다. 1978년 중요무형문화재 판소리 고법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김명환
북을 칠 때, 커다란 손바닥에서 울리는 소리가 매우 웅장했다고 한다. 또 김명환 특유의 변주법, 소란스럽지 않게 적시적소에 넣는 간결하고 위엄 있는 추임새 등은 당대 독보적이었다. 그의 고법은 지휘를 선호하는 유형에 가깝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것은 반주를 선호하는 유형과 대비되는 것으로, 북이 소리의 완급을 좇아가기보다는 소리가 북을 좇는 형태라 할 수 있다.
단순한 반주의 차원을 넘어서는 김명환의 고법은, 판소리 예술에 있어 '고법'이라는 개념이 성립될 수 있음을 인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끊임없이 수많은 명창과 명고를 찾아다니며 배우고 익힌 이론과 실기, 그리고 치열한 예술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고법과 판소리 이론은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어 널리 인정받고 있다.
『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어요』 표지 김명환 구술, 뿌리깊은나무, 1992
참고문헌
- 김명환 구술, 『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어요』, 뿌리깊은 나무, 1992.
- 이보형,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16 : 판소리 流派』,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