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렌시스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렌시스

[ Homo sapians neanderthalensis ]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렌시스 두개골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렌시스 두개골

플라이스토세 말기 초에 유럽으로부터 중동, 시베리아의 예니세이강을 포함한 제한된 지역에 존재하였던 옛 호모 사피엔스의 일종이다. 네안데르탈인은 13만 5천년 전에 처음으로 진화하여 출현한 이후, 서유럽에서 근동에 이르는 유라시아의 광할한 지역에서 생존하다 3만 4천년 전에 사라졌다. 매우 투박한 그들의 뼈가 1856년 뒤셀도르프 근처의 네안데르탈 계곡에서 발견된 이래로,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네안데르탈인이 차지하는 위치를 놓고 끊임없는 논쟁이 전개되어 왔다.

호모 에렉투스는 갱신세 중기 말경에 사라지고 플라이스토세 후기 이후 인류의 진화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단일종 내에서의 변화 과정이 되었다. 약 13만년 전에 시작된 갱신세 후기의 인류 진화는 호모 에렉투스와 초기 호모 사피엔스에서 보이는 진화적 변화의 추세를 따라 이루어진다. 플라이스토세 후기 말에 접근하여 치아구조의 진화는 일시적으로 그러한 추세의 역방향으로 진행되어 마지막 빙하기 초기에는 네안데르탈로 대표되는 강고한 치아구조의 집단이 등장한다. 네안데르탈이라는 용어는 초기에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등장 이전까지의 갱신세 후기의 모든 호모 사피엔스 집단을 통칭하는 개념으로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형질적 특징이 각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게 되고 기존에 네안데르탈인은 제한된 지역에 집중되어 나타나므로, 호모 사피엔스 네안데르탈렌시스라는 용어로 축소 사용되었다. 최근에는 이들이 제한된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다른 호모로 인식하여 이를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로 부르자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1856년 라인강 하류 삼각주 뒤셀(Dussel)지역에 퍼져 있는 네안더(Neander) 석회암 계곡에서 골재 채취작업 중에 발견되었다. 이 계곡은 엘베펠트(Elberfeld)와 뒤셀도르프(Dusseldorf)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계곡 이름을 따서 그 곳에서 발견된 유골의 이름을 네안데르탈인이라고 불렀다. 이 인골은 석회암 절벽에 있는 조그마한 동굴에 매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인골은 플로트(Johann Karl Fuhlrott)에 의해서 확인되었고 다시 해부학 교수 샤프하우젠(Hermann Schaaffhausen)의 도움을 받아 이것이 인류의 초기형태라는 주장을 할 수 있었다. 이 인간 형태는 현대인이 출현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진화단계를 나타낸다. 이 인골의 얼굴 안면 형태는 알 수 없으나 머리부분은 눈구멍 위의 눈두덩(brow ridge)에서 두개골의 뒷면까지 밑부분을 제외하고는 완전했다. 사지의 뼈는 매우 투박하며, 눈두덩부분은 큰 편이다. 그러나 안면과 악골치아가 없었기 때문에 현대인과의 차이에 대한 증거가 충분치 못해 논란이 제기되었다.

독일 인류학의 창시자이며, 세포병리학 분야의 권위자인 피르효(Rudolf Virchow)는 이 인골을 면밀히 조사한 후, 현대인과 차이가 나는 특징을 병적현상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스피인골의 발견이후 그 주장은 수정되어야 했다.

이와 유사한 네안데르탈인 형태의 두개골은 네안데르탈 계곡에서 발견된 것보다 시기적으로 이전과 이후에서 계속 발견되었다. 1848년에는 스페인 남단에 있는 지브랄타르(Gibraltar) 암산 북쪽의 한 채석장에서 발견된 바 있다. 1886년에는 벨기에의 나무르(Namur) 지방에 있는 스피(Spy) 마을의 한 동굴에서 무스테리안 지층에 묻혀 있던 2개의 스피인골이 발견되었다.

1908년에는 전반적인 인류진화, 특히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현대의 해석에 가장 믿을 만한 근간을 이룬 발견이 있었는데 그것은 서부 프랑스 무스티에(Le Moustier) 마을에서 발견된 유골이다. 이 유골은 전형적인 무스테리안 석기와 함께 발견되어 그 중요성이 더 크다.

같은 해 서남 프랑스의 샤펠로생(La Chapelleaux-Saints)이라는 마을 근처에서 이를 보충할 만한 보다 완전한 네안데르탈인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 유골은 파리박물관의 고생물학자 보울(Marcellin Boule)에 의해 해석되었다.

보울은 네안데르탈 유골의 엄지발가락이 갈라져 있고, 또한 그것이 다른 발가락들과 어느 정도 애향성을 유지하고 있는 점을 들어, 이 네안데르탈인은 현대 오랑우탄이 걷는 어색한 방법과 같이 발의 바깥 가장자리로 걸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무릎관절의 세부적인 부분이 완전히 펴질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네안데르탈인이 완전한 직립을 하지 못했고 기껏해야 무릎을 굽혀 발을 끌며 짧게 걸었을 것으로 해석했다. 또한 등뼈 상·하에 역곡선(reverse curve)이 없는 것이 현대 유인원과 같고, 또한 전체 몸통도 강력하긴 하지만 불완전한 직립자세에 적응되었음을 나타내준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그는 뇌껍질의 내면을 뜬 주형으로 상세한 실험을 하여 이 뇌가 현대 인간의 것에 비해 조직적으로 열등했다는 것과 특히 앞면의 둥근 돌출부(frontal lobes)가 더욱 그러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보울은 네안데르탈인이 현대인의 조상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하였다. 즉 보울은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에렉투스를 인류의 주된 진화선상에서 분기된 후에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멸종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는 네안데르탈인과 현대형태의 인간이 공존했을 가능성도 언급하여 고인류학에 하나의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한편 그 후의 연구결과는 실제 유인원들도 다리를 완전히 펼 수 있는 완벽한 능력을 갖고 있지만, 보울이 유인원과 인간의 무릅 관절에 대한 해부학적 기능을 간과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밝혀냈다.

유럽지역의 네안데르탈 집단은 가장 뚜렷한 형질적 지역성을 보여주는 집단이다. 특히 매우 넓고 큰 코, 전반적으로 아래쪽이 튀어나온 안면, 위로 튀어 오른 듯한 두개골, 몸무게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짧게 발달하였으며 고도의 근육운동에 시달린 흔적을 보여주는 사지 및 원통형의 몸집이라는 몇몇 점은 이들의 독특한 특징이다. 이러한 특징은 다음과 같은 해부학적·기능적 관점에서 현재의 극지방과 유사한 환경 하에서 적응한 결과라고 해석된다. 이들은 추운 기후 하에서 뇌의 원활한 대사운동을 하기 위하여 코가 넓어지고 크게 발달하여 동맥은 비강에서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게 되었다. 턱과 정두부는 코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며 발달하게 되므로, 네안데르탈의 안면과 두개골 상부는 매우 튀어나온 꼴을 하게 되었다. 치아와 코 및 이와 연관된 안면 하부의 발달은 네안데르탈에서 가장 현저한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네안데르탈인의 흔적은 이동(以東)쪽으로 시베리아의 알타이 지역에까지 나타나고 있다. 알타이의 많은 동굴 유적 중 데니소바 동굴과 오클라드니코프 동굴 유적에서는 무스테리안 지층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유골 파편과 치아가 발견되었다.

네안데르탈은 연구 초기단계에서 아마도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서 발생하여 유럽으로 이주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 의하여 멸종되었다는 생각이 우세하였다. 이 입장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옛 사피엔스 중의 특정 집단에서 진화한 것이며 따라서 네안데르탈과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사이에는 직접적 진화관계가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주대체론은 현재 크게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현재에는 주로 네안데르탈은 다른 지역의 여러집단과 많은 특징을 공유하고 있고 이들만의 독특한 특징들은 지역적 적응의 결과로서, 이들도 이 시기의 다른 집단과 마찬가지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등장에 일정 정도 유전적 기여를 하였다고 보고 있다. 즉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을 위시한 다양한 옛 사피엔스 집단에서 진화하였다고 보는 입장이다. 즉 비록 모든 옛 사피엔스 집단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직접적 조상은 아니더라도 후자는 많은 수의 전자 집단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유래하였다고 여겨진다.

유럽의 플라이스토세 후기의 네안데르탈인 문화는 흔히 무스테리안 석기문화라고 불린다. 고도로 발달한 르발루아 기법으로 제작된 각종 도구로 이루어진 무스테리안 문화는, 적응조건의 차이를 반영하듯 아프리카의 상고안 문화나 중국 정촌(丁村) 유적의 대형석기 위주의 석기문화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무스테리안 석기문화의 중심지는 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지역,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과 중동, 중앙아시아, 예니세이강을 경계로 한 남부시베리아 이서쪽 일대이다.

무스테리안 문화는 유물조합을 구성하는 각종 석기가 개개 유물군에서 차지하는 빈도의 차이에 따라 전형적 무스테리안, 샤렌띠안 무스테리안, 톱니날석기 무스테리안, 아슐리안전통의 무스테리안으로 구분한다. 이러한 특징은 주변환경에 적응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성으로 보는 견해와 이동의 산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두 견해가 공히 석기문화의 변화에 기여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 이전의 인류보다 발달된 체질적인 변화와 왕성한 이동성, 그에 따른 여러 환경에의 적응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실질적으로 무스테리안 석기문화는 큰 범주에서 르발루아 기법이라는 단일 기술에 묶여 있으면서도 그 세부에는 매우 다양한 기술적 박리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최근의 연구는 이 기술적 특성을 어떻게 묶어 나아가는가에 집중되어 있고, 체질인류학적인 자료와 이 무스테리안 석기문화의 분포권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도구를 활용하여 대형동물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냥하였다. 또한 무스테리안 유적에서는 의식주 전반에 걸쳐 변화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는 많은 흔적을 남겼다. 정교한 집자리, 불땐 자리, 발달한 석기와 골각기의 사용, 다양한 형태의 장신구, 묘제의 사용, 의식행위(儀式行爲), 예술행위 등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유고의 크라피나(Krapina)에서는 불구자가 사회적으로 보살핌을 받은 흔적이 보이며, 사냥 중의 사고·개인 혹은 집단 간의 갈등과정에서 일어난 살인행위의 결과로 보이는 것도 상당수 존재한다. 또한 샤니다르(Shanidar) 동굴 유적에서는 시체 위에 꽃을 뿌리고 흙을 덮었으며, 프랑스의 무스티에 동굴에서는 피장자의 머리를 수석 덩어리 위에 올려놓았다. 테쉭 타쉬 유적에서는 염소 두개골 6개를 나이 어린 네안데르탈의 주검 둘레에 뿔을 땅에 꽂은 상태로 배치하였다. 알프스 지역에서는 동굴곰의 두개골을 인위적으로 배치한 유적이 종종 발견된다. 이러한 사실은 네안데르탈인이 소위 동굴곰 숭배라는 종교적 행위를 하였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1980년대 이후 네안데르탈과 호모 사피엔스 화석의 발견과 이들에 관한 새로운 연구는 이들의 기원과 진화상의 위치에 관해 새로운 해석의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오늘날 고인류학자들의 견해는 네안데르탈을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라고 부르고, 아주 먼 세대를 올라가는 슬기사람의 직접조상으로 인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들을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라는 독립된 종으로 분류하고 우리의 직접조상과는 거리를 두고 갈라져 나간 종으로 인정해야 하는가로 크게 구분된다.

중동아시아의 게바라 동굴에서 발견된 화석은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의 혼혈 흔적이 보이지 않으며 오직 네안데르탈의 전형적인 특징만이 나타난다. 한편 30만년 내지 40만년 전에 이스라엘과 레바논 지역에서 살았던 호모 사피엔스의 화석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 교환흔적이 파악되지 않는다. 따라서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는 약 20만년 전에 살았던 공동조상에서 갈라져 진화하여 네안데르탈인은 유럽에서,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서 각각 다른 방향으로 진화해 서로에 유전자교환이 없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무스테리안 문화의 분포권역이 실제 네안데르탈인 화석의 분포권역을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고학적 해석과 인류화석에 대한 연관성을 신중히 조사하여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체질인류학(박선주, 1994년)
  • 고고학개론(이선복, 이론과 실천, 1988년)
  • Encyclopedia of Human Evolution and Prehistory(Ian Tatterwall·Eric Delson·John Van Couveri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년)
  • 형질인류학 및 선사고고학(존스톤·셀비 共著, 권이구 譯, 198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