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 유적

양동 유적

[ 蔚州 良東 遺蹟 ]

지역 울주

경상남도 울주군(現 蔚山) 청양면 동천리에 위치한 유적으로 동북에서 서남으로 뻗은 표고 25-35m 정도의 완만한 구릉상에 위치한다.

이곳은 집자리(住居址), 분묘(墳墓) 등이 입지하기에 최적의 지세(地勢)를 띠는 곳으로 청동기시대 집자리(住居址) 5기, 삼국시대 나무덧널무덤(木槨墓) 9기, 돌무지나무덧널무덤(積石木槨墓) 23기, 소형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 1기, 독무덤(甕棺墓) 1기,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 1기, 움무덤(土壙墓) 1기, 고려시대(高麗時代) 것으로 생각되는 원형수혈유구(圓形竪穴遺構) 1기 등 모두 42기의 다종다양(多種多樣)한 유구가 검출되었다.

청동기시대 집자리는 5기가 조사되었는데, 장방형(長方形)이며 구릉의 능선에는 장축, 단축이 8.75×4.1m의 대형집자리 3호가 있고, 사면에는 길이 5m 전후의 소형 집자리가 분포하고 있다. 집자리의 벽면에는 도랑(周溝)이 있는데, 이 시설은 목책(木柵)을 세우거나, 배수구(排水口)의 역할을 겸했던 것으로 보인다. 4·5호에서는 화덕자리(爐址)가 장축선상의 벽면 쪽으로 치우쳐 설치되어 있는데, 집자리 바닥을 조금 판 간단한 시설을 이용하였다. 유물은 매우 빈약하지만 구멍무늬토기(孔列文土器), 손잡이바리(把手鉢), 붉은간토기(紅陶)가 출토되었다. 토기형식으로 보아 B.C. 6-5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 목곽묘는 주로 본 유적의 중심부인 정상부에 분포하고 있다. 9기 중 4기는 원상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출토유물도 양호하다. 이들 유구의 길이, 너비는 대부분 1.25 -2.6×0.45-0.85m로 장축방향은 북동과 북서 방향이다. 바닥시설은 대부분 황색점토를 이용하였으나 넓은 천석(川石)을 사용한 것도 있다. 연대적으로 이 유적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적석목곽묘와 동시기의 것(19호)도 있으나, 대체로 전단계의 것이며, 대개 5세기 전반대의 것으로 1-2기는 4세기대까지 올라갈 수 있는 것들이다. 적석목곽묘는 23기가 조사되었는데, 상기한 목곽묘들이 구릉의 정상부에 조영되어 있음에 비해 구릉의 사면에 영조된 것이 특징적이다. 이것은 연대기적으로 이른 분묘가 입지조건이 좋은 중심부를 선점하고 후대에 조영되는 분묘일수록 주변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이는 매납유물을 통한 연대추정에서도 확인되었다.

이 유구는 다곽식(多槨式)과 단곽식(單槨式)의 양유형(兩類型)이 있는데 전자는 소형들이며, 후자는 주로 대형의 적석목곽묘로 나타났다.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의 장축방향은 대부분이 북동방향이며, 북서방향도 소수 확인되었다. 바닥시설은 대부분 넓은 천석과 소형 강돌을 이용하였다. 연대는 출토유물로 보아 5세기 후반대에서 6세기 전반대에 걸친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외 소형의 수혈식석곽묘 1기는 소형의 적석목곽묘들과 함께 다곽식을 이루고 있는 점이 주목되며, 옹관묘는 대부분이 파괴되었으며, 소아용 무덤일 것으로 보고 있다. 횡구식석실묘는 매납토기들로 보아 대개 6세기 말에서 7세기 전반에 걸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시대 자기편이 출토된 성격불명의 원형수혈유구는 간단한 화덕자리가 확인된 점에서 당시의 간이움막으로 밝히고 있다.

양동 유적에서는 적석목곽묘와 횡구식석실묘가 동일지역에서 공존하고 있는데, 이것은 신라지역에서 적석목곽묘가 6세기 중엽 이후 급격히 쇠퇴하는 이유가 신묘제인 앞트기식(橫口式), 또는 굴식돌방(橫穴式石室)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라는 하나의 근거를 마련한데 그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 蔚州良東遺蹟調査槪報(釜山大學校博物館, 198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