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경의 기원

농경의 기원

[ 農耕- 起源 ]

농경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인류가 언제부터 농사를 짓게 되었는가 하는데 대한 의문으로부터 출발한다. 일반적으로 신석기시대부터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오늘날 농경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바로 신석기시대에 대한 연구와 같은 뜻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농경의 발생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이로 인해 구석기시대 이래의 각종 사회질서를 재편하게 되고 문화진화가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농경에 의한 잉여생산이 축적되는 과정에서 집단성원들 사이의 역할이 분화되었고, 사회 내적·외적 지위의 차이를 가져왔으며, 이로 인한 갈등이 유발되면서 마침내 계급사회와 국가가 발생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고든 차일드(G.Childe)의 연구 이후이며 그 이전, 대략 1940년대까지는 사람들이 발굴해서 나온 고고학 자료를 농경과 결부시키는데 주의를 쏟지 않았으며, “왜 그리고 어떻게(why and how)” 사냥·채집이라는 생계수단으로부터 농사를 짓는 쪽으로 전환하게 되었는가 하는데 대한 관심도 희박하였다.

물론 철학적 혹은 인류학적인 추상(推想)의 방법으로, 생계의 가장 기본 바탕을 동식물의 사육 재배에 두는 식량생산의 기원을 따져보는 일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리고 모르간(L.H.Morgan)의 진화론에 있어서는 인류문화의 발달단계를 “사냥 채집(야만)→동식물의 사육재배→문명”으로 생각하는 중에 농경의 위치가 별다른 의문 없이 자리잡혀 갔다. 이러한 추상(推想)을 가장 정치하게 구현시킨 동시에, 농경의 기원 연구를 새로운 장으로 끌어간 사람이 차일드이다.

고든 차일드의 건조설 : 차일드는 식량생산의 기원과 그 파급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신석기혁명(Neolithic Revolution)’이란 용어를 소개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추정하였다. 식량생산의 혁명이 일어났던 시기는 주요한 기후변동시기 중의 하나로서 갱신세 말기인 B.C. 10000년 무렵이다. 유럽빙하가 퇴각하자 아프리카 북부와 아라비아에 내리던 여름비가 유럽으로 옮겨가게 되고 대부분의 근동지방은 몇몇의 오아시스를 남겨두고는 건조화되어 갔다. 이 건조화는 식량생산경제를 채택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자극동인가 되었다.

즉 냇가의 양쪽 기슭이나 오아시스 근처에 사람·동물들이 집중해서 몰려들게 되고 마침내 생존을 위해 격렬한 재적응 과정에 돌입하였는데 이렇게 제한된 곳에서 사람, 동물, 식물들이 나란히 있게되자 사육, 재배(domestication)를 향한 새로운 공생관계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차일드의 이러한 주장을 ‘환경결정론적 모델’이라고 한다. 이 주장의 골자는 환경의 변화 때문에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상당히 단순한 것이며, 종래의 문화발달단계설을 그대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었다. 또 환경변화의 증거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농경의 원인을 명확히 밝히기는 하였으나 추상적이었다. 하지만 종래의 문화진화론에 환경의 변화라는 동인을 부여한 최초의 설명이었기 때문에 그 학설사적 의의는 크다. 이 이후로 연구자들은 농경으로 전환한 원인을 설명하려고 하였고, 발굴에서 그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브레이드우드의 핵지구설 : 그 후 많은 학자들이 근동발굴에서 차일드의 가설을 검증하는데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이 가운데 브레이드우드(Robert J.Braidwood)는 동물학자, 식물학자, 기상학자, 지질학자 등으로 구성된 발굴단과 함께 조사한 결과, 갱신세 말기의 근동지방에 극단적인 기후변화가 있었다는 차일드의 가설에 반대하였다. 그는 이전의 간빙기에 있어서도 비슷한 기후변화가 있었으나 농업경제로 발달하지 않았고, 갱신세 말기의 환경에서는 사람이 사냥채집에서 농경으로 옮아가도록 하는 동인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

오히려 그는 피크와 플루어(Peake and Fleuer) 등의 영향을 받아 동부 아나톨리아 고지대의 어딘가에서 밀과 보리 재배가 시작되었으며, 비옥한 초승달지대(the Fertile Crescent) 부근의 구릉이 그러한 지역으로 유망하다고 지적하였다. 결국 브레이드우드는 쟈그로스 산맥 기슭의 쟈르모(Jarmo)와 제리코(Jericho) 유적 등을 발굴하였으며, 여기에서 얻은 자료를 근거로 자연서식지 혹은 핵심지구(Nuclear zone)가설을 주장하였다.

핵심지구란 근동지방에 있어서 사육재배될 가능성이 있는 야생의 동식물종이 널리 퍼져있는 곳을 말한다. 최적의 장소는 물론 비옥한 초승달지대가 있는 쟈그로스-타우르스 산맥 기슭의 구릉 및 계곡이다. 이러한 곳에서 야생종을 길들이고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면 이들과 사람들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유지되며, 드디어는 야생종을 시험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하여 원시 농경(incipient agriculture)이 이루어진다. 초기의 농경공동체들은 정착을 하여 취락을 형성하고, 토기제작을 하고, 정교한 건축술도 이루어진다. 마침내는 이러한 농경마을 유형의 여러 특징들이 복합되면서 세계 각처로 퍼져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브레이드우드의 조사는 중동지방에서 이루어진 초기농경의 전개과정과 당시의 환경변화상, 자연서식지 등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여 주었다. 그리고 어떠한 이론에 입각하여 농경의 기원에 대한 모델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농경에 대한 경험적 자료들을 종합하여 제시해 주는데서 기여한 바가 많았다.

그러나 브레이드우드도 나름대로 농경의 원인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는 농경은 인간집단 사이에서 항상적으로 증가하는 문화적 차별화와 전문화가 절정에 달했을 때 생겨난다고 하였다. 즉 농경으로 전환되는 동인은 전적으로 문화적인 것이다. 이것이 “왜 그리고 어떻게 농사를 짓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는가를 강하게 비판한 학자 가운데 빈포드(L.Binford)가 있다.

빈포드의 해석에 의하면 브레이드우드는 문화발달에서 가장 중요한 동인을 인간 본성 속에 내재한 고유의 것으로 가정한다. 즉 받아들이는 힘(감수성)과 실험정신이 고양됨에 따라 문화발달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이전 간빙기에는 문화가 아직 식량생산에 도달할 단계가 안 되었기 때문에, 식량생산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빈포드는 이것은 식량생산 혁명에 대한 가설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유기적 진화의 방향을 향한 고유의 힘을 표현한 것이든 혹은 문화적 진화를 중심으로 한 의외적인 인간성을 표현한 것이든 간에, 문화진화에서 관찰되는 흐름(trends)이란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뜻밖의 인간 특성을 가정하는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브레이드우드의 가설에 따른다면, 사람이 일정한 문화단계에만 도달해있다면 야생 밀이 있는 곳에서는 밀농사꾼이, 산양이 있는 곳에서는 양치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농경기원에 대한 브레이드우드의 많은 공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비판은 설득력이 있다.

빈포드의 인구압-주변지구 가설 : 농경의 기원에 대해 세번째로 중요한 가설을 제시한 사람은 빈포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동안(브레이드우드가 지지를 받고 있던 약 10년 사이)많은 새로운 사실과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우선 헬벡(Hans Helbaek), 싸우어(Carl Sauer), 리드(Chares Reed) 등의 동식물학자에 의해 식물·동물의 생태, 특히 야생종과 재배종의 차이, 그 기원지와 전파 등에 대한 많은 지식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라이트(H. Wright) 등의 연구에 의해 농경발생을 전후한 시기의 근동지방 기후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또 고고학·민족지학적인 조사의 증가로 농경과 정착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생태계가 풍부하여 자원확보가 보장되는 사냥·채집 집단의 경우는 비교적 여유있게 정착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유명한 예로 나투프문화(Natufian culture)를 들 수 있다. 중남미, 동남아시아, 중국 등과 같이 근동지방과는 전혀 다른 패턴으로 농사가 전개되어 나간 농경 기원지가 여럿 있음이 밝혀졌다. 그동안 지나치게 근동의 농경에 주의가 쏠려 있었던 것이다. “농경이 사냥채집보다 유리하기만 한가?”라는데 대한 반론도 제기되었다. 농경은 사냥채집에 비할 수 없이 높은 토지생산성을 갖고 있지만, 농경에 투입되는 노동력 및 여러 투자비용도 농경 쪽이 더 과중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단위 노동량당 얻을 수 있는 에너지의 양과 영양소의 질은 기대치 이하임을 알게 되었다. 천연재해로 인한 위험부담도 사냥채집 때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크다.

이리하여 농경사회란 문화발달에 따른 이상향이 아니라 그와 같은 상태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떠한 필연적 요구 때문에 생겨난 산물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농경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려면 각 지역에 따라 농경의 시작을 전후한 단계의 문화적·생태적·사회적 변화과정에 대한 이해도 필수적임을 알게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인구압(population pressure) 가설이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보서럽(E. Boserup)등의 경제학자에 의해 먼저 제시되었다. 그때까지 널리 퍼져 있던 생각은 식량공급이 인구증가를 제한한다는 것이었지만 보서럽은 인구증가는 자체적·독립적으로 일어나며, 인구압이 증가함에 따라 더욱 많은 생산을 위해 농경기술이 발전하고 생산성이 향상된다고 주장하였다.

스미스(Philip Smith) 등은 이를 농경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가설로 발전시켰는데 요지는 다음과 같다. 후빙기의 기후 회복으로 식량자원이 늘어나자 인구 또한 급히 늘어났으며, 그 가운데서도 정착생활을 하는 집단의 인구 규모는 기존의 생계전략만으로는 사회유지가 되지 않을 만큼 급격히 증가하였다. 야생식물이 밀집한 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들을 인위적으로 재배함으로써 인구규모에 알맞는 식량을 획득하려 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농경 채택-식량생산증가-인구증가-생산확대의 필요-농경의 집중화”라는 순환고리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논의는 문화진화의 궁극적 동인을 집중적으로 추구한 1960년대의 분위기 속에서 태어나 인구압이 그 원인이라는 혁신적인 사고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환경변화와 인구증가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피상적이며, 고고학 자료상 인구증가를 보여주는 곳에서도 농경이 발생하지 않은 경우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 등의 비판을 받았다.

빈포드는 농경의 시작을 후빙기의 적응(post Pleisto-cene adaptation)이라는 관점에서 보았다. 그는 구석기연구로부터 출발한 학자답게 농경이라는 현상을 따로 떼어놓고 보지 않고 구석기-중석기시대의 연속선상에서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그의 수렵채집집단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이들이 일반의 예상만큼 그렇게 빈곤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갱신세 말기 즉 후기 구석기로 오면서 사람들은 점차 작은 동물·수산자원·무척추동물·식물채집 대상의 전문화 등으로 식량자원을 광역화(broad spectrum economy)해 가고 이러한 가운데 각 집단은 정착하여 차츰 인구를 증가시켜 나갔다. 그러나 아직은 환경이 제공해줄 수 있는 식량 이하로 인구밀도가 조절되어 있어 평형체계 내에 편입되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조건 아래에서는 한 집단에 부여되는 식량증대의 압력이 그렇게 강력하지 않다.

평형을 깨뜨리는 상태가 오는 데에는 2가지 요인이 있는데, 첫째는 식량자원을 감소시킬 만큼의 극단적인 자연환경의 변화, 둘째는 자연환경이 제공하는 역량 너머로까지의 인구밀도 증가이다. 빈포드는 첫번째의 변화에 대한 정보가 불충분하다고 하여 제외하고 두번째의 논의를 진행시켰는데 여기에서 폐쇄인구체계(closed population system)와 개방인구체계(open population system)가 나온다.

폐쇄체계는 낙태, 피임, 금욕 등 내부적인 기제로 인구수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체계이다. 개방체계는 외부로 인구를 방출하거나 외부에서 인구가 유입되는 두 경우가 있다. 인구증가로 인한 갈등과 스트레스가 생기는 것은 이 개방체계에서이다. 특히 그 주변부에서는 늘 순환적인 인구압이 발생하고 있다.

빈포드는 이를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성하였다. 즉 갱신세 말기에 인구증가가 일어나 해안에서 내륙쪽으로 거주지를 옮긴 사람들이 옮겨간 지역의 인구압을 높이게 되었는데, 이는 결국 식량위기라는 긴장을 가져온다. 이를 극복하려면 인공적으로 좀 더 효율적인 식량생산 수단을 강구해야하고, 이같은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농경이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요약하면 〈표〉와 같다.

〈표〉농경기원에 대한 주변지구가설

〈표〉농경기원에 대한 주변지구가설

홍적세말기에 사냥, 채집으로 식용자원 다양화하자 영양공급 안정됨

다양한 식량자원(수산자원포함)을 손쉽게 얻게되고 기후가 좋아지자 (특히 유리한 지역에서)주기적인 인구증가가 빨라짐

폐쇄인구 시스템: 내부수단으로 통제


안정된 사냥채집 사회유지됨

한계지역의 생산성을 증가시키기 위해 핵지대의 동식물이 도입되는데. 핵지대의 풍요함을 인위적으로 재생시켜보려는 의도임

개방인구시스템: 새로운 지역으로의 이주에 의해 조절됨

집단들은 더 한계지역으로 이동(평행이 깨어지므로 긴장지대 생겨남)

이러한 동식물은 농사라는 통제된 조건아래서만 번성함

빈포드는 이 가설을 유럽 해안과 레반트 지역에 적용하였으나 증거가 부족하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예를 들면 내륙으로 이동한 집단의 증거여부, 인구압의 존재여부 등에 관한 비판이다.

주변지구 가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플래너리(Kent Flannery)가 이를 근동지방에 적용한 이후부터이다. 세 가지의 가정이 먼저 필요한데 첫째 식량생산에 앞서 사냥·채집꾼들이 증가하고 있었고, 둘째 식량생산은 이란-이라크-터키의 산기슭 및 팔레스타인 삼림지대인 주변부에서 시작되었으며, 셋째 식량생산은 그 시초부터 중심지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가정을 쿠지스탄의 알리 코쉬(Ali Kosh) 지역에 적용하였다. 즉 쟈그로스 산맥의 중간 고도지대에서는 식량채집을 광역화하여 약 2만 년 전부터 정착과 인구증가가 시작되었고 이것이 점차 가속화해가자 더 주변부 쪽으로 떠나는 집단이 생겨났다. 이 주변부의 하나가 동식물의 야생종이 서식하기에 너무 덥고 건조한 알리 코쉬이다. 결국 알리 코쉬에서 발견되는 양, 염소, 밀, 보리 등은 최적지로부터 사람들이 가지고 간 것들이다. 여기에서 보듯이 플래너리는 식량생산에로의 전환에 대한 인과관계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그 메커니즘을 설명하는데 주력했다고 하겠다.

빈포드-플래너리의 논의도 증거가 많이 부족하고 동물사육에 대한 적절한 언급이 없으며 세부적인 사항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지만, 이러한 점들이 주변지구 가설의 장점을 능가하지는 못한다. 주변지구 가설은 농경에서 발명이라는 우연적인 요소의 비중을 최소화하고 사건의 인과관계를 찾아보려 한 것이다. 그들은 문화변동의 중요한 촉진제로서 최적의 서식지 내에서 주변의 서식지로 퍼져가는 순환적인 인구압을 꼽았는데, 이로서 선사시대의 사회도 항상 격변하고 있는 동적인 사회라는 상(像)을 제시해 준 셈이다.

주변지구 가설은 최근까지 제시된 이론 가운데 농경의 발생을 가장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농경의 발생과 같은 주요변화의 동인을 어느 하나만으로 고정하여 설명하기는 여전히 부족하다. 현재는 잠정적으로 적당한 환경, 문화-기술의 혁신, 인구성장과 밀도, 사회조직과 같은 여러 요소가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상호 관련되는 가운데 식량생산이 일어났을 것으로 합의되고 있다.

최근의 연구 : 한편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 농경의 기원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연 사람이 데이비드 린도스(David Rindos)이다. 그는 자연선택설에 입각하여, 농경은 인간과 식물이 상호진화(coevolution)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생했다고 주장하였다. 즉 자연계 내의 자연선택의 법칙에 따라 식물은 식물대로 진화되어 재배식물이 되는 단계에 도달했고,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동물대로 진화하여 재배될 수 있는 식물과 공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식물재배(domestication)와 경작(cultivation), 농경(agriculture) 등의 단계를 엄격히 구분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사람이 알아낼 수 없는 농경의 초기과정을 단계별로 상정하였다는 점은 검증하기 어렵고, 수백 만년 동안 인간이 자연을 정복, 통제, 조절할 수 있었다는 점을 간과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종래의 강박적인 인과관계의 추구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접근방식은 많은 추종자들을 생겨나게 하였으며, 농경의 발전단계를 검토함에 있어 한 번쯤 고려해볼 만한 견해이다.

최근에는 인구압 등의 스트레스가 농경의 기원이라는 모델에서 벗어나 사회경제적 경쟁, 또는 고도로 복잡화된 사냥-채집사회에 있어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농경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등의 새로운 주장도 나오고 있다. 스트레스 모델이 신고고학자들에 의해 많이 주장되었던 만큼, 위의 새로운 주장들은 주로 후기과정(post-processual) 고고학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으나 아직은 논의가 진행 중이다.

여러 나라 농경의 실제 : 최근까지 발견된 자료로 볼 때, 농경기원 논의의 핵심지역인 중근동에서 실제로 농경을 시작한 시점은 레반트와 쟈그로스 산맥 모두에서 대략 B.C. 8000-7000년경으로 추정된다. 보리는 B.C. 8000년 무렵에 나타나고 있다. 농경의 주 대상은 밀과 보리, 콩류, 개, 양과 염소, 돼지, 소 등이다. 그러나 근동지방과는 전혀 다른 시기와 장소에서 다른 유형으로 농사가 전개되어 나간 중심지가 여럿 있다. 예를 들어 중미에서는 B.C. 5000년 무렵에 야생 옥수수인 테오신테(teosinte)를 개량하여 재배하기 시작한다. 그밖에 콩, 호박, 아보카도를 재배하여 단백질과 지방을 보충 받았는데 B.C. 1300년 무렵이면 이러한 생계양식이 멕시코 일원에서 확립되어 중미 각지에 파급된다.

한편 신대륙에서 동물사육의 전통은 드물어 기니 피그(Guinea pig)와 페루의 야마 정도가 고작이다. 신대륙에서의 농경은 중동에 비해 매우 늦게 시작되었으나, 농경이 시작된 후의 문화진화는 중동의 그것과 비슷한 양상을 띄고 발전하였다고 한다. 동남아시아(태국)의 Spirit Cave에서는 B.C. 9000년 무렵 견과류와 구근류가 재배되었다고 보고되었지만 더 이상의 후속 연구가 없다. 안데스 지역에서도 구근류를 재배했을 가능성이 큰데, 이렇게 재배된 줄기나 뿌리를 고고학적으로 검출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으며, 자료가 단편적이다 보니 연구의 진척도 없다.

중국의 농경기원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아직 자료축적의 단계이므로 시간이 필요하다. 중국에서는 벼농사의 기원이 B.C. 7000년을 넘어서고 있으며 양자강 이남의 벼농사에서는 장립형과 단립형이 모두 나타난다. 개와 돼지를 비롯한 가축사육도 이 무렵에 시작된다. 한편 황하 유역의 화북지방에서는 조, 수수 등의 잡곡류와 배추 등의 채소류도 길러진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농경의 기원 연구란 결국 신석기연구인데, 한국의 신석기시대에는 농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여기는 시각이 강하다. 물론 농사를 짓지 않은 신석기문화도 시베리아, 아프리카 등 지구상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입견을 갖고 농경의 존재 여부를 판단하기 전에, 농경기원에 대한 사전지식을 가지고 발굴에서 나온 자료들을 종합하여 한국 신석기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다. 압록강 바로 너머의 중국 동북지방에서 일찍부터 발달한 조, 기장 농사와 서해안의 남경·궁산·지탑리·암사동 유적에서 출토된 농사도구 및 식물자료는 한국 농경 연구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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